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장의 만남

2013. 3. 9. 08:00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오늘은 관제묘에 왔으니 유비, 관우 그리고 장비가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가 기웃거려보렵니다.

삼국지 기행의 시작은 원래 도원결의를 했다는 탁현 누상촌부터 시작해야 하지만,

그렇게 다니다 보면 1년을 다녀도 다 돌아보지 못할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차도 없이 공공교통만 이용해 다니며 시골을 찾아간다는 게 우리 부부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고 교통편이 불편한 곳은 그냥 건너뛰고 갑니다.

그리고 탁현 누상촌에서의 일은 연의에서 만들어진 허구로 도원결의란

있지도 않은 사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비록, 늦었지만, 이야기는 유관장의 만남서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렸을 때 삼국지를 읽다 보니 어느새 세뇌되어 나도 모르게 유관장이 우리 편이고

다른 사람은 모두 적처럼 생각된 자신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만큼 삼국지연의는 나도 모르게 한족의 생각에 동화되어 나와 적을 편 가르기 하는데

빨려 들어가 있더군요.

 

사실 유관장이 만나 천하를 운운할 때는 불행한 시기가 도래했다는 말입니다.

시정잡배가 모여 나라를 걱정한다면 그 나라가 사실 바람 앞에 등불이잖아요.

나라님이 민초를 걱정해야지 민초가 나라님을 걱정한다면 말입니다.

 

짚신 팔러 다니던 유비, 돼지고기에 술을 팔던 장비, 사람을 죽이고 신분세탁을 하며

누상촌에 스며들어 녹두 장사하던 관우...

이런 부류의 사람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오피니언 리더나 엘리트 집단은 아니지요.

속된 말로 시정잡배라고 해야 할 겁니다.

유비의 신분 운운한다면 우리 민족도 모두 단군의 후손으로 같은 집안출신이 아닙니까?

佳人도 진골은 아니더라도 성골을 되걸랑요.

 

이미 한나라 말에 황건적이 출몰할 때는 유방이 세운 한나라라는 나라는 이미 그 명을 다했을

때로 황실 안팎으로 뿌리는 모두 썩었고 기둥만 간신히 부축하고 있는 셈이라

언제든지 넘어질 시기였지요.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쌔, 곶 됴코 여름 하나니.

새미 기픈 므른 가마래 아니 그츨쌔, 내히 이러 바라래 가나니."

내가 뭐랬니?

뿌리가 썩은 나무는 그 수명을 다해 누가 건드리지 않아도

제풀에 자빠지게 마련이라 하지 않았니?

 

그 기둥을 잠시 받치고 있었던 세력이 십상시도 있었고 대장군이라는 하진도 있고 동탁도 조조도

있었는데 위의 벽화그림이 바로 십상시를 그린 그림입니다.

어느 나라나 그 나라의 운명이 다할 때는 환관이 먼저 득세하게 마련입니다.

환관이 힘을 쓴다는 말은 황제의 힘이 천하에 미치기는커녕 황궁 안에도

미치지 못하고 방안에서만 미칠 때입니다.

이미 십상시를 중심으로 천하는 돌아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하고 난 후 2세 황제 호해 때 조고라는 환관이

득세했기에 진나라가 절단났지요.

 

이미 십상시가 권력을 쥐고 황제를 좌지우지할 때부터 황제는 법정관리에 들어간 겁니다.

위의 벽화사진을 보시면 동탁의 풍채가 이미 황제를 능가하고도 남습니다.

왜?

폼 나잖아요.

그때 황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십상시의 말에 따라 대신 옥쇄로 도장 찍는 찍돌이 역할과

삼시 세끼 빠지지 않고 챙겨먹고 밤에는 주색잡기만 하면 황제의 역할은 끝났으니까요.

 

이미 한 번 땅바닥에 구른 황제의 권위와 명예는 지나가는 개도 웃고 지나칩니다.

어디 황제만 그랬나요?

황실의 황후도 개털이지요.

황궁을 떠나라 하면 떠나야 하고 자결하라면 목숨을 끊어야 하는 신세가 되잖아요.

그렇다고 누가 불쌍하다고 목놓아 울어줄 사람조차 없습니다.

가족이 울어준다 하더라도 누가 들을까 소리 죽여가며 울어야 합니다.

 

민초가 농사짓던 농기구를 버리고 창칼로 바꿔 들고 나올 때는 황제는 스스로 황실의 폐업을

생각해야 하며 법정관리 들어간다고 하진에게 기대고 동탁을 부르고 조조에 기대 보아야

그놈이 더 도둑놈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지요.

 

그런데 유비는?

아니라고 시작했지만, 결국, 자기도 황제 자리에 오르고 아들까지 공명에 보살펴달라고 했으니

어느 놈 믿을 맨 하나도 없습니다.

유비는 한실을 구한다고 나섰지만, 결국 자기가 황제에 오르고 아들까지 황제에 올렸으니까요.

 

정말 한실을 생각하고 챙겼다면 유비는 수소문하여 조비에게 쫓겨나 야인생활에 들어가

헌제를 불러다 촉한에서 황제로 앉히거나 죽었으니 가장 가까운 순서대로 수소문해

황제에 올려야지 진정성을 인정받지 않겠어요?

그런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불과 1년도 채우지 않고 여섯 달 만에 황제 자리에 냉큼

올랐는데 황제 즉위식에 사용된 대례대를 짓는 데만도 여섯 달이 걸렸을 겁니다.

 

아들까지 대를 이어 호의호식하겠다고 공명까지 먼 길을 불러 백제성에서 가쁜 숨을

헐떡이며 마지막 숨을 들이마시면서도 어리삐리우스 유선을 부탁할 정신은 있고

어디 헌제를 찾아 황제의 보위에 앉혀달라는 그런 노력이라도 했나요?

헌제를 찾지 못하면 가장 가까운 황족이라도 모셔야지요.

 

아! 그렇군요.

자기도 먼 황족이라고요?

그러면 전주 이씨라고 모두 조선의 왕위를 이을 수 있는 정통 후계자입니까?

 

혹시 삼국지 기행에 관심 있는 분은 참고하시어 탁현부터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곳에 가면 유비는 물론 장비도 만날 수 있는 곳이지요.

두 사람의 고향이 탁현이었으니까요.

 

지금 기찻길을 사이로 두 사람을 모신 각각의 사당이 탁주에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물론 관우의 흔적도 있지만, 관우는 자기 고향에서 사람을 죽이고 도망자가 되어

이름도 바꾸고 신분 세탁도 한 후 아주 다른 사람 행세를 하며 탁현에 숨어들었다 하니...

 

탁현에서의 유비는 그야말로 그저 그런 신세였다고 하더군요.

돗자리를 만들고 짚신을 만들어 팔던 평범한 그런 촌부에 불과했던 모양입니다.

늘상 차고 다니던 보검의 의미도 모르고 엿이나 바꿔먹으려는 그런 생각으로 살았던

사람으로 만약에 장비와 관우를 만나지 못했다면 유비는 그냥 돗자리나 만들어 파는

그런 시골 촌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고 공명을 삼고초려로 모시지 않았다면

유관장 셋은 동네 잡배로 끝났을 것입니다.

당시 그 지방은 물이 귀해 늘 먼지만 풀풀 날리는 그런 지방으로

먹고사는 문제는 아주 심각했던 모양입니다.

 

지금 탁주에 가면 천하제일주(天下第一州)라 쓰인 패루(牌樓)가 제일 먼저 반긴다 합니다.

그 패루에 쓴 글은 청나라 건륭제가 직접 그곳에 들려 쓴 글로 알려졌습니다.

그러기에 원래 삼국지 기행을 제대로 하려면 탁주에 들려 도원결의 한 유씨들의

집성촌인 누상묘촌(樓桑廟村)부터 들려야 하고 뽕나무도 보아야 하지만,

어디 그 뽕나무가 지금까지 남아있겠어요?

 

삼국지란 사실 한나라의 정통성을 칭송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삼국지라는 이야기는 한족의 시작이라는 한나라 이야기였으니까요.

오랜 세월 주로 한족의 많은 사람이 한나라를 그리워하며 이야기한 내용을 소설로 쓰며

나관중의 이야기책이 가장 크게 베스트 셀러가 되며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을 겁니다.

 

그러기에 삼국지연의란 of the 한족, by the 한족, for the 한족 소설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지

싶고 어린 시절 우리에게 친숙했던 장기판도 한나라와 초나라의 싸움을

상징하는 게 아니겠어요?

이미 우리 삶 속에 알게 모르게 삼국지가 추구하는 한실의 정통성이 이미 들어와

꿈틀거리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처음 유비가 황건적 토벌에 공을 세우고 고향에서 멀지 않은 안희현이라는 마을에 현령으로 일할

 중앙정부에서 내려온 감찰관인 독우가 뇌물을 요구하자 장비가 그놈을 나무에 묶어놓고

회초리로 때린 이야기가 있습니다.

위의 사진을 보니 회초리가 아니고 몽둥이였나 봅니다.

아주 흠씬 두들겨 패주고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해 나중에 풀어줍니다.

 

이게 어디 그냥 끝날 일입니다.

그 후 어찌 되었을까요?

어찌 되긴요.

튀어야지요.

누가?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이 말입니다.

이 또한 장비의 격분 증후군을 이기지 못하고 저지른 일입니다.

 

지금도 탁주에 가면 기찻길을 사이에 두고 유비와 장비의 집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고

하기에 여기서 세 사람이 처음 만나는 장면을 곁눈질하고 갑니다.

물론, 삼국지에 나오는 이야기마다 모두 다릅니다.

 

탁현 성 외곽의 도장이라는 곳에 술과 돼지고기를 파는 장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단지 장비는 그런 장사하 일이 성에 차지 않아 천하의 호걸들과 사귀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뭐라고 해야 하나... 겉멋만 잔뜩 들어 주제 파악도 하지 못하고 살았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물론, 이 말은 장비 예찬가라고 봐야 합니다.

푼수라는 말이기도 하고요.

 

장비는 항상 문 앞 우물에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넣어두고는 천근이나 나가는 커다란 돌로

뚜껑을 만들어 덮어놓고 그 위에 이렇게 글을 써 두었답니다.

"이 돌을 치우는 자는 고기를 가져가도 좋으며, 물론, 돈은 필요 없다."

자기 힘자랑을 하기 위한 이야기입니다.

소설이 만든 이야기지만, 사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이야기지요.

 

그러던 어느 날, 장비가 집을 비운 사이에 대추처럼 붉은 얼굴을 한 사내가 장비의 우물에 와

그 글을 읽어 보고는 천 근이나 나가는 그 큰 돌을 가볍게 들어 올리고

 고기를 가지고 떠나 버렸다네요.

집에 돌아온 장비는 고기가 사라진 이야기를 듣고 곧장 그 사내를 찾아 시장에 달려갔답니다.

역시 대추처럼 붉은 얼굴을 한 남자가 녹두를 팔고 있었다네요.

이렇게 두 사람의 첫 만남을 설명했네요.

 

장비는 갑자기 이 남자의 앞에 서서, 녹두를 손으로 움켜쥐고는 가루로 내어 버렸답니다.

녹두를 손으로 움켜쥐어 가루를 냈다는 말은 무슨 장비의 손이 맷돌도 아니고...

사과나 뭐 참외라면 가능한 이야기지만, 작은 녹두를 움켜쥐어 가루를 냈다면 장비 손은

믹서기보다도 더 성능이 좋은 슈퍼 맷돌이 틀림없나 봅니다.

 

관우는 웬 시커먼스같은 도둑놈처럼 생긴 험상궂은 사내가 다짜고짜로 자기 가게의 녹두를

손으로 움켜쥐어 가루를 내는 것을 보고 화가 났겠지요.

두 사람은 서로 처음에는 말다툼하다가 급기야는 서로 붙들고 싸웠지만,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답니다.

이런 곳에서 힘자랑하며 싸움박질하는 사람을 우리는 시정잡배와 같다고 하지 않나요?

 

이런 두 사람 앞에 짚신이나 팔며 입에 풀칠하던 한 사내가 나타났답니다.

네.. 바로 유비라고 하는 사람이죠.

그는 두 사람의 사이를 헤치고 들어와서는 한마디 합니다.

 

"모름지기 사내란 나라를 위해서 힘을 써야 하는 법인데, 이런 쓸데없는 곳에서

무슨 싸움이란 말인가"하며 일침을 놓았답니다.

저잣거리에서 싸우는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유비를 멋지게 보이기 위한 작가의 꾸며낸

말로 이렇게 세 사람은 저잣거리에서 싸우며 만나게 되었네요.

 

여기서 짚신 장수는 바로 한나라 황실의 후손인 유비이고, 대추처럼 붉은 얼굴의 남자는

관우로 본래 산서성 사람이나, 자기 고을의 탐관오리를 죽이고 이곳까지

숨어 흘러들어와 녹두를 팔고 있었다네요.

 

그 짚신 장수는 나중에 황제가 되고, 고기 장수와 녹두 장수도 후에 용맹한 호장이라고

불리게 되어 ‘한 마리의 용이 호랑이 두 마리를 갈라놓았다’는

일용분이호(一龍分二虎)의 전설이 아닌가요.

그러니 이때 이들의 첫 만남을 보면 시정잡배가 맞나 봅니다.

관우나 장비가 시장바닥에서 서로 웃기는 짓거리를 하며 멱살잡이나 하고

싸움질이나 하고 다녔던 짓을 보면 말입니다.

 

고기에 뚜껑을 한 부분까지는 같지만, 관우와는 저울추 때문에 싸움이 되어 유비가 우연히

지나다가 중재하여 도원에서 의형제를 맺었다는 이야기도 청대의 기록에 남아있다고 하니

소설이라는 게 쓰는 사람 마음대로이기에 佳人 이야기의 진위여부를 가리려고 하지 마세요.

삼국지연의란 이야기는 나관중 말고도 많은 사람이 썼고 또 그 소설도 그때까지

구전으로 내려온 이야기를 글로 옮긴 것에 불과하니까 말입니다.

 

그런 유비가 장비와 관우를 만나며 팔자가 펴지고 나중에 공명을 만나며

호랑이가 날개를 단 꼴이 되었답니다.

우리가 아는 삼국지란 이렇게 시작되었지 싶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읽게 되면 정말 손에 땀이 나고 흥미진진해 밤을 새우며 읽었습니다.

그때 그 시절에 말입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여기에서 우리는 유비를 나약한 샌님이나 마마보이로 알고 있었지만, 반전입니다.

한쪽 팔만으로도 관우와 장비를 제지할 정도라면 이것은 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힘입니다.

여러분은 어찌 생각합니까?

佳人은 "헐~"이라 생각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감로사에서의 일이 생각나지 않으시나요?

바로 위의 벽화사진을 보세요.

유비가 감로사 마당에 있는 바위를 칼로 두 쪽을 냈다잖아요.

그것도 중국산 칼로 말입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유비의 무공은 대단한 경지에 올랐다고 봐야 하지 않겠어요?

짚신 팔러다니며 언제 무술을 연마했나 모르겠네요?

타고났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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