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 박물관(Casa Museo de Pizarro)

2015. 7. 24. 08:00스페인 여행기 2014/트루히요

위의 사진은 피사로 박물관 안에 있는 그림을 찍은 사진입니다.

처음 이 그림을 대하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어디서 많이 보았던 그림이 아닌가 해서요.

사실 佳人의 예술성은 제로에 가깝다고 하지만, 그동안 얻어본 풍월은 있지 않겠어요?

얼핏 바라보니 우리나라 화가였던 천경자 님의 화풍으로 보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보셨어요?

 

트루히요에는 피사로 박물관이 있습니다.

위에 보이는 사진 속의 건물로 다른 콩키스타도르의 집처럼 화려하지도 크지도 않습니다.

입구는 사진에 보이는 사람이 있는 뒤편의 작은 쪽문처럼 생긴 문으로 처음에는 입구를 지나쳐

한참을 걸어가다가 나중에 다시 돌아와 겨우 찾았습니다.

 

그의 할아버지가 살았던 집을 고쳐 지금 박물관으로 이용하고 있답니다.

골목 입구에 위의 사진에 보이는 작은 간판 하나만 있는 곳이라 지나쳤나 봅니다.

오늘은 그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을 보며 피사로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는 사실, 출생 자체가 그리 자랑할만하지 못한 천한 출신이었다네요.

자세한 출생에 관한 이야기는 남아있지 않지만, 프란시스코 피사로(Pizarro, Francisco)는

스페인 군인의 사생아였다고 합니다.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해 이곳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불우한 소년기를 보냈다네요.

 

당시 이 지방에서는 돼지 기르는 일 외에는 별로 할 일이 없었던 퍽퍽한 삶을 살았다네요.

농산물을 재배할 수 없는 지역이라 삶에 대단한 생존력을 지닌 돼지 외에는 가축도 기르기 어려운 지역이라 하네요.

이런 어린 시절을 보낸 피사로는 "그래! 결심했어~"라고 소리치고 앞뒤 가리지 않고

원정대를 따라 남미로 행했다 합니다.

당시 에스트레마두라의 젊은이들은 이런 원정대를 따라가는 게 삶의 유일한 돌파구였을 겁니다.

 

피사로는 점차 남미에서 인정받기 시작하며 작은 부대를 이끄는 원정대의 대장으로 참가하며

그의 지위가 점차 올랐다고 하네요.

바야흐로 파나마의 시장직을 맡으며 드디어 변두리 출신으로 중앙무대에 얼굴을 내밀었다 합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그림이 바로 바스코 누네스 데 발보아가 태평양을 발견했던 그 순간을 그린 그림이지 싶네요.

그는 우리가 며칠 전 지나온 바다호스 출신의 콩키스타도르라고 했지요.

 

이 시기에 태평양을 발견했던 발보아와 함께 원정대에 참가해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태평양을 발견하기도 했지요.

위의 자료는 당시에 태평양을 발견했던 해변과 이야기지 싶습니다.

 

개천에서 용 났다고요?

여기서는 에스트레마두라에서 용 났다고 할 겁니다.

나중에 적이 된 알마그로와 함께 원정대를 조직한 피사로는 해안을 따라가다가 적은 병력이 불안해

알마그로를 파나마로 보내 병력 증원을 요청하자 새로 온 파나마 총독은 인명피해를 줄이자고

더는 진격하지 말고 포기를 명령했답니다.

 

그러나 그는 야망이 많은 사람이라 포기할 수 없어 함께 했던 일행에게 땅바닥에 칼로 금을 긋고

부와 명예를 바라는 사람은 이리로 건너오라고 했다지요?

바로 내 편과 적을 선 하나로 구분짓자는 말이 아닌가요?

이때 그 선을 건너온 사람이 모두 열셋으로 이를 "유명한 13인"이라고 후세 사람을 부르지요.

황금을 위한 일이라면 상부의 명령은 무시해도 되었던 시기의 사람이었나 봅니다.

피사로뿐이겠어요?

에르난 코르테스도 상부의 명령은 개나 주라고 했지요.

 

이들은 결국, 파나마 총독의 지시를 무시한 채 계속 탐험을 한 결과 잉카제국에 관한 내용을 파악하게 되었다네요.

잉카 제국에는 금이 가득하다는 소문이 피사로의 귀에 들어갔고,

그는 돈과 명예를 한꺼번에 차지할 기회를 잡고자 했지 싶네요.

그때 그 지역을 페루라고 이름짓기도 했답니다.

페루라는 이름뿐이 아니라 페루의 수도인 리마를 세운 사람이 바로 피사로이지요.

 

첫 번째 원정은 나쁜 기후, 식량 부족, 호전적인 원주민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고 파나마 총독이 2차 원정을

반대하자, 이곳에서는 새로운 원정대를 만들 수 없어 피사로는 스페인 국왕을 알현해 허가를 받기로 하고 1528년

배를 타고 세비야로 돌아오는데 때마침 그곳에 있던 멕시코의 정복자인 에르난 코르테스를 만나게 됩니다.

 

두 사람은 동향 출신에다가 먼 친척 간으로 코르테스의 지원으로 쉽게 황제를 알현하고

쉽게 허가도 받고 훈장에 갑옷까지 받는 겹경사가 생깁니다.

코르테스는 이미 멕시코 정복으로 그 땅을 스페인 황제의 영토로 만들었기에 그의 말 한마디가

황제의 허가를 받는데 대단한 효과가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다시 남미로 복귀한 피사로는 거칠 게 없습니다.

왜 아니겠어요?

황제가 뒤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걸요.

13인과 함께 다시 탐험에 나서 파나마 이남의 많은 영토를 스페인령으로 만들고 그곳의 지배자가 되기 시작합니다.

물론, 13인에게도 그에 걸맞은 영토와 직위를 주었겠지요.

그러나 동료였던 알마그로는 피사로보다는 낮은 지위를 부여받았다네요.

 

1531년 드디어 페루 원정대가 결성되었지요.

피사로는 형제 4명과 180명의 병사와 말 37마리 그리고 1문의 대포를 싣고 잉카 제국을 향해 닷을 올립니다.

당시 잉카 제국의 황제 아타우알파(Atahuallpa)는 10만 명의 군대를 거느린 대단한 세력을 가졌다고 하네요.

그러나 많은 병사가 전투에 승리하는 것은 아니지요.

가방 크다고 공부 잘했다면 누구나 잘할 수 있잖아요.

 

드디어 카마하르카 광장에서 아우타알파를 만나 스페인 국왕을 군주로 모실 것과 기독교로 개종을 권하자

아우타알파는 자기 세력의 우세를 믿고 성경을 땅바닥에 던지는 것으로 파탄 나기 시작합니다.

그가 팽게친 것은 성경책에 불과한 것이지만, 자신의 목숨도 함께 땅바닥에 던져버린 셈이지요.

성경이 땅바닥에 떨어지기를 기다린 듯 이윽고 그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스페인 원정대의 총구에서 불을 뿜기

시작했고 대포가 불을 뿜으며 잉카 제국의 병사는 놀라움과 겁에 질려 모두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네요.

 

결국, 그 자리에서 잉카 황제 아우타알파는 피사로의 포로가 되고 살려주면 그가 감금된 방을 금으로 가득

채우겠다는 약속을 했고 그대로 이행했지만, 1533년 8월 29일 교수형에 처하며

잉카 제국의 멸망이 눈앞에 다가오게 되었다지요.

죽이려면 그냥 죽이지 왜 황금으로 방을 채운 후 죽였을까요?

그렇게 많은 병사를 거느린 잉카 제국은 겨우 180여 명의 스페인군에 왜 그리 맥없이 무너졌을까요?

세상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 무척 많이 일어나지요.

 

당시 잉카 왕이 감금되었던 그 방은 가로 6.7미터, 세로 5.2미터, 높이 2.4미터였다고 알려졌지요.

이곳에 모인 금이 5톤이 넘었다는데 이는 당시 유럽에서 전체에서 생산한 양보다 많았다고 합니다.

 

황제마저 잃어버린 잉카 제국의 병사는 더는 싸울 용기가 나지 않았을 겁니다.

처음 본 말을 탄 병사는 하늘에서 내려온 신군처럼 생각되어 마치 그리스 신화 속의 켄타로우스처럼 생각되었고

처음 듣는 대포 소리는 하늘의 노여움이라 생각했기에 광장에 운집했던 3만 명의 병사는 겨우 180여 명의

스페인군에게 그들의 수도 쿠스코를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내어주게 되었답니다.

 

이때 유럽에서 전파된 천연두마저 창궐하니... 신의 뜻이라고 생각할 수밖에요.

게다가 스페인군은 본국에서 데려온 맹견이 있어 개를 처음 본 원주민은 공포의 대상이었을 겁니다.

이로써 남미 문명의 한 축이었던 잉카문명은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겠지요.

 

이런 인상조차 더러운 개를 끌고 왔으니...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금과 보석을 강제로 수탈했고 그마저 떨어지니 이번에는 금광을 개발해 잉카 제국의 주민을

노예로 부리기 시작합니다.

이때 잉카 제국의 인구가 힘든 노역으로 반으로 줄었다고 하니...

 

그들은 안데스 산맥의 눈이 모두 황금으로 변해도 만족하지 않을 것 같았다고 하지요.

스페인 정복자들은 스스로 "황금 없으면 살 수 없는 병에 걸렸다"고 웃으며 농담을 했을 정도라 하니...

금광의 살인적인 강제노역에 동원된 인디오들이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악랄한 스페인 감독관을 죽여서 입을 벌리게 한 뒤 펄펄 끓은 황금을 부어 넣어 한풀이도 했다고 하니

당시에 그들이 보았던 스페인 사람의 금에 대한 집착과 원망을 알 수 있지 않겠어요?

 

이때 스페인으로 들어온 금의 20%는 국왕에게 바쳐졌고 나머지는 성당에 보내졌다고 하니

그런 금이 성당을 장식한다는 일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일이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까?

지금 세비야 대성당의 항금의 대제단은 바로 그때 가져온 금으로 장식했답니다.

 

하지만 손에 들어온 막대한 금을 두고 원정대 사이에 내분이 일기 시작했고 이는 불행을 초래하지요.

황금에 눈이 멀면 또 다른 재앙이 생기지요.

피사로에게는 황금이 그를 만들었고 황금이 그를 파멸의 길로 이끌게 됩니다.

 

정복자라는 콩키스타도르...

그러나 이 말은 주로 15세기 이후 대항해시대를 맞아 남미 정복에 나섰던 스페인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네요.

수많은 스페인의 정복자들이 아메리카 대륙 침략에 나섰지만, 가장 유명한 사람이 두 사람 있다지요?

 

그 하나가 에르난 코르테스로 멕시코의 아스테카 문명을 말살한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오늘 우리가 찾아온 트루히요가 고향인 프란시스코 피사로라는 사람이라고 하네요.

코르테스는 예전 스페인 화폐의 인물로도 사용될 정도로 자랑이었나 봅니다.

 

물론, 그밖에 엄청난 이 지방 젊은이들이 황금에 눈이 멀어 신대륙으로 밀려들어 갔다네요.

남미 대륙을 횡단해 태평양을 발견한 발보아라는 사내도 있었고 

그러다 보니 지금 남미에는 이들의 고향 이름이 그대로 그곳 지명으로 사용하고 있잖아요.

 

지금 우리가 중점적으로 돌아보는 카세레스, 트루히요, 메데인 그리고 메리다까지 스페인 에스트레마두라 지방의

도시 이름이 남미에 그대로 지명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슬픈 현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슬퍼하지 않는가 봅니다.

 

만약, 우리나라에 일본 지명이 그대로 사용된다고 한다면 우리 국민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 아닐까요?

남미 사람은 속도 좋습니다.

이름뿐이겠어요?

우리로 보면 창씨개명까지 한 것 아닌가요?

그들의 자취도 역사라고 해 남아있고 심지어는 동상도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왜 그럴까요?

멕시코의 아스테카 왕국, 그리고 페루의 잉카 제국은 그들만의 아름다운 문화와 유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곳 출신 촌놈들이 밀어닥쳐 무자비한 살육으로 말미암아 그 문화는 종지부를 찍고 말았지요.

 

이들이 그곳으로 떠날 때 스페인 왕이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그들에게 수탈과 살육을 허용하고

그 대신 수탈한 재화의 일정 비율로 나누기로 합의하고 출항 비를 지원했다지요?

재물에 눈이 어두워 참 나쁜 짓을 한 것 아닌가요?

교황마저 그런 사람에게 성호를 긋는 일은 또 누구의 안전을 위한 일이었을까요?

 

그러나 나중에 정복자라고 불린 콩키스타도르는 많은 재화를 약탈했기에 스스로 경비를 마련하고 떠나게 되며

그들 내부 스스로 반목과 속임수가 생기게 되었다네요.

약탈범끼리 자중지란이 일어났던 겁니다.

처음은 인간이 황금을 취했지만, 나중에는 황금이 인간의 생명마저 취해버렸잖아요.

 

인간 탐욕의 끝은 어디일까요?

결국, 우리가 오늘 찾아온 트루히요의 영웅이라는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동료이자 경쟁자였던 알마그로를 처형했지만,

알마그로를 따랐던 추종자에 의해 피사로가 세웠던 도시 리마에서 저녁을 먹다가 살해당하는 불행을 겪었답니다.

 

마지막 입에 머금었던 포도주도 삼키지 못한 채 말입니다.

백 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은 천 년을 꿈꾸며 살다가 허망하게 죽었습니다.

결국, 인간은 마지막 들이마신 숨조차 내뱉지 못하고 가는 불쌍한 존재인데 얼마나 더 움켜쥐어야 만족하렵니까?

지금 위의 사진에 보이는 그림이 바로 저녁 식탁에서 갑자기 들이닥친 알마그로 사내들의 칼에

목을 찔려 죽는 모습입니다.

저녁이나 다 먹고 난 후 죽이지...

이렇게 자신이 세운 리마에서 숨을 거둔 피사로는 고향땅을 밟지 못한 체 리마의 대성당에 묻혔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피사로는 들이마신 마지막 포도주도 채 삼키지 못하고 죽어가며 자신이 흘린 피로 십자가를 바닥에 그리며

그곳에 입맞춤하고 예수를 부르며 그렇게 눈을 감았다지요?

이렇게 피사로는 마지막으로 고향 땅에 돌아오지도 못하고 객사하고 말았답니다.

백 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이 천 년을 꿈꾸며 살다 객사라니요?

 

죽기 전 그동안 여러 번 고향을 들락거리며 많은 재물을 가져왔기에 이곳 트루히요는 돈벼락을 맞기는 했지만...

그가 실어나른 금은보화로 그의 친척만 살판났겠지요.

16세기 스페인의 번영은 라틴아메리카 인디오의 피 위에 쓴 역사였다고 할 수 있지요.

황금이란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습니다.

차라리 남미에 황금이 전혀 없는 곳이었다면 역사는 또 어찌 되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