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제일관 문을 열고

2012. 12. 18. 08:00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천하제일관 앞에 섰다.

그때는 이 관문만 닫으면 세상이 조용했다고 생각했지.

이 문만 닫으면 중원은 안전하게 보호받는다 생각했어.

그러나 이 문이 닫혀 언제 중원이 조용하고 안전했던가?

 

문을 닫고 나니 이웃과 소통의 문마저 닫혀버렸네.

문은 닫고 나니 내 문도 닫혀 나를 보호하고 안전해지는지 알았는데

나를 세상과 격리시켜 외톨이로 만들었다네.

 

열어라!

천하제일관의 문을 열어라.

세상과 나를 교통하게 문을 열어라.

마음의 문도 활짝 열어젖혀라~

 

멀리 각산산성(角山山城)을 바라봅니다.

바로 저기와 발해만을 이었다 하여 그 이름이 산해관인가요?

그런데 막아놓은 성벽 저 넘어 오삼계와 부하가 말춤을 추고 있나 봐요.

 

문을 열지 않아 관내는 이렇게 살아가나 보다. 

성 안은 고성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곳도 산다는 게 무척 힘 드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세상에 어디 만만한 삶이 있겠어요?

 

성벽 위에 멋진 누각 하나가 보입니다.

임려루(臨閭樓)라는 누각입니다.

1584년 명대에 지어진 오래된 누각이라네요.

물론 청대에 다시 보수했지만요.

건물의 목적은 산해관 방어를 위한 병사 숙소와 병기를 보관하는 곳이라 겁니다.

 

누각의 높이가 10.22m로 나무와 벽돌로 지었으며 동, 남, 북 세 곳으로 20개의 창이 있어

적의 침입에 화살을 쏠 수 있게 한 전창(箭窓)이 있습니다.

아마도 오삼계가 이곳에 서서 만주족의 침입을 저지했을 것 같습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동으로 향한 창에 화살을 쏠 수 있는 창문이 보이시죠?

 

그러면 이 성을 공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삼계처럼 성을 지키는 장수가 문을 열어주면 쉽게 들어올 수 있지만...

아! 공성기를 사용해야 하겠군요?

바로 위의 사진에 보이는 게 성을 공격하기 위해 오르는 사다리 같은 운제(云梯)인가 봅니다.

저걸 타고 올라가다 위에서 펄펄 끓는 기름을 붓고 커다란 돌을 던지고...

올라가지 않으려 하면 뒤에서 독전대가 눈알을 부라리며 째려보고....

이럴 때는 우리의 덜수는 어쩌면 좋겠어요.

 

그림 한 장 보고 갑니다.

이 그림은 병부에 보관된 그림으로 산해관을 아주 잘 보여주는 그림이네요.

산해관의 위치와 바닷가에 있는 노룡두와의 산 사이의 절묘한 위치에

천하제일관이라는 산해관을 세웠습니다.

오른쪽 동쪽에는 만주족의 침입을 경계해 만든 옹성이 확연히 보이는데 그러나 저 길을 따라

우리 선조는 베이징을 드나들기 위해 무수히 많은 세월을 고생하며 다녔을 겁니다.

그러니 바로 여기까지가 중국의 역사이고 영토이지 동북공정은 개뿔이지...

 

오늘은 흐린 날씨에 바람마저 세차게 붑니다.

이렇게 북풍한설 몰아칠 때 여기를 지키던 덜수는 얼마나 고향 집이 그리웠을까요?

엄니도 그립고 소꿉장난했던 순이도 보고 싶어 눈물을 흘렸을 겁니다.

타구를 통해 몰아치는 찬바람에 떨어진 낙엽마저 누가 빗자루로 쓸어 모아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바람이 부는 날에는 오늘따라 고향 집이 더 그립습니다.

그러나 집을 떠올려 보니 이제는 그 윤곽조차 희미해 분명하지 않습니다.

"엄니! 보고 싶습니다. 그냥 엄니라는 이름만 불러도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이제 성안으로 들어가 보렵니다.

멋진 패방이 보이나 최근에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앞에 보이는 이 길을 걸어서 서문을 통해 우리 선조는 연경을 향해

말을 타고 또 걸었을 겁니다.

 

여기 집 한 채가 보입니다.

바로 신중국이 들어설 때 비운의 군사 지도자였던 린비아오( 임표 : 林彪)가 살았던 집이네요.

야전 사령관으로 22년간이나 홍군을 위해 싸웠지만, 마오쩌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려고 했다는

이유로 몽골로 도피 중 수상한 비행기 추락사고로 불귀의 객이 되었던 인물이라지요?

 

그러니 여기가 그가 잠시 거주했던 집일 뿐 아니라 북동쪽의

야전 사령부로도 사용되었다 합니다.

광풍처럼 살았어도...

그냥 덜수처럼 평범하게 살았어도 결국, 죽고 나면 모두 같아지나 봅니다.

 

다시 서쪽으로 걷습니다.

앞에 진사방이라는 패방이 보이고 저 멀리 멋진 건물이 하나 보입니다.

이 마을에서 진사라도 배출했나요?

장비가 죽은 랑중이라는 마을에 가면 진사는 명함도 내밀지 못합니다.

그곳에는 징비 귀신이 도와주어 진사가 아니고 장원급제자만 수 명을 배출해 진사방이 아니고

장원방이라는 패방이 있습니다. 

중국에서 패방이란 강아지와 같은 존재인가 봅니다.

어느 마을이나 들어가려면 제일 먼저 꼬리를 치며 반겨주는 강아지 말입니다.

 

지금 앞에 보이는 저 건물이 종루 겸 고루라고 하네요.

바로 산해관성 제일 중앙에 세웠습니다.

여기서 매일 일정한 시각에 종이나 북을 쳐 시간을 알렸을 겁니다.

 

산해관에는 4개의 문이 있습니다.

바로 종고루에 오르면 관외로 향하는 동문인 鎭東(진동)문, 관내로 향했는데 서문인 迎恩(영은)문,

그리고 바다로 향한 남문인 望洋(망양)문과 북문인 威遠(위원)문을 모두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올라가는 일은 중국이라 무료가 아니고 통표나 세 군데만 볼 수 있는 삼유표를 끊어야 합니다.

 

산해관성은 아주 네모 반듯합니다.

물론 성이 앉은 방향은 반듯하지는 않고 정사각형도 아니지만....

종고루 가운데 서면 사방이 일직선으로 보입니다.

그럼 여기가 산해관성의 아고라인 셈인가요?

 

종고루에 올라 바라보면 방금 걸어온 진사방이라는 패방이 보이고 그 너머

천하제일관 편액이 걸린 진동문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저 방향이 베이징에서 일을 마친 우리 선조가 고국을 향해 나가는 방향일 겁니다.

 

우리나라 연암 박지원 선생님은 이 문으로 들어오셔서 베이징으로 가셨다가

청나라 황제가 열하에 피서가셨다 해 다시 베이징에서 이리로 오셨을 것이고

다시 이문을 통해 나가셔서 열하로 가셨을 겁니다.

그때도 문표를 사서 들어오셨을까요?

 

그때가 1780년 건륭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한 조선 사절단의 수행원으로 오셨지요.

음력 5월에 서울을 떠나 6월 24일 국경을 넘었고 무더위고 고생하며 연경에 도착했지만,

어멈? 건륭은 베이징이 너무 더워 열하로 피서갔다네요.

어쩝니까?

다시 열하로 가야지요.

 

그래서 이 문을 다시 나와 열하로 갔을 겁니다.

출발해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는 데 모두 6개월이 걸렸다니 정말 힘든 여정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고 그 여정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어느 날은 하루에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너야 했고

전체 거리 2.300여 리의 길을 걸었답니다.

 

이렇게 고생하며 다녀온 길에서 보았던 모습을 조선에 돌아와 연암 골에 틀어박혀

7년 동안 26권 10책에 이르는 장대한 이야기인 열하일기가 탄생하게 되었을 겁니다.

 

여기에도 표국이 있네요.

표국이 있다는 말은 이곳이 상업적으로 무척 번성했던 곳이라는 의미일 겁니다.

왜 아니겠어요.

관외와 관내의 교역이 바로 여기서 이루어졌을 겁니다.

일종의 국가간의 무역 말입니다.

표국이란 지금의 은행과 비슷한 일을 한 곳으로 작년에 산서성 핑야오 고성에

갔을 때 본 것이지요.

내일도 산해관성을 또 구경하려고 합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이제 佳人도 이번 여행의 여정이 일자는 짧아도 거리는 연암선생님의 몇 배나 되니

1년 동안 집안에 틀어박혀 그동안 보고 들었던 중국의 모습을 열하일기처럼

사진과 글로 기록해보려 합니다.

佳人이 웃기고 있다고요?

아무리 훌륭한 요리사라고 해도 같은 이름의 음식 맛을 똑 같이 내나요?

그러나 맛은 달라도 초보요리사라도 메뉴 이름은 같이 사용할 수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