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즈넉한 알카사바 성벽 길 따라 걷기

2015. 7. 6. 08:00스페인 여행기 2014/바다호스

오늘은 성벽 위를 걸어가며 여행기를 시작합니다.

중국이라면 당연히 성벽 위로 올라가려면 입장권을 사야 올라갈 수 있지만,

여기는 무료이며 이번 여행을 하며 느낀 것 중 하나가 많은 유적지가 무료고 입장료 또한

중국과 비교하면 저렴하다고 생각됩니다.

이른 아침이라 사람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아 우리 부부 둘이서

알카사바 전체를 전세를 내어서 구경합니다.

 

바다호스는 신기하게도 이 근처 지방에서 유일하게 로마의 지배지역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다만 이곳에서 60여 km 떨어진 메리다라는 곳이 워낙 로마의 큰 도시였기에

그곳의 영향력 아래 있었을 겁니다.

어제 지나온 에보라에도 로마 유적이 있었고 바다호스 반대편인 메리다에도 로마 유적이 많이

남아있었는데 왜 로마는 이곳을 포기했을까요?

 

로마의 지관이 지세가 나쁘다 했을까요?

혹시 터가 세다고 그랬을까요?

정말 바다호스 주변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말이 맞는 듯합니다.

 

이 근처에서 유일한 로마 제외지역으로 처음 이곳에 들어온 지배계층은 로마의 멸망에

지대한 기여를 했던 게르만 민족의 한 부류인 비시고트족이라고 불린 서고트 족이

처음으로 이곳에 성을 쌓았다고 합니다.

이들은 주축세력은 지금의 톨레도에 도읍을 정하고 부족 국가 형태로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다스렸다네요.

 

당시에 이베리아 반도는 무주공산이었나 봅니다.

로마가 물러나니 이번에는 서고트 족이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합니다.

위의 지도를 참고하시면 지금의 프랑스 일부와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서고트 족이 장악했습니다.

 

그러나 서고트도 711년 바다를 건너 슬금슬금 넘어오기 시작한 이슬람 무어족에 의해

조용히 사라지며 이번에는 무어족이 안방을 차지하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주인행세에

들어갔으며 이곳에 들어온 무어인은 이때 물러난 서고트족의 시타델을 접수하고

이곳에 알카사바를 크고 더 튼튼하게 세워 지금에 이르렀다고 하네요.

 

그 후 원래 이 지역에 살았던 기독교 세력이 레콩키스타 운동을 하며

이곳은 서로 밀고 밀리는 전쟁터로 많은 전투가 벌어지며

이 지방은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합니다.

 

이제 무어족이 이 지역을 포기하고 물러나자 후에는 포르투갈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겠다고 독립전쟁이 일어나며 또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답니다.

 

지금까지는 이민족이었으나 이제부터는 서로 함께 힘을 합쳐

이민족을 몰아낸 이웃끼리의 전쟁입니다.

정말 징그럽게도 많은 전쟁이 벌어진 전쟁터가 여기가 아닌가 생각되네요.

 

이 전쟁의 발단은 스페인 펠리페 2세 때 포르투갈의 왕 세바스티앙이 죽으며

다음 왕위 계승자를 두지 않았나 봅니다.

그래서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의 왕위 계승을 주장했다네요.

 

유럽이라는 나라는 뭐 사실 서로간에 먼 친척 간이니 누가 통치하든

크게 문젯거리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포르투갈 국왕인 세바스티앙은 펠리페 2세의 조카였으니까요.

 

펠리페 2세는 스페인의 가장 번성기를 이끈 왕이었을 겁니다.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의 함대를 격멸하고 무적함대를 만들었지만, 칼레 해전에서

영국에 패함으로 많은 군사비의 지출로 나라가 어려움에 처한 영욕의 국왕이었다네요.

하나의 태양이 떠올랐다가 서산으로 넘어가면 또 다른 태양이 뜨기 마련이지요.

 

그 후 펠리페가 죽으며 다시 포르투갈은 독립을 원했고 펠리페 2세의 아들들은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이 이 지역은 서로 혼란에 휩싸이며 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합니다.

이렇게 수없이 벌어졌던 전투로 단련된 이곳의 젊은이들이 바로 남미 정복에 앞장선 이유가

바로 그런 이유였나 봅니다.

 

이 기간인 7-80년간이나 지속하였다고 하니 죽어나는 것은 민초뿐이 아닌가요?

그런 혼란을 겪으며 바다호스는 스페인령으로 확정 짓고 건너편 엘바스는 포르투갈령으로

확정하며 전쟁은 끝을 맺게 되었다니 바다호스와 엘바스는 우리가 건너올 때 보았던

카야 강이 흐르니 속 편하게 강을 따라 국경선으로 정했다 합니다.

 

위의 사진은 당시 알카사바의 모습을 지금 남아있는 유적을 토대로

시타델을 재구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디 국경선만 만들었나요?

이렇게 성벽을 두르고 그 안에 그들만의 리그를 두었잖아요.

 

지금처럼 그냥 왕래하며 살아도 충분한 세상인데 왜 그리 보이지도 않는

국경선에 집착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니까 없는 것도 만들어 서로 구분 짓는 게 아니겠어요?

이 모든 게 다 탐욕이 가져온 결과이지 싶습니다.

 

그래서 이베리아 반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로마 유적은

이곳 바다호스에서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을 겁니다.

다만, 서고트(Visigoths)의 지배를 받았기에 서고트의 흔적이 조금 눈곱만큼 남아있다지만,

이 또한 서로 믿는 신이 다르다고 문화나 역사 지우기에 들어가 지금 남아있는 유적 대부분은

무어족의 유산이라 합니다.

 

왜 아니겠어요?

우상 숭배라고 유적도 까부수는 민족이 이슬람 민족이 아닌가요?

지금도 그들은 인류의 소중한 문화재인 유물 파괴에 열을 올리고 부수고 있잖아요.

물론, 일부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이지만...

 

그러니 이곳에 자리했던 서고트 유적은 사람이나 동물의 형태를 왕궁이나 성벽

그리고 건축물에 많이 남겼을 겁니다.

무어족은 이런 모습을 깡그리 긁어내고 부수고 난 후 그 위에 지금의 알카사바를 만들지 않았을까요?

어쩐지 골목길을 따라 걸어 다니며 보았던 건축 양식이 아랍풍이라고 생각되더군요.

 

지금 죽기 전에 꼭 한 번은 보아야 한다는 곳 중 한 곳인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 말입니다.

여기도 그런 궁전이 있었다는 사실...

알람브라보다 더 훌륭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알람브라는 무어족이 마지막까지 남아 버티다 보니 그 유적이 온전하게 남았고

여기는 그보다 수 백 년 일찍 사라지다 보니 유적도 함께 사라져 버렸을 겁니다.

지금 보고 있는 유적 터가 바로 알람브라처럼 아름다운 곳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당시 유럽은 흉노라는 훈족이 유럽대륙으로 진출하자 게르만 민족은

점차 서쪽으로 밀려가게 되었다네요.

유럽의 동쪽에 자리 했다고 해 게르만족을 동고트 족이라고 불렀고 같은 게르만족이지만,

서쪽에 자리잡고 살았던 서고트족이 연쇄적으로 밀려나 가게 되었다지요.

 

이들은 결국, 로마를 향해 점차 밀려들어 가 살다 결국, 로마 제국을 무너뜨리게 되었다네요.

로마는 그들을 야만인이라 비하했지만, 허울뿐인 문명이란 야만인이라고 비하했던

그들의 손에 허무하게 사라지게 되었지요.

아무리 좋은 문명이라도 지킬 능력이 안 되면 사라지게 되잖아요.

 

이곳 이베리아 반도는 당시 로마제국의 속주였으니까 로마의 패망과 더불어 자연히

사라지고 서고트족은 여기까지 들어와 이 큰 이베리아 반도의 이 큰 땅을 대부분 차지하고

땅땅거리며 살았다지요?

그러면 이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무엇을 하며 지냈을까요?

 

서고트족은 지금의 톨레도인 톨레툼(Toletum)에 도읍을 정했으니

이베리아 반도는 주인이 바뀌는 결과가 생기게 되었다네요.

그때 이 지역으로 들어온 서고트 족이 부족 단위로 지역을 차지하고 다스렸으나 그 세력은

로마처럼 중앙집권적인 힘이 아니라 부족별로 나누어 다스렸으니 강하지 않았나 봅니다.

아무래도 힘이 분산되면 강한 힘을 발휘하기는 어렵지 싶네요.

 

물론, 후에 아프리카 대륙에서 건너온 무어족은 강력한 힘으로 이베리아 반도를

장악하기 시작하니 삼배 바지 뭐 세듯 서고트 족은 슬며시 사라졌습니다.

그때의 유적은 이슬람은 우상숭배라고 해 유럽인이 남긴 사람의 모습이나 동물의 모습을

모두 지우기 시작하며 문화말살이 일어났겠지요.

 

이제 이곳 바다호스도 유럽의 역사와 그 궤를 함께하기에 지금의 알카사바는

그때 서고트 족이 세운 성터에 이슬람인 무어족이 껍질을 벗기고 그 위에 새롭게 단장한 게

지금의 모습이라 합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아무리 신장개업하면 무엇합니까?

지금은 이렇게 흙으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아마도 로마가 이베리아 반도를 장악하고 있을 때 주로 북부의 철광석과 은을 채취해

세비야로 운반해 갔던 수탈의 길인 은의 길에서 살짝 벗어났기에 그랬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에는 변두리에 속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말이 아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