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허 갑골문

2013. 1. 26. 08:00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중국의 안양이라는 작은 도시(우리나라와 비교하면 대도시)가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된

이유는 바로 갑골문이라는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이제 도끼 부인인 부호묘를 나와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걷습니다.

그곳에는 아주 기다란 주랑을 만들어 놓고 갑골문의 글자와 지금의 글자와의 비교와

갑골문의 내용을 해석해 놓았지만, 그러나 뭘 알아야지요.

 

 

1899년,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더 전에 이곳 소둔촌이라는 곳에서 처음으로 갑골문이 발견되었다 합니다.

갑골이란 거북의 등껍질이 아니라 뱃가죽 뼈와 소의 어깨뼈를 말한다 합니다.

그곳에 새긴 글자가 발견되었고 그 이름을 갑골문이라 한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글을 남기려기 보다 점을 치는데 사용되었던 모양입니다.

위의 갑골문은 모형이지만,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완벽하게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을

이곳에 붙여 놓았습니다.

내용은 무지개가 뜬 것을 보고 점을 쳤던 모양입니다.

점을 친 후 상나라 왕 무정이 8일 이내에 큰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채운(彩雲)이 동면모(東面母)로 올라갔으며 동면은 지명이고 모는 여신을 의미하는

말이라 하니 동면에 있는 여신을 만나러 채운(무지개)이 올라갔다는 말이겠죠.

해가 서쪽에 기울었을 때 동쪽에 무지개가 나타나는 것은 이는 용이

황하의 물을 마시는 것이라 합니다.

 

젠장! 용이 마시면 황하가 물이 마르게 생겼습니다.

그냥 일반적인 자연현상 무지개를 보고 별 이상한 소리 다 하고 있습니다.

무지개는 원래 태양의 반대편에 생기는 게 아닌가요?

그러나 세상에는 이런 이상한 소리를 하고 돈을 버는 사람이 아직도 많이 있지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지요.

 

점을 칠 때 갑골의 안쪽 면에 불로 달군 나무를 눌러 급속히 팽창시키면 표면에

균열이 생기고 그 균열의 모습으로 보고 길흉화복의 점을 치고 그곳에 점을 친 날짜와 점장이 이름,

그리고 점을 친 내용을 적어넣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처음에는 이런 용도로 갑골을 사용하다가 점차 기록으로 남기는 목적도 겸했던 모양입니다.

 

위의 사진은 거북이가 아니고 소의 어깨뼈에 글을 새긴 것입니다. 

주로 내용은 조상신이나 자연신에 대한 제사 관련의 기록, 전쟁할 것인가 말 것인가,

농사에 대한 풍년과 흉년의 예측, 바람과 비의 유무, 수렵이나 재해의 유무 등

주로 통치에 관한 다양한 내용이라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로 안양의 북서쪽에 있는 원하(洹河)라는 작은 강이 흐르는 언덕에

소둔촌이라는 농촌에서 갑골문이 무더기로 발견되었고 이는 인류 문자역사의 일대 혁명이라

할 수 있으며 원하가 흐르는 소둔촌은 지대가 약간 높아 옛날부터 이곳이

좋은 무덤 자리라 생각했던 곳입니다.

 

그래서 이곳은 사람이 살지 않고 무덤으로 생각하며 살았지만, 명대에 이르러 사람이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이곳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기에 땅이 비옥해 농사에는 아주 좋은 곳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땅을 일구다 보면 뼛조각이 자주 나타나 이곳 주민에게는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고

하여 그래서 밭에서 나온 뼛조각을 밭 구석에 쌓아두었던 모양입니다. 

 

물론 청동기나, 옥기나 토기도 나왔겠지요.

처음에는 농사짓는 일에 방해물로 생각되었답니다.

그러나 청동제품이나 옥기 토기 등은 점차 그 귀함을 알고는 골동품으로 생각하여 팔았지만,

뼛조각인 골편(骨片)은 처리할 방법이 없었답니다.

귀찮기만 한 존재였습니다.

 

그 뼛조각이 갑골문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당시로는 아무도 없었을 테니까요.

그게 거북이 등짝인지 감자탕의 주재료인 돼지 잡뼈인지 아니면 개뼈다귀인지 어찌 알았겠어요.

감자탕에 들어가는 돼지 잡뼈는 살점이라도 붙어있지만...

 

그래서 처음에는 그 뼛조각을 모아 밭 구석에 쌓아놓았다는데 마침 그 부근을 지나던

어느 약재상이 보고 그게 뼈라고 생각하고 뼈라면 틀림없이 몸에 좋을 것으로 생각해 뼛가루로

곱게 빻아 약으로 사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네요.

드디어 그 뼈는 용골(龍骨)이라는 멋진 이름을 붙여 가루로 만들어 신제품으로 한약 재료

로 팔았다 하니 봉이 김선달이 그 동네도 있었나 봐요.

용골이라는 말은 바로 용가리 통뼈라는 말이 아닐까요?

 

맞아요!

세상에 역사적인 위대한 유산을 갈아 마셨다는 말이 되겠네요.

그러니 용가리 통뼈가 맞나 봐요.

그러면 그 갑골문이 새겨진 뼛가루를 마셨다면 그 사람이 문화유물이 되는 겝니까?

인간문화재 말입니다.

 

세상에 갑골문이 용가리 통뼈가 되어 한약재로 사용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위대한 갑골문이 새겨진 뼈가 환장하게도 사람 뱃속으로 들어간 셈이 된 겁니다.

이게 무슨 용가리 통뼈도 아니고 약재라니 얼마나 무식한 일이었습니까?

모르면 하늘도 놀랄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요?

 

처음 발견한 사람은 왕의영(王懿榮)이라는 사람으로 1.899년 청나라 말기

국자감의 제주(祭酒)였던 모양입니다. 

그는 마침 그때 학질이라는 고약한 병에 걸려 엄청나게 고생을 하며 온갖 약을 다 썼으나

 백약이 무효였다고 하네요.

 

그러던 어느 날 베이징의 어느 유명한 한의사가 용골이라는 처방을 보내주어 사람을 시켜 용골을

구해오라 하니 가루로 만들지 않은 체 구해온 용골에 예전에 유물 발견 때 많이 보았던

청동기에 쓰인 글자가 보이더랍니다.

왕의영은 먹물깨나 먹었다는 말이겠지요?

 

지금 사용하는 한자와는 다른 고대문자였을 겁니다.

이것을 연구해 본 결과 은나라 황실의 점복을 기록한 갑골문이라고 알아냈답니다.

학질은 고칠 생각을 하지 않고 약재로 가져온 글자의 연구에 몰입했군요?

 

1908년 나진옥(羅振玉)이라는 사람이 용골을 역추적하여 드디어 원하(洹河)의 소둔(小屯)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답니다.

소둔촌이 바로 지금 은허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는 이곳입니다.

발견된 그 자리에 은허박물관을 지은 셈이지요.

지금 은허박물관은 바로 부호묘도 그 자리에다 지었고, 갑골문이 나온 곳도

바로 그 자리에다 지었습니다.

 

이 외에도 많은 이야기가 전해오지만, 어쨌든 용골이라는 약재로 사람의 뱃속으로 들어가 모두 사라질

위기에서 그나마 역사적인 유물로 밝혀냈으니 대단한 일이라 할 수 있겠네요.

이런 웃을 수도 없는 일로 인해 갑골문이 세상에 위대한 유물로 나오게 되었다네요.

 

위의 사진은 1936년 6월 12일, 제13차 은허발굴 중에 발견된 모습입니다.

놀랍게도 작은 구덩이 한 곳에서만 여러장에 달하는 갑골이 출토되었다고 하네요.

상나라 사람들이 갑골문을 보관했던 창고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은허 발굴 전 과정을 통틀어서

가장 많은 갑골이 발견된 곳이라 하네요.

이 발견이 갑골문과 상나라의 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음은 분명했을 것 같습니다.

 

이 교혈에서 발견된 갑골은 총 17,096장으로 이 중에서 17,088장은 귀갑이었고, 나머지 8장은

동물의 뼈에 새긴 것이라네요.

300여 장의 모양이 완전한 거북이 껍질인 귀갑이 바로 여기서 나왔다고 합니다.

 

YH127의 갑골문은 무정 시기의 것으로 상 왕실에서 만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왕실에서 행했던 점복활동의 내용을 귀갑이나 동물의 뼈에 쓰거나 새긴 것으로, 정치, 군사,

경제, 과학, 문화 등의 내용이 기록되었다고 하네요.

노예와 평민, 귀족, 관리, 군대, 형벌, 전쟁, 공납, 농업, 목축, 수렵, 수공업, 상업, 교통, 천문,

역법, 기상, 건축, 역별, 생육, 귀신숭배, 제사, 길흉 등 사회 전반에 걸친

다양한 내용을 기록했던 가 봅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갑골문

그러나 그 대단한 발견도 처음에는 갑골문의 굴욕이라고 할 정도였네요.

지금 혹시 우리 주변에 굴러다니는 이상한 뼛조각은 없습니까?

그게 세기적인 발견이 될 수도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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