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달루시아 지방의 세비야로 갑니다.

2015. 9. 10. 08:00스페인 여행기 2014/세비야

스페인을 여행하다 보니 도로 옆으로 위의 사진처럼 소의 모습을 만든 조형물을 자주 볼 수

있는데 크기도 엄청나게 크게 만들어 멀리서도 금방 알아볼 수 있지요.

공업보다는 농업이 주요 산업이라 소의 소중함을 알아 저런 조형물을 만들었을까요?

처음에는 어느 회사의 공고판이었다가 지금은 그냥 소만 남겨놓았다 하네요.

워낙 소와 관련이 깊은 스페인이기에 나라의 상징 동물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메리다의 모든 일정을 끝내고 푸엔테 루시타니아라는 다리를 건너 버스 터미널로 향합니다.

마지막 들렀던 무어인의 집단 주거터에서 다리만 건너면 되기 때문에 멀지 않습니다.

 

메리다는 정말 유적의 백화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유적을 좋아하시는 분에게는 적극적으로 추천할만한 여행지네요.

로마가 아닌 곳에서 이렇게 다양하고 온전한 로마 유적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여기가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벤허라는 영화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전차 경기장,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로마 극장,

두 개나 있는 로마 수도교, 글래디에이터라는 영화에서 보았던 검투사들의 땀 냄새가 흥건한

원형 경기장, 공중목욕탕, 집단 주거터, 로마 다리, 어느 부자의 저택, 그리고 죽은 자를

장사 지내고 묻은 공동묘지, 황제의 기념문 그리고 디아나 신전 등. 정말 다양한 유적이

남아있는 곳이 바로 메리다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로마의 지배 기간이 500여 년이나 되다 보니 자연히 그런 유적이 많이 남지 않았을까요?

2차 포에니 전쟁의 승리로 로마는 이베리아 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전까지 이 지역의 맹주였던 카르타고는 이렇게 새로운 세력에 자리를 물려주고 떠났나 봅니다.

 

500년이라면 정말 긴 시간이 아닌가요?

그러나 로마는 이곳을 식민지로 생각하지 않았나 봅니다.

로마 제국의 일부분이라 생각했지 싶네요.

 

그랬기에 트리야누스와 테오도시우스 1세 등이 이곳 출신의 로마 황제가 되었지 싶습니다.

이 지역 지배계급도 로마 전체로 볼 때 같은 귀족계급으로 대우받았다 하네요.

 

메리다는 마드리드나 세비야에서 접근이 쉽습니다.

기차로는 마드리드 아토차 역에서 하루 4-5편의 기차가 운행하며 4시간 20분-7시간이 걸립니다.

버스는 하루 8-9편이 운행되며 4시간이 조금 더 걸린답니다.

기차보다는 버스를 이용하는 게 더 빠르고 접근이 쉽습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세비야에서 접근하는 방법이지 싶습니다.

버스로 3시간 정도 걸립니다.

위의 사진은 세비야에서 출발해 메리다로 가는 버스 시각표입니다.

 

이번에는 메리다 출발 세비야행 버스 시각표입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은 버스 운행 편이 줄어드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버스는 중간 도시마다 모두 들렀다 가는 완행입니다.

메리다와 세비야 사이를 운행하는 버스 시간표를 첨부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세비야를 들렀을 때 시간이 하루 정도 여유가 있으시다면 여기 메리다를 들러보시기 바랍니다.

 

어제 도착할 때 미리 버스 시각표를 얻었기에 오후 3시 30분 차를 타려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 유명한 은의 길을 따라 세비야로 향합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세비야를 향해 가며 작은 마을마다 들렀다 갑니다.

버스는 기사가 직접 버스표를 발권하도록 기계장치를 했습니다.

버스 터미널이 오후 낮잠을 자는 시간에는 문을 닫기 때문에 버스 기사가 직접 발권하기 때문이겠죠.

 

작은 마을은 마을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도로에 있는 작은 간이정류장에 섰다 가네요.

시외버스라기보다 마을버스인가 봅니다.

 

위의 사진이 도롯가에 있는 간이 정류장입니다.

 

그러다가 사프라라는 제법 큰 도시 안으로 들어갑니다.

사프라는 길가에 서지 않고 버스 터미널 안까지 들어가네요.

 

잠시 승객을 내리고 태운 후 다시 세비야로 가겠지 하고 기다리는데

운전기사가 우리 부부에게 뭐라고 합니다.

 

말은 정확히 알아듣지 못해도 내리라는 뜻이네요.

주변을 둘러보니 버스 안에 있던 승객은 모두 내리고 우리 부부만 남았네요.

 

그러면서 티켓 한 장을 손에 쥐여주며 내리라 합니다.

우리가 샀던 표는 분명히 먼저 올린 사진에 보듯이 오후인 15시 22분 출발한 버스였는데

이 표는 새벽 7시 55분이고 버스 요금도 13,50유로였는데 11.50유로로 다릅니다.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어요.

모로 가든 세비야로만 가면 되지요.

 

버스를 바꿔 타라는 말인가 봅니다.

메리다와 세비야는 제법 큰 도시인데 왜 바로 운행하지 않고

중간 도시인 사프라에서 바꿔 타라고 하지요?

버스가 달리는 도중 주변 마을을 보니 하얀색을 칠한 안달루시아 지방의 전통마을이 나타납니다.

 

이 길은 역사가 무척 오래된 길이라 합니다.

스페인에 많은 까미노 중 세비야에서 출발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은의 길도

아주 유명한 까미노라고 하더군요.

이미 기원전에 이 길을 닦았다 하니...

그러나 버스를 타고 달리는 내내 차가 별로 보이지 않는 아주 한가한 도로입니다.

 

도로 옆에 만든 소의 조형물을 보니 문득 엉뚱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힌두교에서는 시바 신이 타고 다니는 자가용이 소라고 하여

사원마다 만들어 놓은 것을 볼 수 있지만...

세계 제2의 관광대국이라고 해 관광객에게 무료함을 달래려고 그랬을까요.

 

스페인은 소를 무척 사랑하는 민족인가 봅니다.

소는 스페인에서 무척 중요한 놀이라죠?

투우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를 사랑하며 사랑하는 방법이 소를 지치게 하고 난 후

예리한 칼로 찌르며 즐거워할까요?

소를 사랑하는 방법도 특이한 방법으로 사랑하나 봅니다.

 

우리가 스페인에 대해 제일 처음 공부했던 게 바로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가 아닐까요?

그곳에 그린 소의 모습 말입니다.

그때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외웠습니다.

개인적으로 알타미라 동굴의 소 그림은 기억나지만, 그게 스페인이었는지는 기억에 없습니다.

 

혹시 그런 정신을 이어받자고 소의 모습을 만든 것은 아니겠죠?

좌우지간 스페인은 소와 무척 인연이 많은 나라임이 분명합니다.

스페인의 역사는 우리에게는 소 그림으로부터 공부했으니까요.

그런데 그토록 많은 스포츠 중에 유난히 스페인에서는 잔인한 투우가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일까요?

물론, 축구도 환장하는 나라이지만...

 

처음 이베리아 반도에 지금처럼 칼로 소를 찌르는 투우를 들여온 것은 이슬람의 무어족이라

하며 물론 그 이전에 군사훈련이나 검투사의 훈련을 위해 소를 이용했겠지만,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스포츠답게 소를 죽인 것은 무어족이 이베리아 반도에 들여왔다 합니다.

정말 뜻밖의 이야기가 아닌가요?

 

무어족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물러가자 스페인의 귀족을 중심으로 투우를 즐기기 시작하며

점차 일반인으로 확대되었다 하더군요.

그 후 론다라는 작은 마을의 투우사 프란시스코 로메로에 의해 현대 투우가 정립되었다 합니다.

그전까지는 지금의 투우가 아니었다 하네요.

 

그렇다면 이들이 투우에 몰입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무어인과의 780여 년간 국토회복운동인

레콩키스타를 하며 피를 흘리다가 1492년 마지막으로 그라나다에 있던 무어인이 물러가자

더는 피를 볼 일이 없어 소의 피를 보게 되었을까요?

 

무어인과 싸웠던 기간인 780년이라는 세월이 짧은 세월은 아니잖아요?

스페인 사람들은 대를 이어 피를 흘리며 싸우다가 전쟁이 끝나자 그동안 피 냄새를 맡아야

편히 잠자리에 들 수 있었고 적의 가슴을 향해 칼을 찔러야 찌뿌득한 몸이 개운해지고 붉은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아야 비로소 하루가 보람차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래서 사람보다 소를 택해 소의 진을 뺀 후 칼로 소의 급소를 노려 찌르는 모습에서

대리만족을 느꼈을지 모릅니다.

물론 佳人의 혼자 생각입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오늘 에스트레마두라 지방을 떠나며 또 佳人의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습니다.

1492년은 스페인에서는 아주 중요한 해입니다.

그라나다에서 마지막까지 버티던 무어인의 항복을 접수하고 780여 년간 이어온 레콩키스타 운동이

대미를 장식했던 해였고 콜럼버스가 인도를 찾겠다고 하다가 엉뚱한 남미 신대륙을 발견한 해입니다.

 

전쟁이 끝나자 너무 심심해하던 스페인의 젊은이들은 앞다투어 신대륙으로 향합니다.

그동안 전쟁을 하며 단련하고 만들어왔던 몸이니 근질거리지 않았겠어요?

목적은 오직 하나...

황금을 찾겠다고요.

돈도 벌고 몸도 풀고...

이때 제일 적극적으로 앞장선 젊은이들이 바로 에스트레마두라 지방의 젊은이들이랍니다.

그래서 이 지방을 정복자의 고향이라고 콩키스타도르의 고향이라고 부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