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갱과 순장

2013. 1. 28. 08:00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여기는 오랜 세월 동안 전설처럼 회자한 상 왕조의 실체를 보여주는 곳이라 생각됩니다.

이곳 은허유적지가 발견되기 전까지 상나라는 그냥 전설 같은 이야기 속에 나오는 곳으로

치부되었다 하며 처음 갑골문의 발견으로 세계의 이목이 점차 은허로 쏠렸고 1920년대에

이르러 서구의 고고학자들이 점차 중국으로 눈을 돌리자 중국 고고학계도 마냥 발굴을

미루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기에 이로써 전설 속에만 이야기되던 상나라가 드디어

역사의 한 페이지로 당당히 기록되게 되었답니다.

 

1928년 10월 드디어 중국정부에서 이 지역의 유적발굴을 시작했다 합니다.

그러나 1937년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다시 유적발굴은 잠시 중단되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 이미 상나라의 궁전구(宮殿區)와 왕릉구(王陵區)가 발견되었으며, 도기,

청동기, 석기, 옥기, 골기 등 무려 24,918점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그 실체는 이미 대부분 드러난 셈이지요.

 

드디어 1950년 중국정부는 중국과학원 고고학연구소를 설립하고, 은허의 발굴 작업을

재개하였다는데 10년이 넘는 이 발굴 작업으로 무덤과 제사갱 10,000여 좌와 차마갱(車馬坑)

100여 좌, 거주지 터 100여 좌, 공방유적 10여 좌 등을 발굴해 내는 개가를 올렸다 하네요.

이 정도의 규모라면 정말 대단한 규모가 아닌가 생각되네요.

 

이번에는 은허 궁전에서 종묘 제사를 지냈던 제사갱 유적과 차마갱을 보러 갑니다.

당시 사회가 얼마나 잔혹했는가를 보여주는 곳이라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도 오래전 순장이라는 제도가 있었지요.

나중에는 토용으로 대체했지만...

 

중국도 이 시대에는 노예제도도 있었고 순장제도도 있어 명망가가 죽으면 그 주변에

함께 살았던 사람을 생매장하여 순장시켜버렸다네요.

지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당시의 사회제도는 당연시했던 것이겠지요.

그런데 당시의 잔혹한 모습에 놀라는 게 아니라, 이런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에

우리는 경악할 수밖에 없네요.

 

죽은 사람을 위해 산 사람을 죽여 함께 묻는다...

이게 가당한 이야기겠어요?

"왜 죽어야 하는데?"라고 따진다면 그 당시는 덜수취급을 당했을 거예요.

당시는 따라 죽어야 하는 게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며 진리였을 겁니다.

순장이란 제도는 주로 북방민족인 흉노라고 불렀던 민족의 전통으로 알려졌지요.

그렇다면 은나라라는 하는 집단은 한족이 아니라 흉노족이라는 말이고 한자의 기원은

은나라라고 하니 한자는 중국어가 아닌 흉노족의 글자라는 말인데...

 

여기 제사갱에는 모두 49개의 제사갱(5개의 차마갱 포함)이 있고 순장 당한 사람의 유골이

 모두 201구가 발견된 곳입니다.

유골의 모습을 봅니다.

누워 있는 모습도 보이고 앉은 자세로도 있습니다.

위의 사진을 보시면 유골이 슬퍼 눈물을 손으로 닦는 것처럼 보입니다.

담장 뒤에 숨어서...

佳人만 그렇게 느꼈을까요?

 

그러면 산 사람을 그냥 묻었을까요?

동물만 묻었을까요?

여기 사진에는 당시의 수레 모습이 그대로 보입니다.

마차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함께 묻어버렸을까요?

 

당시에 권력을 가진 자가 죽으면 누가 얼마나 많이 함께 무덤 속으로 넣느냐는 경쟁을 했나 봅니다.

그러다 보니 마차도 집어넣고...

(물론 말도 함께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발굴한 마차를 그대로 여기다 진열했네요.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은 노예도 들어가고 양이나 염소도 들어갑니다.

위의 사진을 보시면 양의 뿔이 달린 머리도 보이고 염소의 뼈도 보입니다.

평소 그가 사용했던 청동제품은 물로 손때 묻은 일상용품서부터 주인이라고 꼬리 치며 늘 따랐던

개 마저도 넣었답니다.

지금 생각하면 개도 이게 무슨 개 같은 짓이냐고 따지겠지만, 그때는 개도 조용히 들어갔다 합니다. 

그야말로 고대사회의 노예제도의 교과서를 보는 것같은 씁쓸한 느낌이 드네요.

 

상나라 사람들은 제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인권이라는 게 없고 모든 생명은 권력을 쥔 자를 위한 부속품이고 소유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양식의 제사 형식이 이 부근에서 발견되었는데, 가족이나 노예를 살해하여 함께

매장하는 순장은 아주 빈번하게 발견되었고, 왕이 사망하게 되면 수백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한꺼번에 순장시키기도 했답니다.

 

죽어서도 지하에서 행세하며 살고 싶었던 겁니까?

모두 죽고 나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이슬 같은 삶이 아니겠어요?

왕이 죽으면 무척 슬피 울었을 겁니다.

죽은 왕을 위해 우는 게 아니라 자기 처지를 비관하며 말입니다.

 

제사의 형태 중에서 가장 잔인한 것은 인두제사(人頭祭祀)였다고 합니다.

글자 그대로 산 사람의 목을 베어 머리만 구리로 만든 동제(銅制) 그릇에 넣고 삶아서 제물로 삼는

이러한 제사는 관련 유물이 발견되면서 그때까지는 그냥 떠도는 말이었지만, 사실로 확인되었답니다.

위의 사진을 보세요.

여기 그 실체를 보여 드립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그릇 속에 담긴 게 바로 발굴 당시의 모습 그대로인 사람의 머리랍니다.

이게 문명국의 전통이라면 문명국은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을 제물로 삼는 습관은 상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이후 점차 사라졌다고 하니

옛날엔 그렇게 살았나 봅니다. 

어디 상나라만의 일이겠어요?

당시 고대 사회에서는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널리 시행되었다 합니다.

 

어느 학자는 이런 순장제도가 북방민족의 풍습이고 우리나라 신라도 북방계열이라 순장을 했다고

하는데 만약, 그렇다면 상나라는 흉노계열의 민족이란 말이 아니겠어요?

상나라의 시작은 바로 지금 산동성 곡부가 도읍으로 중국 동부지방의 정권인데...

동주시대의 무덤에서도 차마갱은 발견되었지요.

나중에 그 무덤도 구경해 보려고 합니다.

당나라는 당삼채를 순장 대신 사용하기도 했으니 이 가설이 어느 정도 맞기도 하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렇기에 갑골문을 한자의 기원으로 보고 상나라는 한족이 아니라 북방민족일 수 있기에

중국이 조직적으로 역사 공정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위의 사진은 은허차마갱전청에 전시된 마차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진시황이 병마용을 만들어 토용을 만들어 묻었던 일은 아주 인간적인 일이었습니다.

세상에 진시황이 정말 칭찬받을 일을 했군요?

병마용을 바라보면 이게 순장제도가 아니었나 생각이 들며 만약 진시황이 토용을

이용하지 않고 살아있는 군사를 그대로 묻었다고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잖아요.

 

만약, 진시황이 정말 말과 사람을 묻었다면 엄청난 사람과 말이 죽었을 겁니다.

그해는 함양에는 골목마다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겁니다.

이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어요.

아니라고요?

진시황 무덤과 병마용을 만드느라고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요?

그렇군요.

 

갑조기지(甲組基址)라고 이름을 붙인 유지가 남쪽에 있네요.

여기에는 총 21좌의 유적이 발견되었으며, 면적은 대략 2만 제곱미터에 달한다고 하네요.

대부분 장방형이나 방형인 건물터와 제사갱(祭祀坑)들이 발견되었으며, 이들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이 지역은 궁전종묘나 제사장소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북조종묘제사갱(北組宗廟祭祀坑)은 상나라의 대형종묘제사장소로 5곳의 차마갱을 포함하여

49곳의 제사갱이 발견되었습니다.

 201구의 순장된 유골들은 목이 베어진 후 제물로 바쳐진 것이며, 몇개의 갱 속에는

양이나 개와 같은 제물들의 유골도 보입니다.

 

을칠기지(乙七基址)는 동서 26m, 남북 25m의 달구를 사용해 땅을 단단히 다진 방형의 유적입니다.

여기에서는 기둥을 세웠던 주춧돌들과 제사갱이 발견되었다고 하네요.

제사갱에는 제전건축을 시작하기 전에 의식에 사용했던 사람과 소, 양, 개의

유골들을 매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을팔기지(乙八基址)는 동서 14.5m, 남북 85m, 넓이 1,232.5제곱미터의 유적입니다.

여기서 153개의 주춧돌이 발견되었으며, 3곳의 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고 합니다.

건물의 규모로 보았을 때 상나라 때 이미 상당한 건축수준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고 하네요.

 

은허차마갱전청은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안양 공작참과 안양시문물공작대가

은허보호구의 유가장(劉家庄)과 효민둔(孝民屯)에서 발굴한 6좌의 차마갱과

상(商)나라의 도로유적을 전시한 곳입니다.

화하문명(華夏文明)의 축력거(畜力車) 유물 중에서는 가장 고대의 것으로,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하기 때문에 학술적 연구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하네요.

 

1928년 은허발굴이 개시된 7년 후인 1935년에 처음으로 차마갱이 발견되었다고 알려졌습니다.

차마갱은 총 40여 곳이 있었으며 수레와 말, 마부는 일반적으로 대형 무덤의 묘도나

중형 무덤의 부근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네요.

이곳에 전시된 갱 한 곳에는 마차 1대가 매장되었으며, 5번 갱에서는 말이 두 필 발견되었고,

네 개의 갱에서는 마부로 추정되는 시체가 한 구씩 발굴되었답니다.

검증에 따르면 순장된 시체는 성인 남성으로 추정되며, 소년의 시체도 한 구 있었다고 합니다.

 

1930년대에는 발굴기술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흙 속에 파묻혀있던 목제 수레를

흙에서 분리해내지 못하였다고 하네요.

그러나 1953년이 되어서야 흙에 용해되어 버린 목제를 분리해내는 기술이 개발되었으며,

그제 서야 고고학자들의 발굴작업이 진행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차마갱은 순장제도 일부이기도 하지만, 고대의 마차제작기술을 반영해주는

사료이기도 하다고 하니 이런 잔인한 풍습이 오히려 대단한 유적으로 기록되니

정말 세상일이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이곳에 전시된 것은 차마 만이 아닙니다.

상나라 시대의 도로도 전시되어있습니다.

바닥을 아주 단단히 다져 차마가 다녀도 크게 지장이 없게 하였습니다.

지금으로 생각하면 포장도로인가요?

 

차마갱을 나와 다른 곳으로 가려고 나오니 전시관 앞에 손가락에 먹을 묻혀

그림을 그리는 수지화의 명인이 있습니다.

잠시 그분의 신공을 구경합니다.

사진 찍기를 요청하자 흔쾌히 허락하고 포즈까지 잡아주시는 쎈스쟁이십니다.

손가락에 먹물을 묻혀 산수화를 그립니다.

물론, 글은 붓으로 쓰고요.

 

중국이라는 나라는 사람이 많아 그런가요?

손재주를 발휘해 정말 다양한 재주를 보여주는 사람이 많더군요.

설탕을 녹여 동물모양을 만들고...

그러나 우리 어린 시절에는 이런 분이 시장에 가면 쉽게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돈이 되지 않기에 더는 하지 않지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순장이라는 제도는 정말 끔찍한 제도였습니다.

사람이 죽는 일은 다시 살아난다는 믿음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권력을 과시하기 위함이었을까요.

이 모든 일이 다 혹세무민하며 살았던 그런 부류의 사람이 만든 작품은 아닐까도 생각했습니다.

은허 유적에서 발견된 차마갱이나 순장제도와 더불어 한자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갑골문의 발견은 중국 역사의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지요.

그런데 이런 제도가 한족이 아닌 북방민족의 풍습이라는 것은

중국으로서는 대단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런 사실이 중화민족의 역사가 아니라면?

따라서 이런 내용을 감추기 위해 중국의 역사 공정은 필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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