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모습을 간직한 히로나

2014. 12. 19. 08:00스페인 여행기 2014/히로나

히로나 구시가지 뒤로 가면 정원이 있습니다.

그곳은 로마 시대에 만든 성벽이 있고 그 성벽 주변을 정원으로 꾸며 산책하기 좋은 곳입니다.

이렇게 히로나는 마치 정원 같은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곳이라 생각되네요.

이곳은 관광객도 많지 않은 곳이라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끼실 수 있습니다.

 

우선 지도부터 보고 갑니다.

구시가지에는 아직도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의 중세 석조 건물이 마을을 이루고 있어

중세의 카탈루냐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도시인 셈이죠.

그런 도시의 전형적인 모습은 중국의 후통 같은 좁은 골목길입니다.

 

물론, 이슬람 통치 시절의 유적지인 아랍 공중목욕탕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어 아주 멋진 곳입니다.

그러기에 구경할만한 곳 대부분이 구시가지로 그곳은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제법 볼거리가 많습니다.

대성당, 성벽, 아랍 목욕탕이 있고 구 유대인 거리라고 불리는 동네는

좁은 골목으로 연결된 집이 제법 구경거리를 주네요.

 

이 모든 구경거리가 구시가지 한곳에 몰려있어 길을 잃을 염려도 없고 좋습니다.

구시가지는 그야말로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의 건물이 즐비해 중세로 돌아간 느낌이 듭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이슬람 양식인 말발굽 형태의 장식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하나 사진을 통해 구경하렵니다.

 

먼저 이 도시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카테드랄입니다.

카테드랄의 계단을 보니 마치 로마의 휴일에서 보았던 스페인 계단이 생각나네요.

카테드랄은 다른 도시의 카테드랄과는 달리 그 모습이 조금 단순합니다.

그러나 내부는 그렇지 않습니다.

 

유럽 여행은 성당 투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스페인은 십자군 전쟁과 그 궤를 함께하는 레콩키스타라는 국토회복운동이 8백여 연간이나 지속하였기에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기 위한 방편으로 지도자는 하나님을 앞세워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했습니다.

만약 이런 힘이 없었다면 아직도 이슬람이 안달루시아 지방을 통치하고 있을 겁니다.

 

서유럽의 많은 나라가 십자군 깃발을 앞세워 예루살렘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전쟁을 벌일 때

이곳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이슬람 세력인 무어인이 차지한 옛 영토를 탈환하기 위한 전쟁이

십자군 전쟁 시작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일어났다 하네요.

 

십자군 전쟁은 1096년에 시작했지만, 레콩키스타는 711년부터 시작해 그 대미를 장식한 해가 1492년이었으니

사실은 레콩키스타운동이 십자군 전쟁을 유발했다고 억지를 부려도 되겠나요?

다른 종교를 가진 민족과의 전쟁은 역시 종교라는 힘으로 뭉쳐야 제대로 힘을 씁니다.

 

그리고 십자군 전쟁은 1270년에 끝을 냈으니 200년도 되지 않지만,

레콩키스타 운동은 781년간이나 지속했다는 것입니다.

그냥 숫자로 표기하니 그 의미가 퇴색되지만, 거의 800여 연간이라면 대를 이어 전쟁을 밥 먹듯이 해도

그 끝을 보기 어렵지 않나 생각되네요.

 

정말 집요하고 무서운 민족인가 봅니다.

그런 전쟁으로 단련한 몸이라 소 죽이는 일을 스포츠라 생각하고 온 국민이 열광하고 또 이렇게 신이 원한

국토회복 운동에 깊은 신앙심으로 남미를 비롯한 많은 지역에 걸쳐 식민지 경영을 하며 많은 재물을 약탈하고

죄도 없는 사람을 그리 많이 죽였나요?

오랜 세월 무어족과의 전투를 하다가 그게 끝나고 나니 무척 심심했기에 살아있는 소를 죽이는 일을

스포츠라 생각했을까요?

 

그들이 믿는 신이 그리하라 했을까요?

과연 종교의 본질을 무엇일까요?

우매한 佳人은 알려주어도 모르지 싶습니다.

 

그 운동의 주체는 바로 신이었습니다.신을 앞세워 국민을 하나의 목적으로 뭉치게 했습니다.

그 결과 지금도 그때의 흔적인 성당이 어느 도시나 남아 있습니다.

 

문명의 충돌인 십자군 전쟁은 당시 두 세력 간의 패권 다툼이었고 승자도 패자도 모두 상처만 남긴 그런 전쟁이었지요. 핍박받는 순례자를 보호하라고 했고 성지를 다시 찾아야 한다고 신이 원했다고요?

누가 신과 터놓고 이야기했을까요?당시 새롭게 성장하는 기사 세력의 밥줄을 열어주기 위한 일은 아니었을까요?

 

이런 충돌은 지금도 이어져 세계정세 불안의 제일 큰 요인으로 남아있네요.

이게 어디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적인 측면에서 보는 배타적인 이유일까요?

바로 인간의 탐욕이 아닐까요?

남을 인정하지 않는 욕심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포용과 사랑과 이해가 종교의 근본이라고요?

 

더 큰 영토, 영주와 기사 계급 간의 이익 배분 등...

그 이후 세상은 새로운 영토를 차지하기 위한 식민지 경영에 눈을 뜨고

대항해 시대로 이어지는 결과를 초래했지 싶습니다.

 

결국, 십자군 전쟁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곳 이베리아 반도에서 벌어진 레콩키스타는 1492년 그라나다에서

마지막까지 버티던 무어족의 항복을 접수하고 드디어 이 땅에 이슬람을 완전히 몰아냈으니

대단한 성공을 거둔 셈입니다.

이제 이런 큰일을 마무리했으니 심심해서 어쩐대요?

 

그 역사의 현장을 그린 그림이 위의 사진입니다.

그 아름다운 알람브라 궁전을 버리고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넘어 척박한 아프리카 땅으로 떠나야 하는

이슬람의 마지막 왕 보아브딜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서로 칼을 겨누었던 두 나라 왕이 탔던 말조차도 승자와 패자라는 것은 아는 듯...

佳人이 별 걱정을 다 하고 있지요?

 

그때의 아름다운 궁전이 바로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이 아니겠어요?

아무리 바빠도 해 저무는 저녁의 알람브라 궁전 사진을 한 장 보고 갑니다.

나중에 저곳에 들어가 구석구석을 다니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히로나의 상징은 뭐라 해도 대성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근방 어디서 바라봐도 보이는 게 대성당이니 누가 뭐래도 히로나의 상징이 맞기는 맞습니다.

성당 안에 있는 "천지 창조의 태피스트리"는 아주 유명한 보물이라고 하더군요.

태피스트리라고 하는 게 그냥 벽을 가리는 양탄자 같은 것이 아닌가요?

 

1312년에 건축이 시작되어 16세기에 완성했다 합니다.

정면은 카탈루냐 바로크 양식이나 내부는 고딕 양식으로 오랜 세월 동안 만들다 보니

서로 다른 양식이 혼재된 재미있는 곳이랍니다.

 

입장료는 5유로이나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은 무료라고 합니다.

그리고 볼거리 대부분은 카테드랄을 중심으로 모여 있기에 히로나에서의 구경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내부 촬영을 금지하기에 성당 안의 모습은 佳人 혼자만 보았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성당 내부 구경은 토요일 오후라 무료였지만, 내부 사진 촬영을 금하네요.

사실, 내부 사진을 찍었다 해도 다른 성당과의 차별화를 할 수 있겠어요?

이번 여행 중 무척 많은 성당 구경을 했지만, 몇 곳을 제외하고는 차이점을 구별할 수 없었습니다.

신자라면 성지순례라고도 할 수 있지만,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에게는 더욱 그 구분이 어렵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