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릉교(灞陵橋)

2013. 2. 20. 08:00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박물관 구경을 끝내고 관우가 조조에 의탁했던 것을 정리하고 유비가 있는 곳을

찾아 떠났다는 파릉교(灞陵橋)로 갑니다.

조조는 관우를 보내지 않으려고 피객패까지 방 앞에 걸어두며 일부러 만나주지

않았지만, 관우가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부지런히 뒤를 따라 바로 오늘 구경할

파릉교에서 만날 수 있었다고 하지요?

 

박물관에서 시내버스 편을 물어보니 앞으로 난 큰길을 따라가다가

5번 버스를 타라고 알려줍니다.

우리 부부의 여행은 늘 이렇게 저렴하고 안전한 시내버스를 타고 구경다닙니다.

 

 

5번 버스는 바로 중간에 갈아타는 일 없이 파릉교가 있는 경구 입구까지 갑니다.

이제 버스를 내려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박물관에서 나온 시간이 오후 4시 16분...

사실 쉬창 박물관은 구경할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여기에 도착한 시간이 4시 47분입니다.

무척 가까운 곳이지요?

 

 

벌써 날씨가 약간 어두워지기 시작합니다.

겨울에는 5시 30분까지만 연다고 하니 40분밖에 시간이 없습니다.

입장료가 30원에 반 표가 15원...

그런데 여권 복사본을 내미니 무료 표를 줍니다.

왜?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서였을까요?

 

 

안으로 들어가면 처음 접하는 곳의 모습입니다.

제일 앞에 죽간의 형태로 만든 조조에게 보낸 관우의 마지막 편지가 보입니다.

그 뒤로 두 사람의 이별장면을 보여주는 조형물이 보입니다.

 

 

하나씩 천천히 두리번거리며 구경합니다.

바로 위의 사진에 보이는 게 '관우사조승상서'라는 관우의 편지로 여기에 만들어

놓았는데 한자는 몰라도 관우가 조조에게 올리는 편지라는 말이겠지요.

그동안 도와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말은 빼놓지 않고 떠나야 하는 이유를 적었을 겁니다.

 

'관모빈수재배(關某鑌首再拜)'라고 마지막에 썼나요?

자신을 낮추어 관모씨라고 했고 여러 번 머리 숙여 두 번 절을 한다고 그래도 편지에는

예를 갖추었고 승상부에 올린다고 제법 관우 처지에서 제법 깍듯한 표현이라 해야 할까요?

물론, 나중에 작가가 꾸민 편지겠지만...

 

 

그 뒤로 보이는 조형물이 '조승상배송관공조소'라는 것입니다.

승상인 조조가 관우를 보냈던 곳이라는 말이 아니겠어요?

당시의 모습을 재연한 것입니다.

이 또한 이야기에서만 나온 아주 멋지게 포장된 이야기일 겁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니 어둡습니다.

왼쪽이 조조와 그 일행이고 오른쪽이 관우와 유비의 두 부인이 탄 마차가 보입니다.

 

 

자세히 부분별로 구경합니다.

마차는 지금 막 파릉교 다리를 건너는 중입니다.

두 부인은 밖의 일이 무척 궁금한가 봅니다.

미 부인이 묻습니다.

"조조 저놈이 우리를 그냥 살려 보내줄까요?"

감 부인이 작은 소리로 말합니다.

"관우를 믿어야지요. 지금은 대안이 없어요."

가까이 다가가면 들립니다.

 

 

이번에는 조조 뒤를 따라온 무장들의 모습을 보시겠습니다.

"지금 치지 않으면 저놈은 평생 두통거리입니다.

주군! 오늘 관우를 손 좀 보고 싶습니다."

"맞아요. 지금 관우는 두 부인 때문에 제대로 싸울 수 없어요. 우리에게 맡겨주세요.

요즈음 쉬었더니 몸이 찌뿌득해 죽겠습니다. 오늘 몸 좀 풀게 해 주세요. 주군!!!"

이 앞에만 서면 누구나 중국어를 몰라도 이들이 수군거리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정말이라니까요!

 

 

여기는 크게 볼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삼국지 기행을 하는 사람에게는 무척 의미 있는 장소입니다.

관우가 조조를 떠나 유비에게 돌아갈 때 배웅 온 조조와

안녕을 고한 장소에 사실 볼 게 뭐가?

석량하(石梁河)라는 작은 강이 흐르는 곳에 다리 하나 있어 그 다리를 건너

유비의 두 부인을 모시고 떠난 곳이죠.

다리와 조형물과 관제묘가 있고 고전 스타일의 원림을 조성해놓은 곳이네요.

 

 

조조가 건안 5년(서기 200년) 동쪽 정벌을 나서며 서주의 유비를

격파하고 관우를 무릎 끓립니다.

그러나 조조는 관우를 선처하기로 합니다.

왜?

관우를 속마음으로 좋아했기 때문에 수하장수로 쓰고 싶었던 겁니다.

만약, 이때 관우가 고무신 거꾸로 신었다면, 조조가 천하제패를 했을지 모르겠네요.

 

 

유비는 얼마 전 청매정에서 대단한 연기를 하며 자신을 속이고 원술을 친다고 군사를

달라고 요구해 5만이나 주었으나 그 길로 서주로 줄행랑해 거기에 있다고 했고,

나중에 사람을 보내 돌아오라 하니 길을 나선 장수는 주군의 말을 듣지 않아도 된다고

오리발만 내밀고 끝내 그 길로 장수만 돌려보내고 군사는 데리고 줄행랑쳤지요?

이렇게 유비는 거짓말은 물론, 조조의 군사까지도 훔쳐 도망한 사람입니다.

군사는 가족도 없었나요?

 

그리고 황제의 밀명으로 자기를 주살하려던 음모에 유비가 깊숙이 관계되었기에 걸리면

척살하려 했지만, 나중에 군사를 끌고 유비를 잡으려 했지만, 유비는 도주의 달인이기에

두 명의 마누라까지 버리고 혼자 죽으라 도망하며 도원결의도 내팽개치고 혼자 북쪽의

원소 곁으로 도망질해 버렸습니다.

 

세상에 천하를 논하는 사람이 마누라도...

휘하 장수도 모두 버리고 도망을 했답니다.

왜?

물어보면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라고 할 겁니다.

세상에 믿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한날한시에 죽자고 도원결의를 했더라도 말입니다.

 

 

도원결의!

태어난 날은 다르지만, 한날한시에 죽겠다는 유관장 세 사람의 굳은 맹세가 아니겠어요?

여기 세 사람이 했던 풍선껌 같은 인증사진이 있습니다.

지금도 이 말은 우리에게 무척 친근한 말이지만,

 

그런데!!!

장비도 혼자 살겠다고 망탕산으로 도망가버렸다니 도원결의란 두둥실 날아가는

풍선껌이고 쇼였다는 게 아니겠어요?

유관장의 도원결의도 실상을 알고 나면 이렇게 다릅니다.

 

 

조조는 관우의 마음을 자기에게 돌리기 위해 많은 금은보화와 미녀를 한 트럭 이상 내렸고...

아니군요?

당시는 트럭이 발명되기 전이니 마차로 수정하겠습니다.

 

사흘에 한 번 작은 연회, 닷새에 한 번 큰 잔치를 베풀고 거처할 집과 적토마까지 내렸지만.

관우는 모두 마다치 않고 처음 약속대로 유비의 소재를 파악하고 길을 떠나려 합니다.

조조는 관우를 보내지 않으려는 생각에 문 앞에 피객패를 걸어놓고 병이다,

출타 중이다 하며 일부러 만나주지 않았답니다.

이러니 언제까지나 조조와의 면담이 이루어지겠어요?

 

기회는 기다리는 자에게 언젠가 찾아온다고요?

아닙니다.

기회는 기다리지 말고 만들어야 합니다.

만들지 못하면 관우처럼 포기하고 디른 일을 저질러야 합니다.

 

 

할 수 없이 관우는 편지 한 장 남기고 유비의 두 부인인 감 부인과 미 부인을

마차에 태우고 길을 떠납니다.

조조는 관우가 떠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제는 관우를 포기해야 하겠다는 마음이 들었을 겁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뒤를 쫓아 관우를 만난 곳이 바로 여기 파릉교라는 다리 위였다 합니다.

이렇게 내 사람이 될 수 없는 사람임을 안 조조는 깨끗하게 단념하는 깔끔 남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인사를 위해 한걸음에 달려오는 조조야말로 사람을 아끼는 멋진 사내가 아닌가요?

 

 

조조는 여비에 보태라고 노잣돈을 두둑이 내리고 특히 전포를 내려주었답니다.

그런데 관우는 다리 위에서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전포만 청룡언월도 칼끝으로 걷어

챙겼으니 세상에 그렇게 자신을 챙겨준 어른에게 마지막 인사가 건방진 게 아닌가요?

오만불손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모습을 본 조조의 장수가 얼굴이 붉그락푸르락 하며 주군에게

손봐주겠다고 나서자 조조가 뭐라고 했습니까?

"장수는 그래도 돼!!"

장수는 말에서 내리지 않고 저런 행동을 해도 된다는 배포를 가진 조조는

대단한 내공을 지닌 젠틀맨입니다.

 

이제 관우는 천리주단기라는 오관육참의 멀고 험한 길을 떠난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그러기에 이곳은 볼거리는 없지만, 삼국지 기행에서는 필수코스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있지도 않은 오관육참의 길에 작가는 또 많은 조조의 장수를 죽이는 짓을 합니다.

그때 등장한 조조의 장수는 순전히 조조를 빛내려고 죽어주기 위해 등장한

일회용 엑스트라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당송 이후 많은 문신무장은 물론 시인, 묵객이 이곳을 찾아 관우의 충정과

마음을 담아 비석에 새기기를 좋아했다 합니다.

 

 

위의 사진은 전행정(餞行亭)이라는 정자입니다.

글자 그대로 먼 길 떠나는 사람에게 바이바이를 외치는 정자라는 말이지요.

두 사람의 이별을 기념해 여기다 만들었다 합니다.

여기서 조조는 자기 암시를 하며 뒤쫓아가 관우를 죽여 후환을 없애자고 추근거리며

졸라대던 수하장수에 "냅둬라!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주인이 있는 법, 추격하지 마라!"

 

이 정자에 올라서면 아직도 조조의 수하장수가 궁시렁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뭐라고?

"지금 죽여야 해~ 지금 바로 죽여야 해~"

그러나 조조의 저 한 마디는 사내의 심금을 울리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조조의 저 심정을 이해할 수 있으세요?

 

 

위의 그림 한 번 더 보고 가지요.

관우는 정말 싸가지 없는 모습이 아닌가요?

칼로 전포만 걷어가는 관우를 향해 어른인 조조는 두 손을 잡고

최고의 예를 다하고 있습니다.

하극상도 아니고...

조조!

정말 알면 알수록 괜찮은 사람이 아닙니까?

 

 

충의신무라고 쓴 비석이 있습니다.

조조를 일컫는 말이 아니고 관우를 지칭하는 말일 겁니다.

조조의 위수 지역에 포로로 잡혔다 야반도주한 관우를 더 칭송하다니...

청나라 광서시기에 쓴 글이네요.

 

 

이미 파릉교 위에도 노을이 길게 물들어 저녁을 재촉합니다.

파릉교의 모습입니다.

물론, 옛 모습과는 다른 새로운 다리네요.

파릉교는 원래 팔리교(八里橋)라고 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던 중 당나라 때 시안에 파릉교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 다리를

"버들가지 꺾어서 이별하는 곳"으로 널리 알려진 모양입니다.

그런 이유로 이곳도 조조와 관우의 이별 이야기가 있어 소설 속에서 파릉교로

개명해 이야기를 씀으로 이제는 파릉교로 더 유명해졌다 합니다.

소설의 힘은 무한대인가 봅니다.

 

 

"한관제조포처"라는 비석이 서 있습니다.

중요한 비석인지 유리로 보호해 놓았습니다.

이 말은 한나라 관제가 조조가 건네준 전포만 청룡언월도 칼끝으로 걷어간

곳이라는 의미라 하네요.

 

조조라고 하면 그래도 황제를 모시고 있는 나라의 승상이라는 사람이 아니겠어요?

그 황제가 내린 벼슬도 사실 조조가 내린 벼슬이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 벼슬이 자랑스러워 늘 관평에게 도장을 들게 하며 조조가 준 적토마도 타고 가는

주제에 어른이 건넨 전포를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칼끝으로 걷어가요?

 

주변에 있던 조조의 장수들이 손에 칼을 대었다 놓았다 했지만, 조조는 수하들에게

장수는 길을 떠날 때 말에서 내리지 않아도 된다고 말렸다 하니 조조가 대인이었네요.

관우가 엉아로 모시는 유비도 얼마 전 조조에게 원술을 미리 제압해야 한다고 군사를

5만이나 빌려 도망할 때 뒤쫓아와 군사를 돌리라는 조조의 사람에게 길을 떠난 장수는

주군의 명을 듣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모르쇠로 일관했다잖아요.

모르쇠의 대가 유비는 나중에 형주를 돌려달라고 수차례 찾아온 동오의 노숙에도 모르쇠...

그때 유비의 모습이 사오정의 화신인지 알았다니까요.

 

그때 이곳에서 서로 싸움이 벌어졌다면 관우는 조조의 수하에게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바로 유비의 두 부인을 모셔가는 중이나 마음껏 싸울 수 없었을 테니까요.

사실 관우는 조조의 포로입니다.

포로가 이렇게 당당할 수 있습니까?

제네바 협정에도 포로는 이렇게 당당하라는 말이 없을 것 같습니다.

 

 

또 하나의 비석이 있습니다.

당시의 이별 모습을 비석에 석각으로 새겨놓았지만, 워낙 오래되어 희미해졌네요.

여기도 도망자 관우를 관왕이라고 불러주었습니다.

 

 

이곳에 있는 관제묘 안에는 원래 팔리교의 다리 모습을 일부 재연해 놓았다 합니다,

우리는 너무 시간이 늦어 관제묘가 닫을 시간이라 밖에서 문만 들여다 보고만 말았습니다.

원래 다리는 그 길이가 21m 정도라 하고 다리에 만든 교공이 세 개라 합니다.

1962년 부서져 버려 그 일부를 물에서 건져 다시 재연했다 합니다.

그러니 관제묘 안에 있는 다리가 그래도 옛날 돌이 일부라도 있기에

관우 냄새라도 맡을 수 있겠네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관우가 조조와 파릉교에서 헤어질 때 조조가 건넨 옷을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청룡언월도도 걷어서 받았다 합니다.

옆에 많은 조조의 수하가 관우의 행동을 보고 싸가지 없는 놈이라고 손보겠다고

궁시렁거렸지만, 조조는 장수는 그래도 된다고 했답니다.

누가 대인입니까?

이로써 여기부터 오관육참이라는 천리주단기의 외로운 길을 관우는 떠나게 되었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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