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鄭芝溶) 생가

2022. 12. 26. 04:00금수강산 대한민국/충청남북도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빈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 베개를 돌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 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꿈엔들 꿈엔들 꿈엔들 잊힐리야

 

우리 누구나 들어본 노랫말인 향수라는 시입니다.

이 시는 가난하지만 평화로웠던 고향의 모습을 회상하며

고향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노래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가사 하나씩 음미하며 읽어보면 마치 우리말의 마술사와도 같은 아름답고 정겨운 느낌이 들지요.

 

그래서 이 아름다운 시를 썼던 충북 옥천(沃川)에 있는 정지용(鄭芝溶) 시인의 생가를 찾았습니다.

생가가 있는 동네는 거리 이름도 향수로 등 그의 작품 이름을 따고

거리의 가게 상호 대부분이 정지용 시인의 작품 속 단어로 도배하듯 하였네요.

 

정지용 시인은 1902년 이 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지요.

물론, 지금의 생가는 그가 살았던 처음 모습은 아니라고 하지요.

1974년 집은 허물어지고 다른 사람이 이 터에 새로운 집을 짓고 살았지만,

1996년 7월 30일 원래 생가의 모습 그대로 복원했다고 합니다.

 

또 향수라는 시에서 나온 실개천은 그의 생가 바로 옆으로 흐르기도 하더라고요.

바로 위의 사진에 보이는 개천인데 그때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과는 달리 개천 정비를 하여 느낌은 다르군요.

 

그래서 그의 생가로 들어가는 문 앞에 위의 사진처럼 실개천을 새롭게 만들어 두고

물레방아까지 만들어 두었나요?

 

또 이번에는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에 등장하는

얼룩백이 황소는 농사 풍경도 바뀌며 이제 경운기로 대체되었기에

그냥 조형물로 생가 마당에 만들어 두었습니다.

 

복원한 듯한 생가의 안방에는 시에 등장하는 질화로가 보입니다.

아마도 젊은 세대는 질화로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지 싶습니다.

질화로란 위의 사진 중 방 가운데 놓인 진흙으로 빚어 구워 만든 커다란 그릇으로

그 안에 숯불을 담아 방을 데우는 역할을 했던 난방기구입니다.

집안이 넉넉했던 사람은 진흙으로 구워만든 질화로보다는 쇠로 만든 화로를 사용했겠지요.

부친이 한의사였기에 방안에 한약장이 보이네요.

 

당시 우리가 어린시절 살던 대부분의 집에는 난방시설이라고는 아궁이에 불을 때던 온돌 외에는 거의 없기에 

추운 겨울을 이기기 위해 사진에 보이는 질화로를 가운데 두고 온 가족 모두가 불을 쬐던 때였지요.

화로란 방만 데우는 역할이 아니라 그 위에 주전자를 올려 따뜻한 물을 먹는 용도로도 사용했고

화롯가에 도란도란 둘러앉아 떡이나 감자나 밤을 구워 먹는 정겨운 모습도 볼 수 있었던 곳이죠.

 

정지용(鄭芝溶) 시인의 아명은 태몽에서 유래했다는 지용(池龍)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여타의 아호(雅號)나 필명은 없다고 하네요.

한의사인 아버지 태국(泰國)과 어머니 정미하(鄭美河)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고 하네요.

 

대단히 이른 나이인 12세 때 송재숙(宋在淑)이라는 여인과 결혼했으며,

1914년 아버지의 영향으로 가톨릭에 입문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세례명은 프란시스코라고 합니다.

고향인 옥천에서 초등학교 과정인 공립 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유학하여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에 입학해 중등과정을 이수했고요.

 

박종화, 홍사용, 정백 등과 사귀었고, 박팔양 등과 동인지 (요람)을 펴내기도 했으며,

신석우 등과 문우회(文友會) 활동에 참가하여 이병기, 이일, 이윤주 등의 지도를 받았다고 하네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선근과 함께 '학교를 잘 만드는 운동'으로

반일(半日) 수업제를 요구하는 학생대회를 열었고, 이로 인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가

박종화, 홍사용 등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난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23년 4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입학했으며,

유학시절인 1926년 6월 유학생 잡지인 학조(學潮)에 시 "카페 프란스" 등을 발표했답니다.

그러니 대학 전공은 우리의 서정적인 시와는 관련이 크지 않은 영문과였네요.

 

1929년 졸업과 함께 귀국하여 이후 8·15 해방 때까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했고, 독립운동가 김도태, 평론가 이헌구

그리고 시조시인 이병기 등과 사귀기도 했답니다.

 

1930년 김영랑과 박용철이 창간한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가했으며,

1933년 가톨릭 청년 편집고문으로 있으면서 이상(李箱)의 시를 세상에 알렸다.

같은 해 모더니즘 운동의 산실이었던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하여 문학 공개강좌 개최와

기관지 (시와 소설) 간행에 참여한 적도 있답니다.

 

1939년에는 문장의 시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을 등단 시기도 했고요.

1945년 해방이 되자 이화여자대학으로 옮겨 교수 및 문과 과장이 되었고,

1946년에는 조선 문학가동맹의 중앙 집행위원 및 가톨릭계 신문인 경향신문 주간이 되어

고정란인 여적(餘適)과 사설을 맡아보기도 했다네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조선 문학가동맹에 가입했던 이유로 좌익인사

교화 및 전향을 목적으로 1949년 조직된 단체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전향 강연에 종사하기도 했답니다.

 

그리고 무슨 까닭인지 확인된 바 아니나, 이화여대 교수직과 경향신문사 주간직은 물론,

기타의 공직에서 물러나 녹번리(현재 은평구 녹번동)의 초당에서 은거하다가

6·25 때 납북된 뒤 행적이 묘연한 것으로 알려져 왔지요.

 

그런데 최근 평양에서 발간된 통일신보에서 가족과 지인들의 증언을 인용해

정지용이 1950년 9월경 경기도 동두천 부근에서 미군 폭격에 의해

사망했다는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답니다.

 

정지용의 행적에 대한 갖가지 추측과 오해로 유작의 간행이나 논의조차 금기되다가

1988년도 납, 월북작가의 작품에 대한 해금 조치로 작품집의 출판과 문학사적 논의가 가능하게

되어 지금은 그의 아름다운 시가 많은 사람에게 읽히게 되었네요.

 

그의 시는 섬세한 이미지 구사와 언어에 대한 각별한 배려를 보여준 것이 특징이지요

1950년 6·25 전쟁 이후의 행적에는 여러 설이 있으나 납북됐다, 자진 월북이다 등...

그러나 1950년경 북한에서 사망한 것이 통설로 알려져 있답니다.

 

옥천 정지용 생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