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카 곶에서 신트라 무어 성으로

2015. 4. 15. 08:00포르투갈 여행기 2014/리스본

여기 땅끝에는 그냥 십자가 탑이 하나 우뚝 서 있습니다.

그 탑에는 포르투갈 민족시인이라는 카이몽스의 시구 하나 적혀있고 정확한 경도와 위도를

표시했고 십자가는 이 땅을 떠나 수없이 대서양을 향해 모험을 떠난 뱃사람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모습으로 생각되었고 또한, 포르투갈을 안전하게 지켜달라는 염원의 표시는 아닐까요?

나무조차 자라기 힘든 강한 바람이 늘 불기에 여기는 풀만 자라고

이름 모를 꽃이 살포시 피어있습니다.

 

대항해 시대를 맞이해 콜럼버스가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의 후원으로 이베리아 반도를 떠나

새로운 신천지를 발견하고 수많은 재물을 가져와 스페인의 부흥을 이끌기 전에 사실은 포르투갈의

엔히크 왕자의 주도 아래 이미 아프리카에 진출했고 그 후 바스쿠 다 가마와 마젤란 등 걸출한

탐험가가 포르투갈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그들이 지금의 마카오는 물론 일본과도 교역했다 하니 정말 멀리까지 왔잖아요.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대항해 시대를 시작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당시 후추의 거래를 위한 일이었다지요?

왜?

냉장고가 없었던 시기에 식품을 오래 저장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였다 하는데 그때까지 유럽은 소금 외에는 음식의 맛을 내기 위한 향신료가

별로 없었다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동양의 향신료가 대상을 통해 조금씩 흘러들어오며 음식의

새로운 맛에 환장하게 되었다네요.

부자나 왕족 외에는 향신료는 그림의 떡!!!

 

그런데 후추나 그 외 향신료의 산지라는 인도로 가는 길은 육지로 가는 길이 있었지만, 

그 길목에 누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겁니다.

그게 기독교도들이 볼 때 그쪽으로 소변도 보지 않겠다고 맹세한 이슬람 국가가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잖아요.

바로 목구멍 같은 길목을 말입니다.

 

오스만 튀르크...

네 맞습니다.

우리에게는 형제의 나라라고 했나요?

그 먼 날 돌궐의 후예라고 하더군요.

우리가 부르는 돌궐이 바로 튀르크는 아닌가요?

 

민족 대이동으로 중국대륙의 북방에 자리했던 흉노족이었던 이들은 훈족이라 불리며

헝가리로 서진했고 다른 일행은 돌궐이라고 불리며 남서진하여 지금의 터키라 불리는

튀르크족이 아닌가요?

그들이 목구멍 같은 길목을 틀어쥐고 캐러밴이라는 대상을 좌지우지하며 독점적으로 장사를

통괄했을 것이고 이렇게 힘을 한 손에 쥐게 되면 이게 바로 갑 중 최고라는 갑이 한다

슈퍼 갑질이 아니겠어요?

수요는 무한정인데 공급을 쥐고 조절하고 가격은 수시로 올리니까요.

 

이런 이유로 이들은 막히면 돌아가라고...

포르투갈의 경우 특히 오스만 튀르크로 가기도 전에 스페인에 막혀 방법은 바로 여기...

결국, 바다만이 탈출구가 아닌가요?

 

이러면 배를 이용해 대서양을 통해 나가는 길밖에는 없었을 겁니다.

해양국가 포르투갈은 이런 이유로 당시 부를 축적해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되었다네요.

이어 스페인이 콜럼버스를 앞세워 포르투갈에 뒤질세라 식민지 개척과 무역을 독점했다지요?

 

그러나 스페인과 마찬가지로 포르투갈은 유럽의 일류국가에서 급전직하하여 이무기가 된 이유가

바로 또 해상무역이었다네요.

그들은 식민지 경영으로 처음에는 짭짤한 재미를 보며 잘 나갔지요.

그게 국내 산업을 황폐화한 결과를 초래했고 기본이 없는 부유함이란 사상누각이 아니겠어요?

세상에는 양지가 있으면 반드시 음지가 있게 마련입니다.

 

세상은 정말 재미있습니다.

영원한 강자도 영원한 이무기도 없이 말입니다.

이런 쓸데없는 상념으로 여행하는 佳人이 한심합니다.

여행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생각으로 오늘도 유라시아 대륙의 서단

호카 곶에서 대서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호카 곶을 구경하고 다음 일정을 생각해봅니다.

지금 시각이 1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해안 마을 카스카이스로 갈까, 아니면 절벽 마을로 갈까?

그러나 우리가 호카 곶과 더불어 가장 보고 싶은 페냐 궁전과

무어 성을 구경하지 못하고 여기로 왔잖아요.

 

처음에는 절벽 마을을 구경하려고 했으나 무어 성과 페냐 궁전을 구경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부족하지 않을까 생각이 드네요.

그래서 일단 신트라로 다시 돌아가기로 합니다.

8시 전에 리스보아에서 출발했더라면 모두 볼 수 있지만, 하루 일정에 모두 보려다 다 제대로

보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과감히 모두 포기합니다.

 

먼저 신트라를 구경하고 오려고 했지만, 너무 짙은 운무 때문에 올라가도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것 같아

포기하고 먼저 호카 곶으로 왔기에 시간상으로 조금 손해를 본 느낌입니다.

먼저 신트라를 구경하고 이곳으로 왔다면 카스카이스나 절벽 마을 두 곳 중 한 곳을 더 볼 수 있었지만...

 

우선 신트라에 돌아와 늦은 점심을 먹습니다.

벌써 오후 2시가 되었거든요.

신트라 기차역 앞에 다푸루(大福樓)라는 중국집이 보입니다.

중국인의 세계 진출은 정말 놀랍습니다.

 

중국 여행을 자주 했기에 중국집이 낯설지 않지만, 이웃 나라라고 해도 사실 음식은

우리 입맛에는 그리 맞는 편은 아닙니다.

그러나 스페인과 포르투갈 여행을 하다 보니 중국집이 그나마 주문하기도 쉽고

음식 이름도 알 수 있어 편합니다.

물론 맛도 그런대로 먹을 만합니다.

우리는 새우 차오판과 차오면을 시켰습니다.

각각 4.8유로로 가격도 착합니다.

 

이제 점심을 끝냈으니 버스를 타고 산 중턱으로 올라가 무어인이 만들었다는

무어 성을 구경하렵니다.

버스는 신트라 역에서 오른쪽을 보면 버스 정류장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호카 곶으로도 가는 403번 버스와 무어 성으로 올라가는 434번 버스 모두 섭니다.

 

아침 출발할 때 신트라 일일 권을 사면 그 티켓으로 교통수단 모두를 무제한 이용할 수 있습니다.

2시 35분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니 산길을 타고 올라가 무어 성까지 5분 정도 걸려 도착합니다.

걸어 올라갈 정도는 되지만, 가파른 산길이라 조금 힘이 들겠네요.

 

무어인의 성터 입구에 매표소가 있습니다.

성벽 안으로 들어가려면 티켓이 있어야 합니다.

18유로로 무어 성과 페냐 궁전 두 곳 모두 들어가는 통합권입니다.

리스보아 카드에 입장권이 할인된다고 했지만, 통합권을 사면 그것보다 더 저렴하다고

통합권을 사라고 하여 그리했습니다.

 

위의 지도가 바로 무어인이 만들었다는 무어 성의 모습입니다.

표를 사지 않아도 잠시 성벽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구경할 수 있습니다.

표 검사하는 곳은 한참을 안으로 들어간 후 위의 사진에 보이는 9번 위치의 성문 통과할 때입니다.

 

이제 안으로 들어갑니다.

함께 가시겠어요?

안개로 말미암아 분위기가 죽입니다.

 

여기저기 로마 귀신, 서고트 귀신, 이슬람 귀신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성을 차지할 때 전투를 하며

죽었던 카스티야 왕국의 귀신들이 한꺼번에 몰려다닐 것 같습니다.

죽은 귀신끼리는 싸우지 않겠지요?

왜?

처음 이 성터를 개발한 무리는 바로 로마인이었다고 하니까요.

 

성벽은 삼중으로 만들었습니다.

삼중으로 만들었다는 말은 공격이 아니라 방어에 치중했다는 말이겠죠.

스테인리스 삼중바닥도 아니고...

그러나 세상에는 뚫리지 않는 방패가 없고 뚫지 못할 창도 없다고 했잖아요.

 

위의 사진에 보이는 성벽 터는 로마 시대에 쌓았던 것이라 합니다.

아주 제대로 된 망루처럼 보입니다.

저 위에서 죽은 로마 귀신이 들어오는 관광객 모두를 내려다보겠지요?

우리가 고생하며 쌓은 성벽을 보기 위해 들어오는 관광객의 입장료는

카스티야 왕국의 후손이 받고 있다고...

여기만 그러하겠어요?

터키도 그렇고 중국도 사실 한족이 만든 것보다 이민족이 만든 유적이 더 많잖아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유적이 많이 남아있지 않는 리스보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런 오래된 유적이 남아있습니다.

리스보아는 대지진의 영향으로 과거가 대부분 송두리째 사라진 도시가 되었지요.

그러나 이런 곳에서 유적을 구경한다는 일이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