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키스타도르 에르난 코르테스

2015. 9. 7. 08:00스페인 여행기 2014/세비야

위의 초상화가 그 유명한 콩키스타도르의 지존이라는 에르난 코르테스의 초상화입니다.

그는 위대한 정복자인가? 아니면 무자비한 살인마인가요.

오늘은 그들 중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에르난 코르테스에 대해 이야기나 해볼까 합니다.

에스트레마두라 지방의 많은 젊은이들이 무어인과의 전쟁이 끝나자 척박한 고향의 삶에

더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해 먹고 살아갈 길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게 됩니다.

 

그래서 자꾸 그런 곳을 기웃거리다가 눈에 번쩍 띈 것이 바로 황금의 땅인 엘도라도를 향해

찾아 떠나는 일이지 싶네요.

그러나 이런 사람이 외부로 진출해 벌어들인 재화로 그들이 살았던 고향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데 트루히요 같은 작은 도시는 페루를 정복한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고향으로

그와 일행으로 말미암아 마을 자체가 천지개벽했을 겁니다.

 

코르테스와 피사로 두 사람은 먼 인척 간이라고 하니 가문에 큰 인물이 두 사람이나

동시대에 태어났군요?

위의 지도에 보이는 메데인은 지금도 큰 도로에서 비켜나 버스도 자주 다니는 곳이 아닌

깡촌으로 피사로의 집이 있는 트루히요와 코르테스의 고향인 메데인 사이에는

지금도 공공버스가 다니지 않는 그런 촌 동네입니다.

 

위의 위성지도를 통해 메데인을 찾아보았으나 정말 지금도 가구 수가 많지 않은 아주 작은

시골로 그곳에 들러보고 싶었으나 워낙 작은 동네라 교통편이 쉽지 않아 그냥 지나치지만,

아쉬움에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하렵니다.

그러나 오늘 이야기는 무척 지루한 이야기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행과는 크게 관계가 없는 이야기이기에 그냥 패스하셔도 좋습니다. 

 

위의 동상은 코르테스의 동상으로 그의 고향 마을 메데인 중앙 광장 한가운데 자랑스럽게

있으며 정복자라는 말인 콩키스타도르는 스페인에서는 무척 자랑스럽게 사용하는 단어라

생각되며 더군다나 그런 인물이 태어난 동네일수록 말입니다.

 

피사로도 트루히요의 마요르 광장 한가운데 뒤질세라 서 있고요.

스페인은 포르투갈보다 좀 늦은 시기에 대서양 시대를 연 나라라고 봐야 하겠지요.

이미 포르투갈은 주앙 1세의 셋째 아들인 해상왕이라는 엔히크 왕자가 1415년 북서 아프리카의

세우타를 공략하여 첫걸음을 내딛음으로 그 후 바스쿠 다가마가 1497년 인도항로를 개척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고 봐야 하겠지요.

 

그러나 스페인은 포르투갈보다 한참 늦은 1492년 4월 콜럼버스가 이사벨 여왕의 후원을 받아

그해 8월 3일 산타 마리아호를 출항시킴으로 대서양 시대를 열었으니 포르투갈에 비해

늦게 해양대국으로 나아가게 되었다고 봐야 하겠지요.

위의 사진에 보이는 배가 바로 산타 마리아호입니다.

늦은 이유로는 그동안 국토회복을 하겠다고 국력을 전부 무슬림과의 전쟁에

투입했기 때문이겠지요.

 

당시 그들의 목적지는 지팡구(일본이라는 JAPAN의 어원이 된 지명)와

카타이(중국을 지칭하는 고대 유럽어)였다고 하네요.

그러니 남미는 당시로는 알지도 못한 지역으로 엉뚱한 곳으로 갔다는 말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헐!!! 남의 다리를 긁었다는 말이네요.

 

이렇게 잘못된 만남인 남미에 도착함으로 세상의 역사는 새로운 신천지가 나타나게 되었고

그 후 스페인의 젊은이들은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너도나도 모두 남미로

황금을 찾아 떠나게 되었다지요.

그러나 실상은 약탈자며 살인자며 문명의 파괴자라고 봐도 틀린 말은 아니지 싶네요.

 

그러나 스페인에서는 코르테스의 얼굴이 화폐로도 사용되었을 정도니 유명인사가

분명하며 얼마 전 우리가 들렸던 트루히요는 또 다른 콩키스타도르인 피사로의 고향이었지요.

에르난 코르테스는 이곳 메리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메데인(Medellin)이라는 곳에서

1485년 태어났다 합니다.

 

그는 14세 때 살라망카로 가 공부하며 그곳 살라망카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합니다.

집안은 하급 귀족인 이달고(Hidalgo) 출신이라 합니다.

이달고는 가문의 문장을 사용할 수 없고 작위가 없는 귀족으로 세금 면제 정도의 혜택을 받은

제일 하층의 귀족이라고 하네요.

이 귀족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세르반테스의 소설에 나오는 돈 키호테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지요.

 

이들은 주로 레콩키스타의 영향으로 이슬람과의 전투에 참전한 평민이나 하층 계급의 사람으로

그 공을 인정받은 경우가 대부분이라 합니다.

이슬람과의 오랜 전투로 말미암아 당시에는 전쟁에 참전해 공을 세우는 일이 이달고가 되는

가장 쉽고 빠른 길이지 싶네요.

 

카스티야 왕국은 레콩키스타를 완성한다고 무어인의 마지막 보루인 그라나다를 공략하느라

국력이 많이 소진했을 때였지요.

그러니 당시 시대 상황은 암울 그 자체가 아니겠어요?

젊은이들에게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국토뿐이고 전쟁마저 끝이 났기에 그마저도

 할 일이 거의 없었지 싶네요.

 

그런데 요즈음 이상한 소문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바다 건너 황금의 땅이 있다는 소문이 들리기 시작하자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 보이는 겁니다.

국내보다는 바다를 건너 황금을 가져오는 일이 유일한 돌파구라고 생각하게 되었지 싶네요.

그러나 먹고살 만한 다른 지역은 그냥 살아갈 수 있으니 문제가 크지 않지만,

이 지역 에스트레마두라 지방 똥구멍 찢어지게 가난했기에 가난이 싫어 주로

이 지방 젊은이들이 남미로 눈길을 돌렸을 겁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드나 봅니다.

 

그런 이유로 에스트레마두라 지방을 정복자의 땅이라는 의미인

콩키스타도르의 고향이라 부르나 봅니다.

이때 많은 청년이 고향을 떠날 때 개나 소나 모두 함께 떠나게 되었다지요?

앗!! 소는 아니고 개나 말이나 함께 떠났다네요.

 

개는 나중에 군견으로 사용함으로 남미 정벌에 대단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네요.

말이나 개를 보지 못한 남미 원주민에게는 그 또한 공포의 대상이었을 겁니다.

위의 개를 보시면 정말 성질 한번 더럽게 생기지 않았나요?

 

실제로 난폭한 개를 이용한 공격에서 원주민은 대항조차 변변하게 하지 못하고 도망하기 바빴다는

후문으로 위의 사진에서 보면 제일 위의 남자는 코르테스이고 그 뒤의 여자는 손에 묵주를 든

통역인 마리나(말린체)라는 여자입니다.

그 아래 사내는 개를 풀어 원주민 부족 족장에 위협을 가하고 그 아래 그림은 회유하는 장면으로

보이며 모든 부족을 모아놓고 이렇게 협박과 회유로 주변의 부족을 하나씩

정복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그림입니다.

 

말을 탄 스페인군의 모습은 바로 위의 사진처럼 그리스 신화 속의 나오는 반인반마(半人半馬)라는

켄타우로스(Centauros)의 모습으로 보였을 겁니다.

신화 속에나 나올 아래는 말의 모습이고 상체는 인간의 모습을 한 영어로 센토(Centaur)라고

부르는 그런 상상의 동물 말입니다.

말 탄 군인을 처음 본 멕시카 족인 아즈텍인들은 이들을 하늘에서 보낸

켄타우로스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게다가 무서운 개를 마음대로 부리니 하늘에서 내려온 그런 신의 아들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니 콩키스타도르의 목적은 오직 황금뿐이었을 겁니다.

그랬기에 탐욕의 역사가 시작되며 하루하루가 피의 역사가 쓰이기 시작했지 싶습니다.

그래요.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는 인디오의 피 위에 황금으로 쓴 역사입니다.

황금은 인류를 아름답게 만드는 게 아니라 저주였고 피를 불러온 악마의 유혹이었습니다.

세상에 황금이 없었다면 이런 세기적인 불행 또한 없었지 싶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지녔던 금을 빼앗았지만, 금이 점차 소진되자 직접 금광을 개발해 채굴을

시작했으며 그들은 원주민을 부리며 약탈로는 부족해 노예로 만들어 무자비한 노동력까지

착취하게 되었다지요?

어디 금뿐이었겠어요?

돈이 될만한 광물은 모두 거두었고 농산물까지 수탈하는 비인간적인 착취를 했지 싶네요.

 

과거 그들이 살았던 이베리아 반도에 로마가 지배할 때 은의 길을 따라 로마가 수탈했던 역사를

조상 대대로 겪었기에 학습효과로 그런 착취에 자연스럽게 실행했지 싶네요.

어디 로마뿐이겠어요?

그 이전에 카르타고가 있었고 로마 다음에는 서고트족과 이슬람인 무어인에게도 당했잖아요.

원래 나쁜 짓은 욕하면서 배운다 하잖아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사치한 사람은 아무리 부유해도 모자라거늘,

어찌 검소한 사람의 가난하면서도 여유 있음만 할 수 있겠는가?

- 채근담-

엘도라도를 찾아 떠난 사람 대부분은 만족을 몰랐나 봅니다.

결국, 탐욕의 끝은 사망에 이르게 했지요.

피사로는 그렇게 함께 생사고락을 했던 가장 가까웠던 동료를 죽였고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다시 피사로를 죽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