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우의 무덤

2013. 3. 12. 08:00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오늘은 관우가 잠든 무덤을 구경하렵니다.

이제 제일 뒤에 관우를 모신 묘역이 나타납니다.

바로 위의 사진이 관우 머리만 묻힌 무덤입니다.

 

관림(關林)에는 긴 회랑을 따라 무루(舞樓), 산문(山門), 의문(儀門), 배전(拜殿),

이전(二殿), 삼전(三殿) 등 관우를 기리는 사당과 그의 무덤이 순서대로 이어집니다.

잘 난 사람은 죽어서도 차지하는 면적이 민초의 수백 배도 더 넘네요.

 

 

머리만 묻은 이곳은 관림이고 당양이라는 곳에 몸을 뭍은 곳은 관릉이라고 부른다네요.

그래서 "머리는 낙양을 베개 삼고 몸은 당양에 누워있으며 혼은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하니 관우는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 죽어서도 피곤한 사람입니다.

 

 

관우의 아우라고 하는 장비도 머리와 몸이 분리되어 묻혔습니다.

도원결의할 때 한날한시에 죽자고 했지만, 결국 그 약속은 지키지 못하고 죽은 후

시신은 같은 방법으로 분리해 묻혔나 봅니다.

유비는 그때 딴짓하느라 잠시 그때의 약속을 잊고 혼자만 온전한 모습으로

청두의 혜릉에 잠들었다고 하지요.

 

 

돌기둥과도 같은 석 패방 두 개가 나란히 묘역 앞에 서 있습니다.

한수정후묘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황제로부터 받은 한수지역을 다스리는 정후라는 관리의 묘라는 말일 겁니다.

그리고 정후라는 말은 황족이 아닌 사람에게 내리는 최고의 작위로 조조는

심복이었던 순유에게도 정후라는 작위를 내렸다지요.

 

사실, 관우는 유비만 따라다녔지만, 잠시 조조에 몸을 의탁했을 때 조조가

관우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특별히 헌제에 부탁해 내린 벼슬이지요.

물론, 한수라는 지역은 당시에 오나라의 영토였기에 명예직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관우는 그래도 처음으로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벼슬이라 무척 소중하게 생각해

도장도 만들어 관우의 상징 중 하나로 그려지지요.

 

사실 한수라는 지방은 당시 오나라 영토로 조조가 황제를 통해 관우에 내릴 때는

개털이라는 말인데 원래 그곳에서 징수하는 세금으로 녹봉을 받게 되겠지만, 조조는

이렇게 벼슬을 내릴 때도 앞뒤를 생각해 명색만 벼슬을 주었다고 봐야 하겠네요.

관우는 늘 이 벼슬을 새긴 도장을 지니고 다녔으며 아들 관평이 보자기에 싸고

옆에 서 있는 모습이 바로 벼슬 이름을 새긴 도장입니다. 

흠차태감인 호빈소라는 사람이 쓴 글이라 하네요.

 

 

뒤의 패방을 조금 작은 데 중앙완재라고 썼나요?

강희제 때 삼한제자인 고호소라는 사람이 쓴 글이라 하네요.

그 위로는 양쪽 기둥에 허우라는 용의 자식이 지키고 있습니다.

 

 

여기 관림은 측백나무 800그루를 심었고 수령이 대부분 300년이 넘었고

가장 오래된 나무는 700년도 넘었다 합니다.

지금의 모습은 청나라 건륭 연간에 조성한 것이라 합니다.

중국 고대 건축물의 모범답게 무루, 정문, 의문, 용도, 배전, 대전, 이전,

삼전, 석방 그리고 팔각정 등이 있다고 합니다.

 

 

전사후묘(前祠後墓)의 형태로 앞쪽에 사당을 배치하고 뒤에 묘를 안치했네요.

위의 사진에 보이는 게 바로 팔각정이라고 하는 비정입니다.

청나라 때인 건륭 30년 1765년에 세운 비정으로 정식이름은 봉칙비정(封勅碑亭)

이라고 한다는데 황제의 칙령에 따라 만든 비정이라는 권위 있는 것이라는 말이겠네요.

 

 

관림의 중심건물인 배전 또는 평안전이라고도 부르는 대전으로 들어가기 위해 대문과

의문을 지나가야 하고 정문 앞 넓은 마당 남쪽에 무루 또는 희루라고 부르는

 2층 누각식 건물이 있습니다.

관림무루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청나라 때 산서성의 상인들이 돈을 모아 건립한 것이라 합니다.

역시 산서성 사람은 관우가 같은 동네 사람이라고 무척 아끼는군요.

사실 관우가 이렇게 유명세를 타는 일에 장사의 달인이라는 산서성 사람들의 공이

무척 컸다는 말일 겁니다.

 

 

무덤은 담장으로 에워싸고 높이가 10m이며 너비가 250m인 대단히 큰 규모의 묘입니다.

천천히 걸어 한 바퀴 돌아봅니다.

무덤은 옛 무덤이로되 사람은 없습니다.

관림은 많은 사람이 찾아오지만, 이렇게 무덤을 한 바퀴 돌아보는 사람은

우리 부부밖에 없는데 그럼 모두 어디에 있을까요?

중국사람은 모두 관우 신전 앞에서 향을 사르고 부자 되게 해달라고

비느라 여기는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관우란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부자 되게 해달라는 도구라는 말이 아니겠어요?

 

 

중국 여행을 하다 보면 우리와는 같은 모습도 많지만, 가장 다른 것 중의 하나가

무덤의 모습인데 저렇게 무덤 위에 나무가 자라는 모습은 중국 사람은

자손이 번성하고 부자 되게 해준다고 믿는 모양입니다.

또 도굴이 무서워 도굴 방지를 위한 목적도 있다고 하고요.

같지만 다른 모습...

그중에 무덤의 모습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중국 삼국지 기행을 하며 유비, 장비, 제갈공명 등 여러 무덤을

찾아 보았지만, 여기가 제일 크고 잘 꾸몄습니다.

 

 

비록 한수라는 땅은 조조의 지역에는 없는 지역이지만 관우는 처음으로 황제로부터 받은

벼슬인 한수라는 곳을 무척 소중히 생각했나 봅니다.

원래 한수에 부임했더라면 그곳에서 세금을 걷어 봉록을 받았을 텐데...

여기에 조조의 암수가 숨어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왜?

 

 

벼슬은 황제이름으로 내렸지만, 사실은 조조가 내린 거잖아요.

이렇게 올가미로 관우를 묶어두면 자기 휘하의 수족이 되리라 생각했겠지요.

역시 조조다운 꼼수였나 봅니다.

벼슬을 내리는 폼은 자기가 다 잡고 그 벼슬로 말미암아 할 수 있는 권한은

아무것도 없고... 역시 조조는 조조였습니다.

 

 

이제 관림을 나가야 하네요.

다시 입구로 걷다 보니 동서 양쪽으로 장랑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장랑은 만든 게 명나라 때라고 하니 무척 오래된 곳이네요.

여기에는 이 지방이나 관우에 관한 비각이나 조상, 석곽묘를 전시해 놓았습니다.

 

 

물론 사진으로만 찍고 나왔지요.

자세한 내용은 佳人 능력 밖이라는 것을 이미 아시죠?

그래서 사진으로만 보여 드립니다.

 

 

저분은 들어올 때부터 무척 자세히 글을 읽어보고 있군요?

재물신을 만나러 온 게 아니라 정말 관우를 자세히 느껴보려고 온 진정한

참배객으로 아까도 입구에 들어오며 그곳의 비석도 자세히 들여다보던 사람입니다.

佳人도 한글로 쓴 글은 아주 자세히 읽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한글이 아니라 들여다 볼 수 없군요.

이제 우리는 뤄양 박물관으로 갑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수하의 군사들은 관우가 공을 세우면 빚을 갚았다고 생각하기에 유비에게 간다고

말렸지만... 조조는 백마전투에서 과감히 관우에게 기회를 줍니다.

그러나 조조는 역시 대인이었습니다.

 물론, 관우는 싸움에 나아가 문추와 안량을 베어버림으로 수세에 몰렸던 전투를 일거에

되돌려버렸고 조조는 이때 관우의 실력을 유심히 보았기에 나중에 번성전투 때 관우 하나

잡으려고 조인, 만총, 우금, 방덕, 서황, 장료 등을 보내고 스스로 본대까지 이끌 준비를 했던 겁니다.

 

관우를 향한 조조의 사랑은 초선을 향한 여포의 사랑만큼 강렬했고 진지했습니다.

뒤돌아 나오는데 어디서 조조가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립니다.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무조건 무조건이야~ 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

인도양을 건너서라도~ 쨔짜라 짜라짜라 짜짜짜"

죽은 관우 묘앞에서까지 조조는 관우를 잊지 못하고 사랑 노래를 부르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