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天津) 진탕치아오(金湯橋)와 고문화거리

2012. 7. 30. 08:00중국 여행기/산동성(山東省)

11월 9일 여행 30일째

 

톈진은 중국의 3대 도시라 합니다.

서구 문명이 밀어닥치며 톈진은 날개를 달고 나는 듯 발전하게 되었다네요.

그러나 서구문명은 흑심을 품고 들어왔으니 그만큼 아픈 역사가 이곳에 있지 않을까요?

여기가 바로 베이징의 관문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침에 일어나 날씨를 보니 어제와는 전혀 다르게 햇볕이 반짝거립니다.

정말 언제 이런 날씨를 보았는지 알 수 없네요.

정말 오랜만에 보는 아름다운 날씨입니다.

살다 보니 해가 반짝거리는 날씨를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일도 중국이나 가능한 이야기?

반짝인다고 했지만, 우리나라의 청명한 그런 날씨는 아니지만요.

 

톈진이라는 도시는 역시 서양의 영향을 많이 받은 도시인가 봅니다.

거리에는 서양의 여느 거리처럼 생각될 정도로 서양식 건물이 눈이 보이네요.

佳人이 서양을 자주 다녀온 듯한 말이군요?

 

오늘은 톈진에 있는 천후궁과 민속박물관이 있다는 고문화 거리를 찾아보렵니다.

보통 천후궁이 있는 이 길을 고문화 거리라 하나 봅니다.

숙소 주인에게 가는 길을 물어 걸어서 찾아갑니다.

 

고문화 거리는 톈진 역에서 그리 먼 거리가 아니기에 그냥 걸어가도 될 정도의 가까운 곳이네요.

위의 지도를 보시면 톈진역에서 서쪽으로 곧장 가기만 하면 강을 만나고 강을 건너면 바로

고문화 거리가 보이고 해하동로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 보면 강이 나타나고 그 강을 건너가는

보행가라는 다리를 건너면 바로 오른쪽에 우리가 가려고 했던 고문화 거리가 보입니다.

누구나 걸어서 찾아갈 수 있는 그런 곳이네요.

 

가는 길에 보이는 건물은 이곳이 일찍 서양의 문물이 들어온 길목이라

건물의 모습도 서양스럽네요.

건물 위에 올라간 조각상이 서양의 사람이고 공자 맹자는 아니지 싶습니다.

천주교회당도 보입니다.

 

잠시 걷다 보니 운하에 도착하고 그곳에는 기념 조각상이 있네요.

사회주의가 우수하고 핍박받는 인민을 해방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해방되었다는 인민은 예나 지금이나 곤궁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새로운 정부는

대단한 일을 했다고 자랑하지만, 사실은 자신들만을 위한 대단한 일이 아닐까요?

어디 설명이 있을 겁니다.

 

그 강을 건너는 다리 이름이 진탕치아오(금탕교 : 金汤桥)라고 되어있습니다.

보행 전용인 철교이며 만든 지 100년이 넘었다 합니다.

1906년 청나라 옹정 연간에 톈진 세관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와 벨기에 전차 회사와의

합작으로 원래 동부교였으나 헐어버리고 하이허(海河)에 만든 최초의 철 구조물 다리인

금탕교를 만들었다 하네요.

 

金汤이라는 말은 한서에 나오는 말인 금성탕지(金城湯池)에서 유래한 고약금탕(固若金汤)에서

따온 말로 금성탕지는 금으로 세운 성과 뜨거운 물로 성 둘레를 가득 채운 해자처럼 방어시설이

잘 되어 공격하기 어려운 성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말이라 합니다.

금으로 성을 만들면 오히려 도둑이 더 많이 들지 않을까요?

성 둘레를 뜨거운 물로 가득 채웠다는 말은 이해할 수 있지만,

금으로 만든 성이 난공불락이라는 말에는...

 

당시 청나라 말기에 서양문물이 들어오며 군사적으로 많은 곤란을 겪던 시절이라

이런 고사를 인용해서라도 지켜보고자 했던 청나라의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해 지은 이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서양 세력이 휩쓸고 지나간 후 중국은 청나라는 역사의 이름으로만 남게 되며

다시 내부적으로 혼란이 벌어집니다.

1948년 베이징과 톈진의 해방전쟁이 시작되었고 1949년 1월 15일 아침 여명이 밝아올 즈음

바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다리 양쪽으로 해방군이 진격하며 드디어 톈진을 해방했다 합니다.

누가 해방했고 누구를 해방했나 알 수 없지만...

 

이 이야기가 바로 국공내전 때의 일이지요.

이곳에 주둔한 국민당군이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자 공산군이 여기를 지키던 국민당군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잔인하게 모조리 전멸시키고 톈진을 점령했다고 합니다.

이 일 때문에 항복하지 않을 때 모두 전멸시켜버리고 끝낸다는 이런 식의 해결방법을

톈진방식(天津方式)이라고 한답니다.

중국다운 말이지 싶습니다.

톈진 방식은 잔인한 방식인가 봅니다.

 

그래서 이 다리는 해방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곳이라 합니다.

따라서 진탕교는 신중국에서 더군다나 역사적으로도 기념할만한 장소이며

아울러 문화적 유산으로도 보호받고 있답니다.

1948년 톈진시에서 문물 보호 단위로 지정되며 애국주의 교육의 기지로 지정되었다 하네요.

이렇게 잘난 다리이기에 이곳을 흐르는 하이허에서 제일 중요한 장소가 바로 여기라 합니다.

다리를 건너가니 그곳에도 기념 조각상이 있고 대포도 전시해 놓았네요.

 

이곳은 볼 게 많은지 제법 많은 사람이 찾아오나 봅니다.

주변에 관광버스도 많이 정차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단체 여행객도 많이 오나 봅니다.

다리를 건너 오른쪽을 보면 탱크가 보이고 도로를 건너 고문 화가라는 길 입구가 보입니다.

톈진에서 잠시 돌아볼 수 있는 곳이기에 시간이 나시면 한번 들려 보세요.

 

입구에는 진문고리(津門故里)라는 패방이 보입니다.

여기가 고문화 거리 남문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톈진(天津)이라는 도시의 시작은 바로 여기가 아닐까요?

진문고리(津門故里)라는 말은 나루터가 있는 옛 마을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톈진이라는 도시는 사실 나루터였고 베이징으로 연결하는 운하의 시발점으로써

발달한 도시가 아닐까요?

 

패방을 지나 안으로 들어갑니다.

옛 청나라 때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게 바로 고문화 거리라고 하는군요.

이게 문화거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佳人 눈에는 옛 건물에서 장사하는 상가 거리로 보입니다. 

 

중국의 대표선수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게 바로 만리장성과 경항대운하일 겁니다.

쌓고, 파고, 뒤집고, 뚫고...

중국을 다니다 보면 신비스러울 정도로 이런 풍경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오직 중국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까요?

 

이게 중국의 힘이고 중국을 세계 속에 중국으로 각인시킨 일일 겁니다.

이 모든 일이 바로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게 불가사의죠.

지금도 사람 많은 게 바로 중국의 힘이니까요.

 

얼마 전 러시아 영해까지 침범해 수자원을 도둑질하다 도망하는 중에 러시아 해군의

함포사격을 받고 중국 어선의 어부 한 사람이 그만 바다에 빠졌답니다.

그러나 어선의 선장은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부자 되자고 한 약속도 저버린 체 어부를 바다에

그냥 둔 체 도망만 갔고 뒤를 쫓던 러시아 해군이 구조하고 다시 따라가 그 배를 나포했다고

중국 정부에서는 러시아 해군이 인명을 경시했다고 비난 성명까지 냈더군요.

인민 한 사람도 존중하고 아끼는 이런 중국 정부가 있기에 중국의 인민은 행복하지 않나

싶지만, 그게 도둑질하러 남의 집 담을 넘어가고 주인을 해치기까지 했더라도 자기 인민은

소중하고 중요했나 봅니다.

그 잘난 인민이 남의 영해로 들어가 도둑질할 때 단속하는 해경을 죽여도 입만 봉하고

있으면서... 이런 이웃과 함께 사는 주변의 이웃은 너무 슬픕니다.

 

약간 넓은 광장이 나옵니다.

그곳에 강 쪽으로 희루(戱樓)라는 누각이 보이네요.

연극이라도 하는 곳인가요?

 

희루(戱樓)의 반대편에 바로 천후궁이 있습니다.

천후궁은 따로 나중에 다시 보기로 하고 고문화 거리를 돌아보렵니다.

 

톈진에 서양문물이 들어오며 서양식 마차가 다녔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톈진이 국제항으로 개항하며 이곳을 통해 들어온 서양인들의 풍습을 보여주는 조각이라

생각되며 위의 사진에 보이는 마차는 양마차라 했고 이 모습은 동서양의 혼합된 풍습으로

취친(娶亲)이라는 풍습을 보여준다네요.

취진(娶亲)은 신랑이 신부를 맞으러 신부집으로 가는 일이라 하니 오늘 장가드는 총각이

저 마차에 타고 있을 것이기에 중국의 개화기에 풍경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뇨룡주(闹龍舟)라는 배입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용선의 모습입니다.

봄이 오고 꽃이 피면 톈진 인근에서는 봄을 축하하는 의미로 뇨룡주라는 배를 띄워

즐겼던 풍습인가 봅니다.

이런 풍습이 중화권에서 용선경기로 여러 곳에서 벌어지고 있지 않을까요?

 

채고교(踩高踩)의 모습도 볼 수 있네요.

다리에 나무를 덧대어 높은 다리밟기를 하는 그런 놀이네요.

이런 놀이를 황회(皇会)라 했나 봅니다.

이런 놀이를 통하여 민초는 즐겁게 지냈나 봅니다.

 

고문화 거리를 걷다가 이상한 돌 하나가 보여 살펴봅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보이세요?

하미석(虾米石)이라는 화석입니다.

새우가 화석이 되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톈진 계현(蓟縣) 지질공원에서 발견한 새우 화석으로 스트로마톨라이트라는

화석 구조로 보았을 때 중, 고생대의 화석이라 합니다.

지금이라도 이 돌을 물에다 집어넣으면 새우 화석이 새 생명을 얻어

모두 헤엄치며 살아날 것 같습니다.

 

통경리(通慶里)라는 골목입니다.

이 골목은 고문화거리 북단의 동쪽에 있는 골목입니다.

청나라 말기에 세워진 골목으로 네 개의 독립적인 마을형태로 골목은 상가건물로 되어있

2층 목조 벽돌 건물로 된 집입니다.

1층은 장사를 할 수 있게 오픈되어있고 전통 중국식과 서양식의 결합한 형태의 독특한 건물형태라

하며 이 골목에는 모두 72가구가 있었다 합니다.

 

이곳이 아무래도 부두가 있는 곳이라 예전부터 상업이 무척 활발하게 발달한 지역이라

건물 형태도 장사하기 쉬운 모습으로 지어졌을 겁니다.

더군다나 서양문물이 들어오며 서양의 배가 이곳을 통하여 들어와 정박하고 많은 서양문물이

이곳에서 거래되기도 했을 겁니다. 

그런 모습을 조각으로 남겨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했네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진흙 속에 연꽃이 피어난다 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험하고 살아가는 일이 힘이 든다 해도 우리는 그 세상 속으로 들어가 살아야 합니다.

 

여행이 아무리 힘든 일이라 해도 그 안에 우리가 몰랐던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고 찾을 수 있습니다.

자! 배낭을 주섬거리며 챙겨봅시다.

佳人 부부가 한 달간 중국을 다녀왔으면 대한민국 사람 누구나 다녀올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가겠다는 의지뿐입니다.

떠난 자만이 고생과 즐거움을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