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가빴던 1644년 어느 봄날

2012. 12. 19. 08:00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아~ 오삼계!

 

오징어와 삼겹살과 닭고기의 절묘한 만남으로 맛을 낸 음식이름?

왜 오삼계라는 이름만 들으면 자꾸 음식 생각이 날까요?

佳人이 속이 허해서 그럴까요?

 

산해관 이야기를 하며 오삼계라는 사람을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1644년 3월 어느 봄날 오삼계는 운명이라는 커다란 시련 앞에 직면했습니다.

그에게는 황제의 길로 나아가는 길이 있었고, 그냥 변방의 그런 평범한 장수로 삶을 마감하는 길도

그의 앞에 놓여있었습니다.  

 

산해관성 안을 기웃거리며 다니다 위의 사진처럼 어느 건물에 붙인 현판 하나가 눈이 보이네요.

아문결부당이자성(我們决不當李自成)이라고 썼군요.

아마도 예전 오삼계와 이자성 그리고 애신각라 다이곤인 도르곤과의 얽힌 이야기가 있는 곳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중원에서 명이 쇠퇴하고 청으로 손바뀜하는 숨 가빴던 그 시절에 이 세 사람은 서로 애증의 관계였을 겁니다.

세 사람 모두가 중국의 황제가 될 수 있었고 모두 그냥 아침 이슬처럼 사라질 수 있는 그런 삶이었네요.

 

그러면 당시 숨 가빴던 그 시절로 우리 함께 잠시 가볼까요?

1644년 3월 어느 따뜻한 봄날. 그해는 유난히도 따뜻했습니다.

오삼계는 북경이 이자성이 이끈 농민군의 위협에 백척간두에 처했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반란군은 이미 저물기 시작한 명나라의 수도인 연경으로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목줄을 잡혀 헐떡거리며 다급한 황제는 당시에 가장 많은 군사를 거느렸고 강력한 병력으로 조직되어

여기 산해관성에 주둔하고 있던 오삼계에게 북경으로 군사를 불러들입니다.

 

이미 이자성은 황제에 등을 돌린 민초의 협조로 큰 저항 없이 만리장성을 열고 자금성 앞에 도착합니다.

그렇게 굳건히 닫혀있던 자금성의 모든 문이 일시에 열리고 자금성을 관리하던 환관이 앞다투어

맨발로 이자성을 마중합니다.

자금성의 주인장은 방금 환관 한 사람만 거느리고 북문으로 빠져나가 문밖에 있는 매산이라는 경산공원에 올라

이미 여기저기 불타오르는 자금성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자금성이 불타며 이제 황제는 자신의 삶과 종묘사직이 끝이 났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갑지하고 환관에게 위의

사진에 보이는 나무에 밧줄을 묶어 달라고 부탁하고 그 밧줄에 목을 매고 세상을 등져버립니다.

이때 황제의 모습은 왼발은 맨발이었고 오른발에는 황제의 붉은 신발이 신겨져 있었고 머리에 쓰던 관은

어디서 흘렸는지 없었다 합니다.

이렇게 한족의 나라인 명나라는 1368년 주원장이 나라를 세운 이래 276년 만에 폐업 정리하고

역사책에만 남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날이 1644년 3월 24일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오삼계는 황제의 부름에 군사를 이끌고 베이징을 향해 진격하며 이자성의 농민군과 교전에 들어가고...

그러나 사기가 오른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군은 용감히 오삼계의 정부군에 대항하는 도중

오삼계는 자신에게 명을 내린 황제가 이미 나무에 목을 매고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바로 위에 보이는 나무가 황제가 목을 맨 그 나무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제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 헷갈리는 시간이 되었지요.

명분도 없고 목표도 희미해집니다.

이자성은 오삼계에게 황제도 없는 나라는 이미 사라졌고 대순(大順)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새로운 황제인

자기의 세상이 되었으니 합류할 것을 권고합니다.

 

갈등의 시간이 흐릅니다.

이제 오삼계의 고민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오삼계는 새로운 질서에 동참하려는 생각으로 기울어질 즈음

베이징에 있던 진원원이라는 애첩의 소식을 접합니다.

 

이자성의 수하 장수 중 한 사람인 유종민이란 자가 자금성을 약탈하는 것만으로 부족해 베이징에 머물던

오삼계의 아버지 오양과 그 가족을 포로로 잡고 애첩 진원원까지 취했다는 소식이 오삼계의 귀에 들어옵니다.

진원원은 미인의 고장인 쑤저우 출신으로 당대 최고의 미인이라고 알려진 여인으로 오삼계가 무척 아끼

그런 애첩이었답니다.

 

젠장, 여자는 남자를 화나게 하는 불같은 존재인가 봅니다.

오삼계의 머리가 돌아 삐~

화딱지가 나 눈에 뵈는 게 없어~

 

에라 모르겠다. 

이판사판 공사판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애첩의 복수를 갚겠다고 사내는 이이제이(以夷制夷)를 결정합니다.

이이제이란 이놈 불러다 저놈 팬다는 말인가요?

오삼계는 산해관의 문을 활짝 열어 그동안 호시탐탐 중원으로 내려오려고 눈독을 진뜩 들인

만주족 군사를 불러들여 베이징으로 앞장서 갑니다.

 

"자성아 내가 뭐랬니? 내가 뭐랬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임자 있는 여자는 건드리지 말랬지? 

여자의 한은 오뉴월에도 서리를 내린다 했지만, 남자의 투기는 춘삼월에도 함박눈을 퍼붓거든?"

 

오삼계는 이곳의 문을 활짝 열고 청나라군과 합세하여 베이징으로 밀고 들어가 이자성을 몰아내니

이자성의 꿈은 허망한 물거품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사실, 이자성은 처음부터 그런 어리숙한 사내는 아니었다 합니다.

 명나라 관리 출신으로 지방에 농민군이 일어나자 썩어빠진 세상을 구하고자 반란군에 가담합니다.

그는 먹물께나 많이 먹었고 인품이나 지도력까지 겸비한 아주 우수한 군사지도자였다 합니다.

 

그가 기의 하자 주변의 많은 인물이 모여들었고 휘하 장졸에게 민간 약탈을 금하고 탐관오리의 재산을 몰수해

가난한 농민에게 나누어주었다 합니다.

이렇게 사다리를 올라가듯 하나씩 이루어가니 중앙정부인 베이징의 황제는 개털이 되어가지요.

이미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온 지역에서 새로운 관제를 만들어 능력 있는 자에게 관직을 주고

게다가 새로운 화폐마저 만들어 통용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되면 원래 지방정권으로 만족할 수 없지요.

그래서 당시 수도인 연경으로 군사를 이끌고 들어온 게 1644년 봄날이었습니다.

이미 민심은 연경의 황제를 떠났기에 싸움 한번 변변히 하지 않고 무혈입성하듯 연경으로 들어와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도 수하장수의 오만한 행동을 억제하지 못했습니다.

 

자금성마저 부패한 환관에 의해 저절로 자동문처럼 열렸다 하니...

결국, 이자성은 오삼계와 오삼계가 쓸어들인 만주족에 의해 전쟁에서 패하고 후베이성으로 도망을 가게 되고

결국, 마지막에는 그곳 주민에 의해 살해당함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합니다.

 

이자성은 자금성에 들이닥쳐 점령했지만, 새 나라를 여는 일에는 부족한 친구였나 봅니다.

하늘이 점지하지 않았나 봅니다.

원래 파괴란 새로운 창조를 위한 파괴여야 아름답습니다.

그냥 부정하고 부수기만 하는 파괴는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인도합니다.

 

이자성은 대책 없는 친구가 맞습니다.

적어도 천하를 꿈꾸는 자는 기본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일에는 절대로 혼자만의 능력으로 여는 게 아닌가 봅니다.

 

오삼계는 만주족을 끌고 결국, 이자성의 난을 제압하고 난을 제압한 영웅이 되었지만,

죽 쒀서 개에게 준 꼴이 되고 맙니다.

만주족은 예전부터 연경을 노렸기에 바로 여기다 이삿짐을 풀고 주인행세에 들어갑니다.

명나라의 유신들은 오삼계에게 다시 명을 재건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오삼계는 이미 세상의 기운이 청나라에

기운 것을 감지하고 오히려 이런 세력을 제압하는데 앞장섭니다.

 

1657년 청나라에서 내려준 고위관직인 평서대장군직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남부에서 아직도 준동하는

반청 세력을 도륙하는 일에 앞장섭니다.

아는 놈이 더 무섭다고...

이렇게 하나씩 제압하며 생긴 영토는 결국, 오삼계에게 황제의 꿈을 심어줍니다.

 

윈난성과 구이저우성을 기반으로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세금도 별도로 징수합니다.

간이 배 밖에 나오면 황제라 칭할 수 있고 나라 이름도 주나라라고 정했습니다.

진인사대천명...

이제 하늘의 결정만 남았습니다.

 

뵈는 게 없으면 누구나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삼계의 운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오삼계의 기는 이렇게 조용히 새로운 청의 기운에 눌려 아침 이슬처럼 서서히 사라졌다고 합니다.

 

위의 사진은 도르곤입니다.

그는 1644년 오삼계와 함께 만주군을 이끌고 베이징으로 보무당당하게 입성하고 만주족이 중원의 나라인

명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유일한 정권임을 만천하에 선포한 사람입니다.

사실 이때는 아무나 먼저 들어가 깃발을 꼽으면 주인이 되는 세상이었지요.

그는 1650년 12월 31일 만리장성 근처로 사냥을 나갔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 후 그의 죄명이 밝혀지고 역모를 꾀해 황제 찬탈을 계획했다는 모함을 받고 부관참시당하는

비운의 사나이가 되었습니다.

건륭제 때 복권은 되었지만...

도르곤은 누르하치의 14번째 아들이라 합니다.

그도 황제의 꿈을 꾸었지만, 황제가 되지 못하고 청나라 최초의 섭정으로 끝낸 불운한 황태자였답니다.

 

 죽은 후 황제에 추숭되었다 하는데 죽고 난 후 황제가 아니라 천자가 된 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러나 그도 한때는 하늘이 황제의 문을 조금 보여준 일이 생겼습니다.

이복형인 태종이 급사하자 황제에 오르려고 시도했지만, 결국, 반대에 부딪혀 미수에 그친 불운한 사내였습니다.

젠장 간만 보고 말았습니다.

아니군요?

간도 보지 못하고 입맛만 다신 셈이군요.

황제는 되지 못하고 어린 황제가 즉위하자 결국, 섭정으로 만족하고 마는 팔자가 되었습니다.

 

결국 위에 출연한 세 사람은 모두 황제가 될 수 있었던 사람이지만, 황제의 길로 들어가는 문을 먼 발치에서

만 보고 말았습니다.

젠장, 메뉴판만 바라보고 식사는커녕 간도 보지 못한 셈입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입맛을 다신 후 간만 보았다고 보아야죠?

 

진원원은 미인의 고장인 쑤저우 출신으로 당대 최고의 미인이라고 알려졌으며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이야기가 있습니다.

원래 가난한 노점상의 딸로 태어나 7살 때 꼴랑 은전 두 냥에 기방 기녀로 팔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워낙 타고난 끼가 출중해 엔터테이너로 12세에 이미 더는 배울 게 없어 하산의 경지에 올랐답니다.

 

어느 날 숭정제의 즐거움을 위해 전국적으로 기예에 뛰어난 여자를 선발하는 자리에 진원원도 당당하게

우수한 실력으로 발탁되어 황궁으로 입성했으나 너무 음이 강해 황제의 몸을 다치게 할 수 있다는

 어의의 의견에 따라 며칠만에 탈락하는 행운(?)을 맛보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진원원에게는 새로운 운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젠장, 16살 먹은 아이가 무슨? 음이고 양입니까?

어의라는 사람은 16살 먹은 어린아이의 무엇을 검사하고 그런 처방을 내린 겁니까?

그러나 진원원은 이미 2년 전부터 기방생활을 하며 산전, 수전, 공중전 화생방전그리고 안방전까지

두루 섭렵하여 어린 나이지만, 달인의 경지에 올랐다 합니다.

 

결국, 진원원은 변방에서 고생하는 오삼계의 아버지 오양에게 하사품인 선물로 보내지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말이죠.

오양이 진원원을 보는 순간 갑자기 다리가 풀리고 눈이 몽롱해지며 자신감이 없어져...

정말 어의가 신통방통...

 

그러나 그 옆에 진원원을 바라보던 아들놈의 눈빛이 반짝거리더랍니다.

그래서 오양은 아들 오삼계에게

"?"라고 묻습니다.

아들은 "!"라고 답을 합니다.

위의 이야기는 이버지 오양과 아들 오삼계의 대화내용입니다.

 

佳人이 중국어를 몰라 정확하게 전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유추해보면

"어때? 너 할래?"

"네! 주신다면 감사하게 받지요!" 

바로 이런 말이 오고 갔을 것으로 유추합니다.

 

그래서 진원원이 돌고 돌아 오삼계의 애첩이 되었고 역사의 한가운데 던져진 그때 그 사람이었답니다.

이런 여인을 이자성의 수하가 또 자기 것으로 취했으니....

아무리 돌고 도는 여자라 해도 내 것이 아닌 것은 절대로 욕심부리지 맙시다.

설령, 그게 길거리에 떨어져 있더라도...

 

"자성아 내가 뭐랬니? 내가 뭐랬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임자 있는 여자는 건드리지 말랬지?

여자의 한은 오뉴월에도 서리를 내린다 했지만, 남자의 성질도 춘삼월에도 함박눈을 퍼붓거든?"

오삼계는 이곳의 문을 활짝 열고 청나라군과 합세하여 베이징으로 밀고 들어가 이자성을 몰아내니

이자성의 꿈을 물거품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이자성은 천하의 꾀주머니 제갈공명도 이루지 못한 천하를 움켜쥘 수 있었지만, 그만 작은 일에 악수를 두었습니다.

조조는 전쟁터로 나갈 때 군사가 보리밭 옆으로 지날 때 보리밭도 밟지 못하게 했지요.

농민의 마음을 알기에 만약, 보리밭을 밟으면 참형에 처한다고 공표를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탄 말이 갑자기 놀라 뛰어오르며 보리밭 한 귀퉁이를 밟자 군법 담당 장수를 불러 그 죄를 묻자

조조는 그 법에 저촉받지 않는다 하니 자신의 머리를 댕강 자르는 대신

그럼 머리카락이라도 자르겠다고 하여 잘랐다지요?

 

그런데 이자성은 그런 지혜가 없었나 봅니다.

물론, 조조가 자기 머리를 자를 것도 않으면서 그 죄를 묻는 일은 분명 생쇼를 한 게 맞습니다.

그 생쇼의 현장을 그린 그림이 바로 위의 사진에 있습니다.

법은 존귀한 사람에게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의미인 "법불가어존(法不可於尊)"이라는 그림을 찍은 사진입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아무리 튼튼하고 단단하게 잠긴 곳이더라도 여자 하나 때문에 간단히 활짝 열렸습니다.

세상에 열리지 않는 문은 하나도 없습니다.

문을 열라고 만들었으니까요.

두드려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다.

만약 열리지 않으면 오삼계의 미인계를 써라.

그래도 열리지 않으면 뿌셔 뿌셔~

 

오삼계가 지킬 때는 나라와 나라를 가르고 관내와 관외를 구분하고 너와 나를 나누고

드나드는 사람도 구분하였겠지만,

청나라가 중원의 주인이 된 후는 여기가 그냥 평범한 성 안팎 동네를 구분하는 선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나날이 지나갔지만, 이곳은 마치 빛바랜 사진을 들여다 보듯

옛날에 있었던 일들이 하나씩 활동사진처럼 보여주는군요.

유적 여행이란 이렇게 현실과 상상 속으로 시간여행을 하기에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숨 가빴던 1644년 어느 봄날

베이징의 이자성과 산해관의 오삼계, 그리고 만주족의 도르곤

세 사람은 서로 머리 굴리느라 숨 가빴을 겁니다.

오삼계가 진원원과 숨 가쁜게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