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육영수 생가(陸英修 生家) 교동집

2022. 11. 15. 04:00금수강산 대한민국/충청남북도

 

충청북도 옥천에 있는 정지용 시인의 생가를 찾아가던 중 멀지 않은 바로 근처

700여 m 떨어진 곳에 육영수 여사의 생가가 있다고 하여

옥천을 온 김에 찾아보았습니다.

무료 주차는 두 곳 중 아무 곳이나 하고 두 곳 모두가 천천히 걸어 다녀올 수 있는

가까운 곳으로 도중에 옥천향교와 옥천 전통문화체험관도 있어 잠시 들러볼 수 있더라고요.

 

 

옥천 육영수 생가(沃川 陸英修 生家)는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입니다.

2002년 4월 26일 충청북도의 기념물 제123호로 지정되었다고 하고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것은 아니고 고증을 거쳐 옛 모습 그대로 다시 복원한 것이라고 하네요.

 

 

원래 생가가 있는 곳은 이 집은 조선 중기인 1600년대 김정승이 처음 집을지어 살았고

이후 송정승, 민정승 등 세 사람의 정승이 살았던 삼정승 집으로 알려져 있답니다.

이 삼정승이 살았던 가옥을 육영수 여사의 부친인 옥천 지방의 독농가(篤農家)였던

육종관 씨가 민정승의 자손 민영기 대감에게서 1918년에 매입하였다고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이 집은 교동 집이라고 불렸으며 옥천 지역의 명문가로

널리 알려진 집이었다고 합니다.

위의 사진은 솟을 대문을 통하여 생가 안으로 들어가면 처음 만나는 사랑채의 모습입니다.

 

 

집을 매입한 지 7년이 흐른 후 고(故) 박정희 대통령의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1925년 11월 29일에 바로 지금 우리가 보는 이 집에서 육종관의 2녀로 태어났다고

하며 위의 사진에 보이는 방에서 25년 정도 살았던 곳이랍니다.

 

 

육영수 여사는 그때부터 이 집에 살면서 1950년 박정희 대통령과 결혼하기 전까지

위의 사진에 보이는 이 안채 왼쪽에 보이는 안방에는 어머니 이경령, 그 뒤의 작은 방에는

육영수 여사가 살았으며 아버지 육종관씨는 동쪽 날개채에서 주로 거주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1969년 현대건설에서 전면적인 개, 보수를 하면서 원래 모습을 많이 훼손하여

 관리사와 사당 등만 남아 있으며, 주변은 울창한 산림이 형성되어 있고

6,047의 대지 위에 본채, 사랑채, 별당 등 10여 동의 건물은 그 흔적만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육영수 여사가 서거 이후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결국은 1999년에는 철거되기까지 했다네요.

 

 

건물의 배치는 대문을 들어서면 위의 사진에 보이는 널찍한 사랑채가 있고

그 오른쪽에 중문채가 있어 중문채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안채가 있습니다.

 

안채 뒤로는 위의 사진에 보이는 청기와 지붕의 사당과 별당 터가 있습니다.

장독대가 정겹습니다.

 

 

그리고 주위에는 위의 사진에 보이는 관리인과 고용인들이 기거하던 중문채인 부속건물이 있습니다.

 

 

사랑채 동쪽에는 위의 사진에 보이는 연당 사랑과 연못이 있습니다.

이 사랑은 연못을 바라보며 풍류를 즐기기 위해 마련된 공간으로 정면 세 칸의

규모로 앞에 툇마루가 마련되어 있고 내부는 모두 우물마루로 되어있어

교동 가옥내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곳이 아닐까요?

 

 

아마도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장소가 아니었을까요?

겨울에는 이 연못이 얼기에 이곳에서 가족들이 함께 스케이트도 타가도 했다고 합니다.

 

 

육영수 여사는 이름 있는 문벌이었고 우리나라 전통적인 부덕(婦德)을 갖춘

현대 여성으로 알려졌지요,

특히 불우한 사람을 위해서 봉사와 희생으로 일관된 생활을 하였고요.

그러나 1974년 8월 15일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조총련계 문세광이 쏜 총탄에 맞아 사망하여 8월 19일

국민장으로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지요.

 

 

육영수 여사의 생가는 1600년대 김정승 이후 정승들이 살던 곳으로

조선시대 상류계급의 전형적인 양식의 건축구조를 갖추고 있었던 곳이며,

육영수 여사가 태어난 곳으로 가치 있는 자료가 되겠네요.

 

 

이렇게 육영수 여사가 나고 자란 집이 허물어진 채 폐가로 변해 터만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해  2011년 5월부터 일반에 공개했다고 합니다.

1918년 육종관이 민 정승의 자손에게서 사들여 수리하면서

조선 후기 전형적인 충청도 양반가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99칸 집이었다는 이야기처럼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 건넌채, 안채, 뒤채,

행랑, 별당, 후원, 정자, 연못 등이 그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위의 사진이 사당 뒤로 돌아가면 정자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 문을 들어서면 제법 넓은 공간이 나오고...

언덕 위로 정자가 보이네요.

이곳은 아마도 과일나무를 심었을 듯합니다.

 

 

육 여사 서거 후 네 해째인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방치되어 오다가 1999년 유족들이 건물을 정말 철거하면서

생가는 기단과 초석과 함께 터만 남게 되었고요.

 

 

이후 옥천군에서 2000년 9월, 육영수 여사 생가 복원계획을 세우고, 민간이 주체가 된

"육영수 여사 생가복원추진위원회”를 발족하여 육 여사의 회고에 근거하여

2002년 생가지 지표조사를 마친 다음 2003년부터 2010년까지

37억 5천만 원을 들여 건물 13동을 원래 모습으로 복원했다고 합니다.

 

 

초서로 한 일(ㅡ) 자를 쓰려면 옆으로 힘차게 가로 그어 가다가

붓에 힘을 모아 멈추는 잠두에서 아래로 내리 뻗치는 그 끊어질 듯 이어지는

정기가 모인  아늑한 양지 받이에 터를 잡은 교동 집은 풍수지리학 상

명당에 자리 잡은 집으로 알려져 왔다네요.

 

 

집의 후원과 과수원을 합치면 26,400㎡에 대지 10,000㎡ 규모의 집이니 규모면에서도

보통의 집 수준을 넘어서겠네요.

전해오는 이야기로 아흔아홉 칸의 집이었다는 이야기가 헛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생가는 육영수 여사의 회고에 의하여 건물의 배치를 살펴보면, 솟을대문을 들어서서

오른편으로 마방이 있고, 대문과 마주 보는 곳이 사랑채였다 합니다.

 

 

사랑채 왼쪽에 건넌채가 있었고, 사랑채를 돌아 중문을 열고 들어서면

안채가 집터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 안채에서 왼쪽으로 행랑, 오른편으로

연당 사랑, 뒤로 돌아 별당, 후원에 사당과 정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정자 오른쪽에 또 뒤채가 자리 잡고 있었으며 바깥 겹집 사랑채만 하여도

누마루, 바깥 사랑방, 안 사랑방, 사랑채 안방, 대청, 광, 다락, 식객들이 거처하는 방,

사랑채 전용 부엌 등 당시로서는 상류층의 규모 있는 살림집이었다고 합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나무 구조물 두 개는 바로 쌀을 담아두은 뒤주입니다.

뒤주 크기로 짐작컨대 이 집의 살림살이 규모를 알 수 있겠네요.

 

 

또 곡식을 빻는 연자방아도 보입니다.

집안에 방앗간까지 두었다는 말은 아마도 대농이었지 싶습니다.

 

 

생가에 가면 사랑채와 ㄷ자형의 안채에 설치된 전통창호를 유심히 살펴볼만합니다.

용(用) 자살창과 아(亞) 자살창, 완(卍) 자살창 등 사대부집 방의 창호를 장식하는 살대가

그려내는 문양이 고고하기도 하면서 아름답기도 한 우리 전통의 멋이 깃든 전통 창을 볼 수 있네요.

 

 

이곳이 있는 위치는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향수길 119로 입장료도 주차료도 없는

곳으로 지나는 길에 들러볼 만한 곳이라고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