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창해(觀滄海), 조조의 詩

2012. 12. 20. 08:00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이번 여행은 중국의 제일 동쪽 끝인 진황도(秦皇島 : 친황다오)라는 곳에서 시작했습니다.

지금이야 제일 동쪽 끝이 아니지만, 사실 만리장성을 기준으로 할 때는 여기가 바로 제일 동쪽이

맞지만, 그런데 이번 여행의 테마가 삼국지 기행이라고 해 놓고 삼국지의

삼자도 나오지 않고 진행되고 있네요.

정말 웃기는 佳人입니다.

부형청죄(負荊請罪)라도 청하고 싶지만, 빠떼루로 대신하면 안 되겠습니까?

 

좌우지간, 이번 여행의 시작은 친황다오부터입니다.

천천히 중국의 동쪽 끝에서 여행을 시작하기에 삼국지에 관한 이야기는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삼국지와는 전혀 무관한 곳도 아니랍니다.

관계가 없다면 억지로 삼국지와 줄을 연결해 보렵니다.

 

지난 런던 올림픽 축구 경기에서 우리나라 올림픽 대표선수였던 박종우 선수가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세레모니를 했다고

국제축구연맹에서 A매치 두 경기 출전정지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우리 땅을 우리 땅이라는 말을 했다고 징계라니요?

이런 개 같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FIFA에 빠떼루를 주렵니다.

독도는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섬이 맞거든요~

산해관 안쪽은 중국 땅이 맞듯이...

 

진황도는 이름조차도 요란스러운 곳이네요.

진황도라는 이름은 진시황으로부터 유래했다 합니다.

동네 이름도 황제이름이라니 뭔가 다른 곳과는 많이 차이가 나나 봅니다. 

아마도 중국의 지명 중 황제 이름을 쓰는 동네는 여가가 유일한 곳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그런데 섬도 아닌 이곳을 왜 섬이라 불렀을까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외로움에 그리 불렀나요?

 

지금은 끝이 아니지만, 예전에 중국 사람이 담장을 두르고 살아갈 때는 여기가

동쪽의 끝이 분명했고 그때는 여기 문밖부터는 다른 나라의 땅이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지금의 진황도는 중국의 동쪽 끝이 아니지만, 얘들이 울타리치고 살 때

여기가 중국의 시작이고 끝인 곳이 확실합니다.

 

이름의 유래는 아마도 진시황과 불로초에 얽힌 사연에서 출발했는듯합니다.

천하 통일의 대업을 이룬 진시황은 무척 오래 살고 싶었나 봅니다.

사실, 천하를 모두 가슴에 품었는데 죽는다는 생각을 하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어요. 그쵸?

진시황의 무덤은 지하궁전이고 그 주변은 병마로 채웠으나 그도 인간인지라

죽음만은 어쩌지 못했나 봅니다.

 

진황도는 날씨가 여느 중국과 달리 온화한 곳인가 봅니다.

베이징에서도 가까운 곳이라 중국의 지도자나 부자들이 별장 하나 정도는 이곳에 지어

휴가를 즐기는 그런 곳인가 봅니다.

아마도 진시황의 불로초에 관한 이야기 속에서 불로초 냄새만이라도 맡으려고 그랬나요?

 

진시황 시절에는 이 근방 지명을 갈석(碣石)이라 불렸던 모양입니다.

지금 갈석산이라고 부르는 산이 이곳과 당산 사이에 있답니다.

그러나 중국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에 대한 논쟁이 있나 봅니다.

갈석산이 여기 하북성(河北省) 창려현(昌黎县)과 산동성(山东省) 무체현(无棣县)에도

하나 더 있다고 하니까요.

 

여기에 왔으니 삼국지와의 관련을 찾아보렵니다.

바로 갈석산이라는 곳에 조조가 다녀갔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일부의 주장을 따르면 조조가 이곳과 당산 사이에 있는

갈석산이라는 곳에 올라 시를 남겼다 합니다.

 

그 시를 누가 이곳 갈석산 중턱에 돌에다 새겨 남겨놓았다 합니다.

그때 산에 올라 조조가 글로 남긴 게 아니라 나중에 어떤 사람이 그의 시를 아마도

이곳에 새겨놓았을 것이고 그 시조차 이 또한 믿을 게 아니지만, 그래도 조조가 남긴 시라 하니

한번 읽어보고 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 시를 관창해라고 부르나 봅니다.

조조가 지었다는 관창해(觀滄海)라는 시를 한번 보고 갈까요?

관창해라는 말은 아마도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라고 해야 하겠지요?

사실 조조는 내륙에서만 주로 살았기에 바다도 제대로 못 본 촌놈일지 모릅니다.

 

東臨碣石(동림갈석) : 동쪽의 갈석산에서

以觀滄海(이관창해) : 창해를 바라보나니 (얼쑤~)

(여기서 추임새를 넣어주어야 더 맛깔납니다.)

水何澹澹(수하담담) : 바다는 얼마나 힘차게 출렁이는가. (좋고~)

 

山島竦峙(산도송치) : 섬들엔 산들이 우뚝 솟아 있네

樹木叢生(수목총생) : 수목은 빽빽이 자라고

百草豐茂(백초풍무) : 풀들은 무성하다.

 

秋風蕭瑟(추풍소슬) : 가을바람 소슬한 가운데

洪波湧起(홍파용기) : 거대한 물결이 용솟음친다. (좋지~)

 

日月之行(일월지행) : 해와 달이 마치

若出其中(약출기중) : 저 속에서 나오는 듯 (얼쑤~)

星漢燦爛(성한찬란) : 찬란한 은하수도

若出其裏(약출기리) : 저 속에서 펼쳐져 나오는 듯 (그렇지~)

幸甚至哉(행심지재) : 지극히 기쁘구나.

歌以詠志(가이영지) : 내 뜻을 노래하리. (고럼고럼~)

 

 이상이 관창해라는 조조의 시입니다.

위의 사진은 쉬창의 조승상부 담장에 만든 관창해라는 조형물입니다.

그런데 조조도 중국사람이라 뻥이 상당했던 모양입니다.

여기서 바라보았다는 바다는 바로 발해만이 아니겠어요?

발해만은 내해입니다.

 

같은 내해라도 노산 이은상님은 합포만을 바라보고 지었다는 '가고파'라는 시에서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바다." 라고 사실적이고 서정적으로 노래하셨지만,

조조는 "거대한 물결이 용솟음친다."느니 "바다는 얼마나 힘차게 출렁이는가?"라고

하니 정말 조조의 뻥이 보이지 않나요?

 

발해만은 태평양도 아니고 태풍이 올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풍랑이 없는 조용한 곳이잖아요.

위의 사진은 해신묘에서 노룡두를 바라보고 찍은 사진입니다.

모자가 바람에 날려갈 정도로 강풍이 부는 날이었지만, 파도는 그렇게 심하지 않습니다.

 

평생을 바다 한 번 보지 못했던 조조가 처음으로 바다를 보고

너무 오버한게 아닌가 생각되네요.

아니면 여기서 배를 타고 태평양까지 나갔다 와서 지은 시인가요?

어때요?

관창해라는 시를 보시고 조조의 기백이 느껴지나요?

 

그러나 여기에는 중국의 이야기가 갈석산을 두고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합니다.

이곳 갈석산은 그냥 695m의 작은 돌산으로 낙양의 어느 곳이라 하는 말도 있습니다.

그 이유로는 중국의 황제 9명이나 올랐다 하니 황제가 뻔질나게 오를 산이

이런 낮은 돌산이 아니라는 말이죠.

 

관창해라고 하는 시의 제목도 조조가 지은 게 아니라 후세 사람이 붙인 이름이기도

하고 이 시는 조조가 북방의 烏桓族(오환족)을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지었다고 알려졌습니다.

이번 여행에 삼국지에 나오는 곳도 구경하려고 하니 조조 이야기가

이 동네에 있다기에 끄적거려 보았습니다.

여행이란 이렇게 혼자 생각으로 다니는 겁니다.

 

관창해 뿐 아니라 조조가 지었다는 많은 시와 노래가 전해진다고 합니다.

그러면 조조는 문학 청년이었나요?

평소 전쟁만 하느라 정신없이 살았던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어요.

이런 조조가 문학도였다니?

 

조조는 간웅이니 뭐니 하지만, 문학적으로는 그 평가가 달라야 하지 않을까

생각되며 타고난 문학적 재능과 문학을 사랑하는 마음에 조조가 한창

세력을 뽐내던 후한의 마지막 황제였던 헌제의 시기였던 건안시기에 건안 문학이라는

새로운 문학을 꽃피웠던 모양입니다.

물론, 일부에서는 조조를 깎아내리려는 의도에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지는 않는다 합니다. 

 

이는 오직 헌제의 힘이 아니었고 조조의 힘이었을 겁니다.

이때를 문학의 황금기라고도 한다지요?

이는 건안칠자라고 하여 건안 문학을 이끈 일곱 명의 문인으로 이어지며 조조를 비롯해

그의 아들인 조비와 조식을 일컬어 삼조라 평할 정도로 문학적으로도 대단한 가문으로

생각되며 유비의 아들 유선과는 자식 농사도 달랐던 모양이에요.

 

정말, 사람 겉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되나 봅니다.

조조가 문학도였다니...

문학에 관해서 조조만한 사람 없답니다.

나중에 본격적으로 삼국지 기행에 들어가며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문학적 성향도 곁눈질하며 갈까 합니다.

채문희도 구경하고, 장비가 장합을 제압하고 흥에 겨워 석벽에 장팔사모로 썼다는

시도 보고 맨날 춘추만 읽었다는 관우도 만날 겁니다.

그런데 관창해라고 한 시의 海라는 말은 중국에서 호수에도 사용하는 단어가 아닌가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중국인도 지난 세월이 무척 힘들었나 봅니다.

어느 민족이나 옛날에는 힘들게 살았겠지만, 일반적인 어려움이 아니라

대인관계에서 말입니다.

중국인은 절대로 남이 권하는 음식을 잘 먹지 않습니다.

믿을 수 없기 때문이겠죠.

옛날부터 남을 믿지 못하고 그렇게 살았기에 그런 풍습이 지금까지 내려와 어린아이에게

사탕을 주어도 잘 받지 않고 부모의 눈치를 살핍니다.

"아해야~ 이제 사탕에는 독약 같은 것 바르지 않았단다."

여행 중에 옆자리에 앉아 함께 가면서도 먹는 음식만큼은 각자가 준비한 것만 먹고

권하지도 나누지도 않습니다.

 

중국의 우물에는 물고기를 키웁니다,

그 이유가 누가 독약을 풀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 때문입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물을 길으며 물고기가 움직여야 그 물을 길어다 먹는다 하더군요.

 

물고기 배설물이 섞인 물은 마셔도 그냥 샘물은 함부로 먹을 수 없다는 말이겠죠.

그러기에 우리나라처럼 맑은 샘물을 그냥 떠서 버들잎 몇 개 띄워 먹는 그런 멋이 없지요.

혼탁한 물을 끓여서 먹어야 하다 보니 차문화도 발달하지 않았겠어요?

그런 것도 그들 문화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