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콩키스타도르 피사로이신가요?

2015. 7. 23. 08:00스페인 여행기 2014/트루히요

위의 사진은 트루히요의 마요르 광장 서쪽 끝에 서서 광장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입니다.

트루히요 관광은 여기 마요르 광장에서 시작해 한 바퀴 돌아 마요르 광장으로 오면 끝이 납니다.

사진 저 끝에 보이는 천막이 카페이기에 저곳에서 광장을 바라보며 아침을 먹고 출발해 한 바퀴 돌아

다시 저 카페에 들려 점심을 먹으면 트루히요 관광이 모두 끝이 나는 딱 반나절 코스입니다.

 

이 광장 한가운데 우뚝 솟은 동상 하나가 바로 이 도시를 빛낸 인물 프란시스코 피사로입니다.

피사로는 여러 번 남미를 들락거리며 황금을 챙겨 고향 마을인 이곳에 풀었다 합니다.

고향을 빛낸 인물이라고 여기다 동상을 세웠나 봅니다.

 

어디 피사로 한 사람뿐이겠어요?

피사로 앞집에 살았던 덜수도 따라갔을 것이고 뒷집에 순돌이도 따라나서 제법 짭짤하게 챙겨와

이곳에다 화려한 저택을 올렸을 겁니다.

 

어디 저택뿐이겠습니까?

남미에서 지은 죄가 하도 커 그 죄를 씻기 위해 위의 사진에 보이는 지금의 성당도 지었을 겁니다.

사람을 죽이고 약탈하며 나쁜 짓의 종결자가 성당을 짓고 지은 죄에 용서를 구한다면

과연 하나님은 어떤 생각이 들까요?

모든 죄를 용서하여야 할까요?

세비야 성당의 황금 제단도 이때 남미에서 가져온 금으로 만들었다고 하지요.

 

나쁜 사람도 회개하고 죄를 고백하면 모두 깨끗한 사람이 될까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세상에 나쁜 사람은 아무도 없지 싶네요.

위의 성당은 산 마르틴(Iglesia de San Martín) 성당입니다.

마요르 광장에 있으며 바로 피사로 동상 뒤에 세운 성당입니다.

 

성당 꼭대기에는 황새가 알을 낳고 살아갑니다.

에스트레마두라는 황새가 살아가기 좋은 곳이지 사람이 살아가기는 그리 좋은 곳은 아니었나 봅니다.

이 지방 여기저기를 다니다 보면 정말 많은 황새를 보게 됩니다.

 

지금 이 광장을 중심으로 생긴 모든 건물은 그 당시 그들이 가져온 황금으로 지어진 건물이지 싶습니다.

바로 이 작은 마을에서는 천지개벽에 경천동지 할 일들이 중세에는 벌어진 겁니다.

이들이 살았던 시기가 지나고 나니 이곳은 또 예전처럼 아무것도 없는 고요함만 남은 마을이 되었지요.

지금은 그때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더는 변하지 않고 흉물스럽게 변해가는 중인가요?

 

그래도 아직 그때의 화려한 모습이 조금은 남아있어 그때의 영화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흉물스럽게 변해가는 게 아니라 유적으로 익어가는 중이군요.

원래 촌놈이 돈을 벌면 이렇게 호사도 부리고 싶지 않겠어요?

사흘에 피죽 한 그릇 겨우 얻어먹다 보니 늘 변을 볼 때 힘들어 우리말에도

똥구멍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이 있잖아요?

얘네들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었지 싶네요.

 

오호라!

지금도 아직 이리 화려한데 처음 건축했을 당시는 얼마나 화려했던 건물이었겠어요?

이들이 지금 건물 벽에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지금도 그때의 화려함이 느껴지지 않나요?

그런 어려운 시기에 고생하며 지내다 보니 남미로 모두 나가 큰돈을 벌어와 이렇게 호사롭게 건물을

경쟁적으로 지었지 싶네요.

트루히요란 도시는 은의 길에서도 빗겨 나 있는 곳으로 남미로 나가 돈은 벌기 전에는

정말 힘들게 살았던 지역이었습니다.

 

이 집은 Palacio de los Marqueses de la Conquista라는 긴 이름을 가진 저택입니다.

바로 피사로와 같은 집안 출신으로 정복자 마르케스의 저택이라고 해야 할까요?

16세기 플라테레스크 양식으로 지은 저택이지요.

이런 세세한 양식인 플라테레스크 양식은 은세공 양식이라고 해 이미 우리는 살라망카에서

구경하며 감탄하지 않았나요?

이 저택을 이 동네 사람은 그냥 콩키스타도르의 저택이라고도 부른다네요.

 

워낙 많은 황금을 가져왔기에 그들은 건물 벽까지 화려한 예술작품으로 만들었습니다.

왜?

황금으로 조각하면 미쳤다고 할 테니까요.

더는 사치스러운 건물이 없다고 외치고 싶었을 겁니다.

이런 게 모두 남미의 눈물과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겠어요?

그들의 저택은 쿠스코의 눈물이고 콘도르의 한숨이지 싶네요.

 

이 정복자의 집은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동생 에르난도가 지은 것으로 이곳에서는 정복자의 궁전이라 부릅니다.

지금 시가로 300만 유로, 약 40억 원 상당의 이 건물은 지금 그의 후손 알폰스 데 에라스티의 소유라고 하더군요.

잉카 제국을 정복한 뒤 피사로는 후작 칭호 받았다고 하니 촌놈이 출세해도 이렇게 할 수 있었네요.

그전까지는 신분상승의 방법이 이사벨 여왕을 따라 레콩키스타에 참전해 무공을 인정받는 방법 외에는 없었다가

그것마저도 끝이 나니 한번 촌놈은 영원한 촌놈으로 살아야 했잖아요.

 

이곳 출신 정복자는 페루를 점령한 후 그곳에도 트루히요라는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역사만 이긴 자의 기록인가요?

지명도 정복자의 기록인걸요.

어디 그곳뿐이겠어요?

지도 검색에 이름만 입력하면 여기 오리지널보다 남미의 더 많은 트루히요가 있는 걸요.

 

마르케스 집 뒤에 보이는 건물이 오레야나 피사로의 저택(Palacio de Orellana-Pizarro)입니다.

이 집도 피사로 가문의 한 사람으로 당시 개나 소나 모두 남미로 데려갈 때 오레야나 피사로도 따라갔다네요.

아!

소는 아닐 겁니다.

개나 말을 데려갔다 합니다.

 

그는 아마존 강을 발견한 인물이라는데 사실은 에콰도르에서 금을 찾아 헤매다가 우연히 아마존 강을 발견했다네요.

이렇게 트루히요에 살았던 피사로 가문의 영광이 아니겠어요?

이 사람 아들에게 "니 아버지 뭐하시니?"라고 물어보면 약탈자가 아니라 콩키스타도르였고 아마존 강을

세상에서 제일 먼저 발견한 역사에 남을 위대한 탐험가라고 당당히 말할 겁니다.

 

위의 지도는 1541년부터 1542년까지 그가 탐험했던 루트입니다.

그런 그의 업적을 기린다고 흉상을 만들어 트루히요 골목에 모셔놓았습니다.

 

재미있는 일은 에콰도르에 가면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동상 및 흉상까지 여러 개 만들어놓았다네요.

어디 동상뿐이겠어요?

도시의 지명 또한 정복자가 떠난 고향의 지명을 아직도 그대로 사용하는 걸요.

만약, 우리나라에 이토우 히로부미의 고향 지명이 사용되었다면 어떻겠어요?

 

그러니 지금 남미는 그들 고유의 종교도 사라지고, 문화도 송두리째 말살당하고 말과 글은 물론 성이나 이름조차

깡그리 스페인의 이름을 사용하는 걸요.

이게 바로 창씨개명이 아닌가요?

스스로 했기에 상관없을까요?

아니면 세상을 달관했기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을까요.

아! 그대가 정녕 콩키스타도르인가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남미 사람들은 우리와는 생각이 다른 사람인가 봅니다.

수탈당하고 파괴당한 일도 억울한데 그런 사람의 동상을 세우고 마을 이름까지 정복자 고향의 지명을 사용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콩키스타도르라는 사람들에게 살해당했습니까?

얼마나 많은 재물을 약탈당했습니까?

그들의 아름다운 문화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그런 일로 말미암아 마추픽추에 관한 자료조차 사라지고 그들 후손 자신도

그런 위대한 유적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수백 년을 지나지 않았나요?

속도 좋은 사람들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