이사벨 여왕과 그라나다 왕실 예배당(Capilla Real de Granada)

2016. 1. 12. 08:00스페인 여행기 2014/그라나다

스페인 여행을 하셨던 분들은 아마도 위의 그림을 무척 자주 보았을 것입니다.

언덕 위로 알람브라 궁전이 보이고 왼쪽의 검은 말을 탄 사람이

나스르 왕조의 마지막 술탄인 보아브딜입니다.

그리고 오른쪽은 눈보다도 더 하얀 말을 탄 사람이 이사벨 여왕입니다.

이사벨은 아마도 스페인 역사 드라마에 가장 많이 나오는 인물이지 싶습니다.

 

그녀로 말미암아 이베리아 반도에서 술탄의 세상은 끝이 나고 가톨릭 세상이 온 것입니다.

이렇게 평생을 전쟁터를 누비며 바람처럼 살았던 그녀도 55세의 일기로 숨을 거둡니다.

정말 숨 가쁘게 살아온 여인이 아니었을까 생각되어 오늘은 그녀가 잠든 그라나다 대성당 옆에

는 왕실 예배당(Capilla Real de Granada)을 찾았습니다.

 

이곳에 잠든 사람은 이사벨 여왕과 그의 남편 페르난도 부부가 함께 더라고요.

1504년 이사벨 여왕이 죽은 해부터 왕실 예배당을 짓기 시작해 1521년에 완공한

후기 고딕 양식의 건물로 석관은 피렌체의 유명한 조각가에 의뢰해

만들었다고 알려졌으며 스페인 역사에 가장 위대한 인물로 기억되는 사람의 무덤을 모신

곳 치고는 무척 작고 간소합니다.

 

입장료는 4유로로 비싼 편은 아니지만, 다만 아쉬운 것은 로비까지만 사진 촬영을 허락하고

석관이 있는 예배당 안은 사진 촬영을 금하기에 석관 사진은 찍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알람브라 궁전에서 이곳 그녀 석관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있기에

그 사진을 찍었지요.

 

입장 시각이 요일에 따라 다르고 특히 낮에는 1시 30분부터 낮잠시간이 있어 문을 닫습니다.

10시 15분이나 11시에 문을 연다는 게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렵고

특히 낮에 문을 닫는 일도 마찬가지지요.

시간을 모르고 아침 일찍 찾아갔다가 한참을 방황했습니다.

 

이사벨과 보아브딜...

양국을 대표하는 두 사람의 만남은 역사적인 만남이지요.

좋은 의미로 이렇게 만나면 오죽 좋겠습니까?

그러나 한 사람은 조상 대대로 781년간이나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지만, 결국 이방인으로

모로코로 돌아가는 처지고 또 한 사람은 조상 대대로 781년간이나 고향에서 쫓겨나 방황하다가

이제 옛 땅을 회복하는 방점을 찍는 처지입니다.

 

이날이 바로 1492년 1월 2일로 당시 그라나다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 것입니다.

그날은 몹시도 추웠습니다.

정든 곳을 떠나야 하는 술탄은 더 추웠을 겁니다.

이들이 탄 말도 이미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합니다.

머리를 바짝 쳐든 말과 고개를 숙인 말이 완전하게 구분되는 그림입니다.

 

그라나다를 다니다 보면 이사벨 여왕과 관련이 깊은 곳이 무척 많습니다.

그녀의 남편 페르난도보다도 말입니다.

이사벨 여왕은 아마도 스페인이 배출한 걸출한 지도자임이 분명합니다.

위의 사진이 바로 이사벨과 콜럼버스의 만남을 보여주는 동상입니다.

 

어디 그라나다 뿐이겠어요?

스페인 어디를 가나 쉽게 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이사벨 여왕입니다.

아마도 스페인 사람에게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분명 이사벨 여왕이라 하지 않겠어요?

이번 여행을 통해 보았던 스페인의 모습은 이사벨 여왕으로부터 시작해

이사벨 여왕에서 완성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라나다를 무어인으로부터 온전하게 인수한 그해 이사벨 여왕은

4월 17일 콜럼버스와 협약을 체결합니다.

그 내용을 보면 정말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평민에 불과했던 콜럼버스는 자신과 그의 후손에게

귀족인 DON 칭호와 제독의 계급도 요구했지요.

돈(DON)이라는 칭호는 귀족을 부르는 칭호로 돈 키호테처럼 이름 앞에 붙이는 호칭이라죠?

 

더불어 그가 발견할 땅에서 얻는 수입의 10%와 모든 상선 무역거래의 8분의 1을 요구했답니다.

그리고 그가 발견한 땅이 식민지가 될 경우 총독으로 임명해달라는 요구도 잊지 않았지요.

여러분이 이런 제의를 받았다면 쉽게 승낙했겠습니까?

당장 미친놈이라고 곤장을 쳐서 내쫓았을 겁니다.

대단히 불합리한 요구였지만, 이사벨 여왕은 그가 원한대로 들어주었답니다.

 

이를 두고 두 사람 사이를 의심하는 이야기도 퍼지기도 했지요.

그 이유로는 사실, 콜럼버스가 신대륙 탐험을 위해 후원을 요구했던 곳이 포르투갈과

프랑스 등 여러 나라였지만, 모두 그곳에서는 사기꾼이고 듣보잡이라고

거절당했던 전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합리한 콜럼버스의 요구를 이사벨은 들어주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후원이 결정돼 출발했지만, 가도 가도 육지는 보이지 않자

점차 선원들이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선원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주로 사형수나 흉악범이 상당수였지요.

그들에게 항해에서 돌아오면 죄를 묻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배에 태웠다네요.

 

실제 9월 24일 항해일지에 콜럼버스는 이렇게 적었답니다.

"육지가 나타날 조짐이 보이는데 현재 나와 선원들 사이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드디어 10월이 되자 선원들은 폭동을 일으킬 상황에 이르렀다지요?

 

이때 콜럼버스는 이렇게 선원들에게 약속했다 합니다.
"좋다! 1주일 안에 육지가 나타나지 않으면 돌아간다.

만약 육지가 보이지 않으면 내 머리를 잘라도 좋다.

그러면 여러분은 모두 고향으로 편안하게 돌아갈 수 있다."

 

1492년 10월 12일, 드디어 핀타호에 타고 있던 로드리고 데 트리아나가 소리칩니다.

"육지가 보인다!"

이 한 마디가 세계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되고 말았지요.

그가 실제로 그곳이 인도로 잘못 알았더라도 말입니다.

8월 3일 출발해 두 달 조금 더 지나 드디어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왕실 예배당 입장료는 4유로이며 같이 붙어있는 카테드랄 입장과는 별도입니다.

이곳은 왕실 전용 예배당으로 처음 이곳으로 군사를 이끌고 들어와 국토회복운동의

종지부를 찍었던 양왕의 무덤이 예배당 안에 있답니다.

왕실 예배당의 위치는 바로 카테드랄 옆에 있습니다.

 

피렌체 조각가를 불러 만든 관은 위의 사진에서 왼쪽이 서방님인 페르난도 2세와

콜럼버스의 최대 후원자였던 이사벨 1세의 관이 있고 오른쪽에는 왕 부처의 둘째 딸인

후아나와 그녀의 서방님인 펠리페가 안치되어 있답니다.

그녀는 이곳 그라나다에 묻힐 것을 유언했기에 고향보다는 이곳에 무덤을 만들었나 봅니다.

다시는 무어인에게 한 치의 땅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을까요?

제갈공명이 외롭고 외진 정군산에 무덤을 쓰라고 유언했던 것과 같은 의미일까요?

 

이사벨 여왕이 죽은 1504년 이 예배당을 짓기 시작했고 서방님인 페르난도가 1516년에

사망함으로 예배당 완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네요.

그래서 두 사람의 무덤은 다른 곳에 임시로 안치했다가 5년이 지난 후 예배당이 완공되자

1521년에 와서야 이곳에서 영원히 안식을 취하게 되었네요.

 

이들 부부를 가톨릭 부부 왕(Los REyes Catolicos)이라고 부른답니다.

당시 1396년부터 시작한 십자군 전쟁으로 신을 앞세운 심판에서도

성공하지 못한 유럽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두 부부의 힘만으로 781년간 이베리아 반도에서 버틴 이교도 이슬람을

완전히 내몰았으니 교황 입장에서는 업어주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이런 칭호를 내리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그라나다까지 탈환하고 레콩키스타 운동을 마무리한 이들은 상징적으로

이 도시에 성당을 짓기 시작해 200여 년 만에 완성하게 됩니다.

마치 바위산을 옮겨온 듯 육중하고 듬직한 성당을 짓고 그 옆에

왕실 예배당(Capilla Real de Granada)을 지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지 싶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곳에 이슬람 세력이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자신의 시신을

이곳에 묻어달라고 했습니다.

두 사람이 사용했던 옷이나 칼 등을 보관했으니 이곳은 작은 무덤 박물관인 셈입니다.

그라나다에 오면 이런 역사적인 인물이 묻힌 곳은 들러보는 것도 좋지 싶습니다.

 

이사벨 라 카톨리카 광장(Plaza Isabel La Catolica)에는 이사벨 동상이 있습니다.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과 아라곤의 왕자 페르난도의 결혼은 레콩키스타를 완성하는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두 나라는 기독교 국가 중 세력이 큰 나라였는데 두 사람의 혼인으로 기독교 세력이

이슬람 세력을 압도하는 세력으로 자리하게 되며 드디어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네요.

 

어디 그뿐인가요?

콜럼버스를 접견하고 그의 후원자가 되어 대항해 시대를 연 대단한 일을 하게 되었다네요.

후에 이들 두 사람을 가톨릭 왕 부처 또는 가톨릭 양왕이라고 불었다네요.

 

결국, 두 사람의 혼인은 대항해 시대로 말미암아 남미에 많은 식민지를 개척하며

그곳으로부터 막대한 재화를 가져오게 되어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라는 이름을 얻게 되며

해상 무역으로 통해 무적함대까지 보유하게 되어 스페인 역사상 가장 강대한 세력으로 키운

초석을 다졌다고 봐도 되겠네요.

 

그녀는 콜럼버스를 후원한 일이 미리 미래를 예견하고 했는지

콜럼버스를 흠모해 연정 때문인지 알 수 없지요.

오늘 여기에 자는 이사벨 왕을 깨워 물어보고 돌아가고 싶지만,

佳人이 스페인어를 전혀 하지 못하기에 그냥 갑니다.

 

이사벨 광장에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여자는 이사벨 1세로 카스티야 왕국의 여왕이며 남자는 콜럼버스입니다.

바로 콜럼버스의 당시로는 황당무계한 계획서를 보며 투기나 다름없는 투자를 하게 되었다죠. 

두 남녀 사이가 너무 가까운가요?

서로가 상대의 숨소리도 들릴 듯한 거리가 아닌가요?

 

이제 세상의 모든 것을 마무리하고 그녀는 이곳 왕실 예배당에 영원한 안식에 빠졌습니다.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미치도록 무어족을 이 땅에서 내몰아버리라고 했을까요?

이렇게 잠들고 나면 세상은 아무것도 남지 않잖아요.

 

두 남녀 동상 아래 파란 우산을 쓴 여자는 프리 투어를 인솔하는 가이드겠지요.

아마도 이 장소가 프리 투어 출발점인가 봅니다.

혹시 이 투어에 참석하시려면 아침 11시 전에 가시면 되겠네요.

이사벨 라 카톨리카 광장에는 콜럼버스가 이사벨 왕을 알현하는 모습을 동상으로

만들었는데 서인도제도 발견 400주년을 기념하여 1892에 세웠다고 하네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돈을 빌려준 사람은 돈을 꾸어간 사람보다 훨씬 기억력이 좋다고 합니다.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온 지 800여 년이 다 되었으면 사실 주인행세를 해도

이해할 수 있지만, 이사벨 여왕은 조상의 빚을 받기 위해 결국 여기까지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