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창 박물관으로...

2013. 2. 19. 08:00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이제 조승상부 구경을 끝내고 박물관으로 가렵니다.

가기 전에 잠시 부시루에 전시된 글을 하나 먼저 보렵니다.

 

이 글은 조조가 직접 쓴 글로 알려졌습니다.

한중의 고한대라는 한중박물관에 보관된 글로 곤설(袞雪)이라고 쓴 글입니다.

처음에는 한중의 석문잔도의 석벽에 조조가 썼다는 글로 알려졌으나 댐공사를 하며

글이 수몰될 지경에 이르자 그 석벽을 통째로 뜯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나중에 한중을 들려 고한대에서 직접 그 석벽의 글을 보았고 한중 편에서

석벽을 뜯어 박물관에 전시한 사진을 찍은 원본 사진으로 보여 드릴까 합니다.

건안 20년(215년) 7월에 조조가 양평관(陽平關)에서 장로를 격퇴하고 나서 일찍이 한중에

5개월여 머물렀는데, 석문잔도의 경치를 감상하며 걸어가다 계곡의 바위에 물방울이 튕기며

부서지는 모습을 보고 즉흥적으로 바로 붓을 들어 차차차작~ 일필휘지했다는 글자가

바로 곤설(袞雪)이라는 글자라 합니다.

 

 

그곳 잔도의 계곡이 무척 험하기에 물결이 바위에 부딪히며 부서지는 모습이

마치 흰 눈이 날리는 모습으로 보였던 모양입니다.

이 정도면 조조는 정말 멋진 사람 아닙니까?

佳人도 이번 여행에서 조조가 걸었다는 석문잔도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글자를 쓸 때 조조는 곤 자의 삼수변을 빼고 썼습니다.

여기에 많은 이야기가 있답니다.

조조는 정말 무식한 사람이라 글자를 잘못 썼다.

글자의 조형미를 고려한 것이다.

그러나 조조는 잔도 석벽에 쓴 글은 이미 잔도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이

물방울을 튕기며 흐르기에 곤 자 앞에 물 수라는 변을 빼도 된다고 말했답니다.

그러나 이 얼마나 재치가 번쩍이는 사람입니까?

 

 

곤(袞)이라는 글자는 우리는 곤룡포 곤 자로 알고 있습니다.

원래 흐를 곤(滾) 자를 써야 한다는군요.

그런데 조조는 곤룡포 곤 자를 썼던 모양입니다.

조 서방이 곤룡포를 입고 싶었던 게요? 그런 게요?

 

그런데 이 글자가 정말 조조의 친필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 아니겠어요?

단지 곤설(袞雪)이라고 쓴 글자 왼쪽에 위왕(魏王)이라는 글자가 있다고 

이게 유일한 조조의 친필이라고 주장하는 모양입니다.

누가 대신 썼을 수도 있고요.

당시 조조의 붓은 바위도 뚫을 수 있는 착암기 정도는 되었던 모양입니다.

 

 

한위가 자랑이라는 팔대 미녀라는 미스 문희를 곁눈질로 보고 갑니다.

조조가 늘 가슴 속에만 품고 진짜로는 품어보지는 못한 여인...

품지 못했기에 더 안타깝고 그래서 더 아름다운 여인.

 

 

그 여인이 바로 문희랍니다.

북풍한설 몰아칠 때 흉노족에게 잡혀간 문희를 생각하며 조조는 추위에 떠는 

그녀를 생각할 때 조조라는 사내는 가슴이 미어지는 마음이었다 합니다.

그래서 거금을 들여 그녀를 다시 이곳으로 데려옵니다.

그래도 그녀를 품지 못하고 늘 먼발치에서 그녀만 바라보았다 합니다.

 

 

이번에는 초선이라 합니다.

초선은 중국의 사대 미녀 중 한 사람이라지요?

워낙 미모가 빼어나 달이 부끄러워 숨었다고 소문이 자자한 폐월이라 합니다.

왕윤의 수양딸로 동탁과 여포 사이를 오가며 소설 속에서 대단한 일을 했던

여인이지만, 사실은 가공의 여인이지요.

 

 

공명이 오나라를 적벽대전으로 끌어들인 주유와 손책의 부인인 자매

대교와 소교로 사실 시대적으로 삼대가 세워진 시기보다 먼저 일어난

전투가 적벽대전인데 그런데 착공도 하지 않은 동작대와 양쪽의 빙정대와 금봉대를 잇는

다리 두 개를 이교라 불렀지만, 그 두 다리를 시로 만들어 주유를 속여 전쟁의

한 가운데로 오나라를 끌어들여 결국, 단물인 형주를 꿀꺽 삼킨

희대의 사기극 적벽대전의 공명이 아니겠어요?

 

 

주유에 이교를 찾아 조조에게 보내라 하며 두 여인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투로

능청스럽게 부채질한 공명의 사기극은 나관중의 머리에서 나온

삼국지 최대의 거짓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부채질...

그래서 늘 손에는 학우선을 들고 다녔나 봅니다.

공명의 탁월한 바람 쇼로 결국, 유비는 처음으로 작지만,

프랜차이즈를 갖게 되는 영광을 누렸다지요? 

나머지 여인은 지면 관계로 그냥 佳人의 카메라 속에 잠이나 자라고 했습니다.

 

 

쉬창 박물관은 최근 시내에서 외곽으로 이전했나 봅니다.

가는 길을 물어보고 걸어서 갑니다.

사실 걸어도 그리 먼 길이 아닙니다.

 

 

박물관을 걸어서 가는 길을 지도로 보여 드립니다.

파란색 선을 따라 곧장 길을 걷기만 하면 바로 쉽게 찾아갈 수 있습니다.

허도공원이라는 곳에 새로 지은 건물이라 무척 크고 깨끗합니다.

박물관 구경을 마치고 다시 파란 선을 따라 걸어 내려오면 큰길에 버스 정류장을

만날 수 있고 그곳에서 관우가 떠날 때 조조에게 "헬로 세이 굿 바이~"를 외쳤다는

파릉교까지 한 번에 시내버스로 갈 수 있습니다.

 

 

가다가 조조가 건설했다는 운량하도 봅니다.

조조가 쉬창을 도읍으로 삼으려고 공들인 모습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되네요.

물론 순전히 삽질로만 팠겠지만, 이는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되는 토목공사가 아닐까요?

 

 

박물관의 모습은 그냥 사진으로 대신하렵니다.

대부분 설명이 되어있고 많은 분이 별로 원하는 이야기도 아닐 것으로 생각되어...

그리고 박물관은 입장료를 받지 않고 무료로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돌 도끼 석부도 보이고 뼈로 만든 생활도구입니다.

 

 

그동안 많이 보았던 갑골입니다.

 

 

뼈로 만든 낚시바늘인가 봅니다. 

 

 

......

 

 

당시의 유물인가 봅니다.

 

 

위무왕이라면 조조를 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무덤 석곽에 설치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박물관을 보았으니 시내버스를 타고 관우가 유비 형님 찾았다고

조조의 곁을 떠나 두 형수님 모시고 떠나며 뒤쫓아온 조조와 이별했던 다리라는

파릉교를 찾아갑니다.

소설 속에서는 관우를 멋진 사내로 만들기 위해 떠날 때도 카리스마 있게 그렸지만,

사실 야반도주했을 겁니다.

깨끗한 척 주주가 내린 모든 재물을 두고 갔다고 했지만, 적토마는 그냥 타고 줄행랑했지 싶고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여행 중 우리 부부는 시내 이동에 택시를 타지 않고 이동합니다.

물론 몇 곳은 차가 다니지 않는 외진 곳이라 예외는 있었지만, 대부분 이번에도

관광지는 시내 버스만으로도 충분히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모르는 곳에서 불안한 택시보다는 시내버스가 훨씬 편안했습니다.

중국 여행에 저렴한 대중교통만을 이용한다 해도 가지 못할 곳이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바쁘지 않으시면 저렴하고 안전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