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해관성(山海關城) 천하제일관에 올라...

2012. 12. 17. 08:00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당시 우리 선조에게 중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모두 여기가 중국의 관문이라 했을 겁니다.

물론 중국사람도 그리 대답했을 것이고요.

여기부터 중국의 통제가 이루어졌고 국경으로 생각했을 게 아니겠어요?

 

여기 문 앞에만 서면 중국에 다 왔다고 생각했을 곳..

오늘 佳人은 그 문으로 들어갈 생각입니다.

함께 들어갈까요?

 

 

우리의 선조이신 실학자 홍대용 님은 1765년 11월 27일 제법 쌀쌀한 초겨울에

압록강을 건너 이곳에 도착하셨습니다.

님은 마음속으로부터 활화산처럼 솟구치는 격정의 감회를 이기지 못해

지금 佳人이 서 있는 천하제일문 앞에서 한 곡조 미친 노래(狂歌)를 지어

이렇게 노래했다 합니다.

 

간밤에 꿈을 꾸니 요동(遼東) 들판 날아 건너

산해관(山海關) 잠긴 문을 한 손으로 밀치도다

망해정(望海亭) 제일층에 취후(醉後)에 높이 앉아

갈석산(碣石山) 발로 박차 발해를 마신 후에

진시황 미친 뜻을 칼 짚고 웃었더니

오늘날 초초 행색 뉘 탓이라 하리오.
(을병연행록 중에서)

 

 

가고 오고 석 달.. 그리고 베이징에 머무르는 데만 두 달이 걸렸으니

이렇게 다섯 달을 보내며 고생하며 떠난 여행길이었지요.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기 시작해 떠났지만, 돌아오는 길은 눈 녹은 춘삼월 진흙탕

길이었으니 행색은 초췌해도 그 뜻은 어느 누가 막으리오.

오늘 대한민국의 후손 佳人이 이렇게 남루한 배낭여행자 모습으로 산해관 문 앞에 서니

그때 노래가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그 노래를 따라 부르고 싶습니다.

산해관 문을 한 손으로 밀치지 않고 발로 박차고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미 문은 열려 있군요.

 

 

이제 천하제일관 위로 올라가 보렵니다.

왜?

올라가는 문표를 거금을 내고 끊었으니까!

말을 타고도 성벽 위로 오르내릴 수 있도록 경사를 완만히 만들었습니다.

 

 

지금 위의 사진이 동북쪽 방향으로 우리나라 선조는 모두 오른쪽 아래 보이는

옹성으로 들어오는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와 천하제일관문을 통과해 베이징으로 향했을

것이니 바로 여기가 중원으로 들어가는 첫 입구가 맞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 관문을 기점으로 중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입관한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리고 이 문밖 동북지역을 관외 또는 관동이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우리가 관동주와 만주 일대에 주둔했던 일본 육군을 관동군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이 문을 기점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역사는 관내의 역사지 관할지역 밖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도 관할지역이 아니라고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것을 자기 일인 양 간섭하고 덤빈다면 오지랖 넓다고 핀잔받습니다.

 

 

관내라고 부르는 성안의 모습입니다.

큰 패방이 서 있고 그 앞에 문표를 산 사람과 사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고

입장할 수 있도록 바리케이드를 쳐놓았습니다.

그러니 지금 사진 찍는 관문 위로 올라오지 않을 분은 저기서 바라보아만 보아도 충분합니다.

저곳에서 보아도 다 보입니다.

 

 

산해관이라는 이름도 그 말의 어원은 발해만을 바라보며 북쪽에 우뚝 솟은 기연산의

山 자와 발해만의 海 자를 빌려 지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산과 바다는 세상의

시작과 끝이며 천하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잖아요.

그런 이름을 이곳에 사용한 이유는 중국 사람의 마음속에 중국이라는 나라의 시작과

끝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을 것 같습니다.

 

 

마오쩌둥이 쓴 글인가 봅니다.

"장성에 오르지 않으면 진정한 사나이가 아니다. (不到長城非好漢)"라는 말인가 봅니다.

요즈음 역사 왜곡을 하기 위해 동북공정이니 뭐니 하지만, 그것은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우매하고 천박한 행동입니다.

자꾸 없던 역사도 창조하는 게 중국의 힘은 아니잖아요?

 

만약, 자꾸 그러면 그것은 잡놈이나 하는 어리석은 짓이 될 겁니다.

제발 대국답게 크고 열린 마음으로 이웃으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장성에 오른 사람만이 사내대장부가 아니라 사실을 그대로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도 사내대장부이걸랑요.

 

 

천하제일관은 산해관성(山海關城)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지금의 성벽과 관문은

명나라 홍무 10년(기원전 1381년)에 세워진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이며 중국의

기점으로 따라서 중원으로는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을 겁니다.

 

천하제일관의 성곽은 그 기세가 웅장하여 산해관성의 동문의 역할을 하였으며

진동루(鎭東樓) 혹은 속칭 전루(箭樓)라 불렀답니다.

명나라 때 산해위라는 관청을 설치하고 나서 이 문을 산해관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하며 한나라 때는 임유관이라 불렀다 하네요.

 

산해관성에는 4개의 문이 있는데 관외로 향하는 동문은 鎭東(진동)문이라 부르고,

서문은 관내로 향했는데 외국 사신을 맞이한다는 의미로 迎恩(영은)문이라 부르고,

남문은 바다로 향했는데 望洋(망양)문이 부르고 ,

북문은 北疆(북강)에 접해 있는데 威遠(위원)문이라 부른답니다.

 

 

진동루에는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천하제일관은 화북지방에서 동북지방으로 통하는 관문역할을 하였으며,

산해관성의 상징적인 건축물로 600여 년 간 아주 혼란스러웠던 역사의 산증거이기도

하니 이런 확고부동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중국의 역사는 바로 산해관 안에서 만의

역사이고 문밖에 나서서 생긴 역사는 바로 우리와 만주의 역사가 아니겠어요?

자꾸 고무줄 늘이듯 늘렸다 줄였다 하면 빠떼루 들어갑니다.

 

자~ 여러분도 함께 보세요.

여기부터 안으로 들어가면 중국이 맞잖아요.

천하제일관이라...

이 말의 의미는 시작이라는 말입니다.

중국의 시작이라는 관문이라는 말이기도 하잖아요.

중국과 중국이 아닌 곳을 구분하는 관문 말입니다.

 

 

현판의 글씨가 그리 솜씨가 썩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곳 천하제일관의 현판은 3가지 특이점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第 자가 잘못 쓰여 있는데 원래 第 자 위에는 풀 초(艸) 변이 아니라,
대나무 죽(竹)이 있어야 하는데 글자의 균형을 잡으려고 일부러 풀 초 자를 썼다고 합니다.

중국을 다니다 보면 현판 글자 가지고도 많은 말을 만들어 냅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웃자고 하는 이야기겠지만....

 

 

둘째, 글쓴이의 낙관이 없답니다.
이 글씨를 쓴 사람은 명(明)대 최고의 서예가 소현이란 사람인데 현판을 쓸 때 다른 글씨는

다 썼는데 한 일(一) 자는 아무리 써도 본인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 바라보면 사실 어느 글자나 佳人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음식점에 갔는데 종업원이 식탁을 걸레로 한번 쓱~ 닦았는데 그 흔적이

마음에 쏙 들어 그대로 흉내 내 한일자 자리에 글을 썼다고 합니다.

어멈? 명대의 최고 서예가가 음식점 종업원보다도 못하다는 말이 아니겠어요? 나 원 참!!!

중국이라는 나라는 식당 종업원까지 글을 잘 쓰나 봅니다.

그러나 천하제일관이라는 이 글씨는 자기 혼자서 다 쓴 게 아니라며 낙관을 찍지 않았다고

하며 어느 분은 빗자루로 마당을 쓰는 모습을 보고 흉내 냈다고 하고...

 

성문 위에 걸린 편액은 복제품이라네요.

원래의 글은 위의 사진에 보이는 성루 안에 보관된 것이라 합니다.

 

 

셋째, 글씨마다 크기가 다르다네요.

關이 가장 크고 第가 가장 작습니다.

그러나 글자 하나의 크기가 1.6m가 넘는다 합니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누각이 왼쪽으로 약간 낮게 경사가 진 탓에 건물이 삐딱하게

지어졌는데, 글씨 크기를 달리해서 건물이 똑바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글자 크기를 잘못 써도 이렇게 꿈보다 해몽이 좋으니 역시 중국다운 해석이네요.

위의 사진으로도 기울어진 모습을 확인하실 수 있지요?

 

 

청룡언월도?

언제 관우도 여기 관광 왔나요?

중국 여행을 하다 보면 관광지마다 의전용으로 가장 많이 진열된 것이

바로 관우가 사용했다는 청룡언월도일 겁니다.

관우도 알지 못하는 청룡언월도일 텐데...

들지도 못하는 무거운 칼을 순전히 과시하기 위해 만든 것이지 싶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우리가 역사적으로 보아도 아무리 철옹성처럼 튼튼한 성을 지었더라도,

또 강대한 국가였더라도 무너지는 일은 외부의 침략보다 내부의 문제로

서서히 무너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 산해관은 대명제국이 무너지는 바로 그 순간에 내부에서 일어난 이자성의 난으로

저절로 열리다시피 하며 만주족의 청나라의 군대가 보무당당하게 입성한 곳이지요.

그전까지는 문을 지키던 오삼계에 의해 여러 차례 성공적으로

외부의 공격을 막아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