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 은허박물관 부호묘

2013. 1. 25. 08:00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오늘은 은허 박물관부터 구경하려고 합니다.

안양의 은허(殷墟)라는 지명은 그리 유쾌한 지명이 아닌가 봅니다.

원래 이곳은 상(商)나라의 20대 왕인 반경(盤庚)이라는 사람이 산동성의 곡부에서 당시

은(지금의 안양)이라고 불렀던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며 이 지역이 발전하게 되었다 합니다.

그때가 기원전 1.300년 전이라 하니 이미 문자로 기록된 최초의 수도가

여기가 아니었을까 생각되네요.

 

상나라는 이런 기록 때문에 실제 존재했던 국가로 인정받는 최초의 중국 왕조라고 봐야

하기에 우리에게는 은이라는 나라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진 나라일 겁니다.

그러니 기원전 1.600여 년 전에 상나라가 생겼고 그 후 300년이 지난 기원전

1.300여 년 전에 도읍을 은허로 옮기며 약 300여 년을 은이라고 불리며

실제로 존재했던 나라로 인정받는다 합니다.

 

 

탕왕은 처음 하나라의 폭군인 걸왕을 무찌르고 상나라를 세웠다 합니다.

그러나 반경이 이곳 은이라는 곳에 도읍을 옮기며 은나라라고 부르게 되었다 하나

그러나 마지막 왕은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달기와의 주지육림에 빠져

결국, 주나라 무왕에 다시 멸망했다고 하지요.

 

이로써 나라가 사라진 상나라 사람은 중원을 떠돌며 장사로 살아갔기에 상나라 사람을

부르 商人이라는 말이 장사하는 사람으로 불리게 되었다네요.

그러나 상나라는 주나라에 멸망하며 은나라는 풍비박산이 되며 폐허가 되었다 하여

이곳을 은허라고 한다는 말도 있네요.

나 원 참!!! 나라가 망한 것도 억울한데 폐허로 변했다고 은허라고 할 것은 또 무엇입니까?

 

 

역사의 도시 안양...

안양은 중국의 7대 고도 중 한 곳이며 순서로 따져도 제일 형뻘인 곳일 겁니다.

여기는 주역(周易)의 발원지이고 중국인이 우리나라 이순신 장군처럼 존경하는

악비(岳飛)의 고향이라고도 합니다.

 

여기 안양에서는 은허박물관, 은허왕릉유지 그리고 문자박물관을 구경하렵니다.

그러나 이 세 곳을 오전 중에 모두 구경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와 배낭을 챙겨

오후 2시 50분에 안양역을 출발해 쉬창으로 가는 기차를 타야 합니다.

미션 임파서블?

 

 

오늘은 아침부터 시간을 분 단위로 체크하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여야 하며

만약, 중간에 의심이 가면 바로 구경하는 것을 포기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이러니 오늘은 정신없이 발도장만 찍고 이동해야 하는 날입니다.

여행을 하다 보니 오늘처럼 정신없이 움직여야 하는 날도 있습니다.

 

 

우선 은허박물관부터 달리기 위해 기차역 부근의 문화궁 앞으로 가

8시에 시내버스를 탑니다.

역 광장 앞으로 난 큰길에서 한 블록 정도 걸어가 사거리에서

북쪽의 버스 정류장에서 1번 버스를 탑니다.

박물관 입구는 버스를 내려 약간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입장료 90원, 반표 45원입니다.

오늘은 아침부터 가랑비가 내립니다.

이른 아침이라 우리가 제일 먼저 들어온 관광객입니다.

아무도 없는 황량한 들판에 선 그런 느낌입니다.

 

 

여기서 부호묘, 차마갱, 박물관, 그리고 순장 인골터 등이

중요한 볼 곳이라는 생각입니다.

이제 하나씩 구경해보렵니다.

입구로 들어가 어디부터 보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해설사를 데리고 한 무리의

중국인 단체여행객이 들어오더니 왼쪽에 있는 부호묘 방향으로 가는군요.

그러면 우리도 그 방향으로 가야 하겠네요.

우리가 제일 먼저 입장한 관광객이었거든요.

 

 

문표를 사고 입구를 들어오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게 사모무(司母戊)라고 쓴

대형 청동 솥(鼎)이 보입니다.

이 사모무라는 솥은 상나라 시기의 도읍을 의미하는 중요한 유물이라 합니다.

옛 말에 "정(鼎)을 정(定)한다." 하면 나라를 정한다는 의미라 하잖아요.

물론 여기에 있는 것은 모조품이고 진품은 박물관이나 보관했을 겁니다.

사모무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렵니다.

 

 

사모무 청동 솥을 지나 왼쪽으로 걷다 보면 오른쪽으로 넓은 초지가 보입니다.

여기가 은허 골프장인가요?

무식한 佳人이기에 이런 실수를...

여기가 바로 왕족과 민초가 살았던 주거지 터라고 하네요.

물론,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로 미루어 보아 그렇겠지요. 

 

 

그리고...

그 앞에 푸하우(婦好:부호)라고 도끼를 손에 든 여인의 조상이 보입니다.

당신은 누구시길래 도끼를 들고 계십니까?

그대가 정녕 도끼 부인이신가요?

 

이 여인이 1976년에 바로 이 자리에서 발굴된 무덤의 주인이랍니다.

이 무덤 속에서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의 청동기 유물이 무척 많이 쏟아져

중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은 곳이라 합니다.  

부호는 은의 임금 무정(武丁)의 비(妃)로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언급되는

여장군으로 유명하다고 하네요.

 

 

무덤은 지하에 있기에 발견된 그 자리인 아래로 들어갑니다.

세상에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의 집을 방문하기 위해 지하로 내려가는 셈이네요.

그렇다고 죽은 사람을 위로 올라오라 할 수도 없고...

 

어쩌겠어요. 그쵸?

우리가 내려가야지요.

지하의 묘는 발견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보존했겠지만, 여기에 보관된 유물은

모두 모조품이고 진품은 아마도 박물관에 보관하여 진열했을 겁니다.

 

 

유명한 여장군이라서 도끼를 들고 있었나 봅니다.

상나라 왕 무정(武丁)에는 세 명의 부인이 있었답니다.

신(辛), 무(戊), 계(癸)라고 하는데 그중에서 부호는 신 부인의 무덤이라고 합니다.

辛 부인이라 하면 무척 매운 여자였나 봅니다.

어쩐지 도끼를 들고 설치더라니...

 

 

그녀의 아들들은 무정이 죽은 후 은의 왕위를 이었다고 하네요.

이 무덤에서 발견된 갑골문으로 이 무덤은 축조 연대가 확실하며 여기에 묻힌 사람의

이름 역시 명확하여 은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하게 되었고

또한, 발굴된 청동기에서 푸하우((婦好:부호)라고 새겨진 명문(銘文)이 다량 발견되어

그녀의 무덤으로 판정되었다네요.

문자란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그 자취를 남기나 봅니다.

 

 

부호는 중국 최초의 여성 장군이며 여성 제사장이기도 했다네요.

사실, 그 이전에도 이런 사람이 왜 없었겠어요.

그러나 기록이 남지 않아 최초라는 타이틀을 빼앗긴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우리도 많은 생각과 이야기와 사진을 블로그나 개인 저장 공간에 남겨야

훗날 우리 후손이 그런 글과 이야기를 들을 게 아니겠어요?

 

 

은허에서는 부호와 관련된 100여 건의 갑골문이 발견되었다는데, 어떤 갑골문에서는

그녀를 등인(登人 : 사령관) 이라고 하고 "부호에게 3,000명을 주어 공격하게 한다."

라는 내용이 발견되어 그녀를 여성 장군으로 인정한다 합니다.

 

부호는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특히, 상왕을 도와 제사를 주관하였고

그와 함께 사냥에 나가기도 하였다는군요.  

 부호 묘는 1928년 은허 유적지가 발견된 이후 은허궁전종묘구(殷墟宮殿宗廟區)의

가장 중요한 발견 중의 하나라 하는데 지금까지 발굴된 상나라 왕족의

무덤 중에서 보존상태가 가장 완벽한 무덤이라고 합니다.

 

 

그 크기가 남북으로 50.6m이며, 동서로는 4m, 깊이는 7.5m로 좁고 긴 형태의

무덤이며 갑골문의 기록에 따르면 무덤 위에는 모신종(母辛宗)이라는

향당(享堂)이 있었다 합니다.

 묘실에는 순장된 시신 16구가 있었고, 1,928건의 매장품이 발견되었다네요.

 수습된 유물은 모두 1,928점인데 청동기 468점, 옥기 755점, 골기 564점이며

그외 석기류도 발굴되었다 합니다.

 

 

주목할 점은 16구의 순장 인골의 출토이며, 그 외 6마리의 개도 순장되었다는군요.

저기 무덤 아래 3.300여 년을 땅 속에서 잠을 자고 있습니다.

당시는 순장이라는 제도가 있어 지체 높은 사람이 죽으면 이렇게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을 Live로 묻었다 합니다.

그야말로 생쇼를 보여 주는 것이겠네요.

공명이 알았더라면 만두로 대신 하라고 했을 텐데...

 

 

부장품의 수량도 많을 뿐 아니라 이전에는 발견되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종류의

공예품이 발견되기도 하였다는데 이 말의 의미는 상나라의 높은

수공예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산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바로 이 도끼군요?

입구의 도끼 부인이 들고 있던 도끼 말입니다.

도끼라 하면 나무꾼이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샘물에 빠뜨려 신선이 나타나

"이 금도끼가 네 도끼냐?" 하며 인간성 테스트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신선은 왜 처음부터 쇠도끼를 들고 나오지 금도끼, 은도끼를 차례로 들고 나와

잠시나마 갈등을 느끼게 인간성 테스트를 하느냐 이 말입니다.

나뭇꾼은 그동안 얼마나 속으로 갈등을 겪었을까요?

 

佳人은 어렸을 때 그 이야기를 듣고 그때부터 신선은 믿을 수 없는 존재로

분류해 버렸습니다.

신선이 이 글을 본다면 다음부터는 그런 테스트 하지 말고 바로 건네주세요.

그래야 고맙다는 말을 듣습니다.

공연히 "이 금도끼가 네 도끼냐?"라고 물어 머리 복잡하게 하지 마시고요. 네!

자꾸 그러면 신선이라도 예외 없이 빠떼루 들어갑니다.

 

 

발견 당시의 모습인가 봅니다.

유물이 있었던 곳도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부호라고 명문이 새겨진 갑골문이 발견됨으로 이 무덤의 주인과

그녀의 기록을 알 수 있었다 합니다.

기록이 있는 민족과 없는 민족의 차이가 바로 문명이 아닌가요?

그러나 중국이라는 나라의 글자는 세월이 흘러가며 자꾸 변합니다.

간체의 보급으로 이제는 우리가 아는 한자는 고어가 되었습니다.

과연 이게 올바른 방법인가 한 번 생각해 봅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우리가 한글이라는 우수한 문자로 말미암아 디지털 시대에도 빨리 적응할 수 있고

선도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디지털 시대에 가장 적합한 언어는 그냥 풀어서 길게 쓰는 알파벳과 한글이

가장 적합한 언어가 아닐까요?

글자...

정말 우리는 세종대왕에게 고마워하고 우리 글을 바르게 후손에 물려주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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