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전의 삶이 청명상하도에 그대로...

2012. 7. 3. 08:00중국 여행기/하남성(河南省)

어제는 하남성 박물원을 들러보다가 폐문 시간이 다 되었다고 퇴실하라 해서 다 보지 못하고

돌아왔기에 오늘은 사실 황하풍경구라는 곳으로 가려고 했으나 박물원이 못내 아쉬워

다시 가기로 하고 인공적으로 만든 큰 바위 얼굴이 있는 염제, 황제 두상이 있는

황하풍경구는 과감히 포기합니다.

우리 부부가 우리의 조상도 아닌 염제, 황제를 만나지도 않고 그냥 가버렸다고 뭐라 하겠어요?

이제 북송의 도성인 동경성 안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대신 천 년 전의 민초로 살았던 옛날 사람을 만나보렵니다.

오늘은 옛날 그림 속으로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녀 보렵니다.

그 당시, 북송에 살았던 사람도 아침은 차 한 잔을 마시며 시작했나 봅니다.

차향으로 아침을 열었고 오늘 하루도 좋은 일만 있기를 기원하며 코끝을 간지럽히는

차향에 흠뻑 빠져 행복한 마음으로 다방에 앉아 담소하며 차를 마셨나 봅니다.

이게 다방인지 식당인지 어찌 알고 다방이라고 하느냐고요?

그것은 조차(早茶)라고 하니까 그랬습니다.

 

하루를 마치고 늦은 저녁 시간에 다시 그 다방을 찾아보았습니다.

희미한 등불 아래 차를 마시며 오늘 하루도 마감하려나 봅니다.

정말 차를 즐긴 민족이 중국인가 봅니다.

술을 마시는 민족은 망하고 차를 즐기는 민족은 흥한다 했습니까?

그런데 위의 사진에 보이는 모습이 차를 마시는 모습인지 술을 마시는 모습인지 어찌 알고

佳人이 미리 차를 마신다 했을까요?

 

(위의 사진은 삼채 사리함입니다.)

우리 부부는 이번 여행에 정저우에 있는 하남성 박물관을 두 번이나 다녀왔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라는 그림 때문입니다.

그 그림 안에는 천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비밀이 있었잖아요.

여행하다 보면 자꾸 혼자만의 생각을 하게 됩니다. 

 

위의 사진은 삼채 동자상 도자기 베개입니다.

저 배개는 마음이 안타까워 배지 못할 것 같습니다.

어찌 작은 아이의 등어리를 배고 누울 수 있단 말입니까?

 

청명상하도란 중국인의 자부심이라 합니다.

중국에서 국보나 보물을 지정하는 일이 없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런 제도가 있었다면

만장일치로 국보 1호에 등재될 유물이 바로 오늘 보는 청명상하도라는 그림일 겁니다.

잘 아시죠?

佳人의 이야기는 절대적으로 '아니면 말고.'입니다.

 

누각에 올라 호기심 많은 사람이 성문 아래를 내려다보는군요.

높이 오르면 더 멀리 본다고 했습니까?

덜수는 멀리 보고 싶었나 봅니다.

이상은 높이, 그리고 시야는 멀리...

저 친구는 아마도 배낭여행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흐르는 물 위에 연화등을 띄워 보내는 모양입니다.

지금도 중국은 물이 흐르는 고성을 가면 위의 사진처럼 연화등을 만들어 불을 붙여 소원을 빌며

흐르는 물에 띄워 보내지요?

 

이 풍습은 이미 이때도 있었나 봅니다.

사실, 소원을 담아 물에 띄워 보내는 일은 아름다운 일로 보이지만, 나중에는 쓰레기가 되고

물을 오염시키는 일이 아닐까요?

소원을 비는 사람은 자기 소원만 이루면 되니까 상관없을까요?

이루어지지도 않을 소망을 위해 자연이 아파한다면, 하지 말아야 할 것 중의

한 가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제는 정신없이 바라보다 그만 박물관 폐관 시간이 다되어 박물관을 나오며 아쉬워

다음 날 아침 다시 들려 보았는데 세상을 살며 이렇게 두 번이나 찾아가 본 일은 처음이었습니다.

왜 중국인이 이 그림을 국보 제1호로 생각하나 이해할 것 같았습니다.

위의 사진처럼 밤에도 개관했더라면 밤새우며 구경했을 겁니다.

 

강변에는 이렇게 술집도 있습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덜수는 여기에서 친구 일용이와 함께

탁배기 한잔 걸치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었을 겁니다.

덜수는 비록 집에 들어가 마누라에게 바가지 긁혀 이마에 반창고를 붙이고 다닐지라도...

집에 들어가라고 등 떠미는 일용이에게 2차로 딱 한 잔만 더 하고 가자고 조르는 덜수를 찾으셨어요?

위의 사진에 보면 손으로 가리키며 저가 물 좋은 곳이 있다고 바람 잡는 중입니다.

나중에 덜수는 일용 엄니에게 걸려 뒤지게 혼났을 겁니다.

덜수가 속도 없이 사는 사람이라고요?

그래요.

그게 바로 덜수가 세상 사는 방법이니까요.

 

그림 속의 그 많은 출연 인물 중에 바로 우리 조상인 고려인을 다시 만나기 위해

다시 일찍 찾아왔습니다.

이 많은 사람 중에 어떻게 佳人의 눈에 우리 선조가 보였을까요?

이는 아마도 우리의 만남이 천 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숙명적으로 만날 인연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어제는 늦은 시간 찾아가 피곤하셔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겠지만, 오늘은 일찍 제일 먼저

찾았기에 뭔가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입니다.

 

그림을 그렸을 때가 1120년이라 하니 당시 우리나라는 고려 시대였기 때문이었죠.

흔히 우리가 사극에서 본 갓을 쓴 남정네는 조선시대의 인물로 알기에 순간적으로

조선 시대의 사람으로 생각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이전인 고려 시대로 갓을 쓰고

한복 두루마기를 입은 모습은 조선 시대의 인물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이 모두 700여 명이라 했고 이 그림은 일부 소실되어 2/3만 남은

그림이라 했으니 모두 천여 명의 사람을 장택단이 그렸다는 말일 겁니다.

그중 단 한 사람의 갓을 쓴 고려인을 집어내 정확하게 두루마기와 갓을 그린

장택단의 통찰력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네요.

 

고려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아 북송의 도성인 변경에 장사하기 위해 온 것인지

사신으로 들린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말을 끌고 가던 마부는 아마도 우리의 호프 덜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佳人의 글에 언제나 등장하여 우리를 즐겁게 한 상상 속의 친근한 우리의 호프 덜수를 찾은 겁니다.

다른 나라에서 그것도 시대를 초월해 덜수를 만난다는 일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덜수를 아무리 불러도 못 듣고 그냥 가더군요.

이런 모습은 이미 북송시기에는 고려와 국제적으로 빈번하게 교류가 있었다는 증거가 아니겠어요?

 

고려인이 등장하는 모습은 그림의 거의 끝 부분에 말을 타고 가는 모습으로 나타냈습니다.

아무리 불러보아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말만 타고 가더군요.

물론, 혼자가 아니라 일행이 함께 이동하는 중으로 보였습니다.

이 그림을 보고 당시로 돌아가 덜수의 일대기를 추적하여 소설 한 편 쓰고 싶습니다.

 

개봉의 가장 번영했던 시기의 모습은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라는 그림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청명상하도에서 말하는 청명이란 우리가 아는 24절기의 하나인 청명절을 말한다 하기도 하고

가장 태평성대를 누렸던 시기라고도 합니다.

지금의 카이펑은 화려했던 당시의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잖아요?

 

또 어떤 사람들은 그림 속에 보이는 꽃이나 나무의 색깔이 청명절인 봄이 아니라

가을의 모습이라고 하면서 청명방(淸明坊)이라는 동네 이름에서 따온 말이라고도 합니다.

워낙, 대작이라 처음에 청명에 그리기 시작해 가을에 이르러 나무를 그리기 시작했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쵸?

상하란 송나라 때 카이펑을 흐르는 변하라는 강을 말한다 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카이펑을 그 당시는 변경이라고 불렀던 모양입니다.

 

개봉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 중국의 모습입니다.

수차례 이민족에 의해 사라졌다 다시 일어나고 또 사라지고..

위의 사진은 풍우교의 모습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합니다.

북송의 휘종임금 시절 삼국사라는 절에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휘종이 듣게 되었다 합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장택단이라 하네요.

휘종은 장택단을 불러 당시 카이펑의 모습을 그리라 명합니다.

황제의 명령인데 그려야 하지 않겠어요?

 

당시에는 황제라면 대단한 존재인데. 가문의 영광으로 알고 아주 정성을 기울여 그림을 그리게

되며 그 그림 내용이 청명절을 맞이하여 카이펑 강변을 따라 눈에 보이는 일상의 풍경을

중심으로 대작을 그려 휘종에게 바칩니다.

두루마리 형태의 그림으로 당시 북송의 도성인 변경을 드나드는 사람과 도성 주민의 생활이

마치 살아있는 듯 일상의 모습이 그대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있습니다. 

 

그러나 북송은 이 그림이 완성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북에서 내려온 금나라에 패망하게 되고

그동안 황실에 보관하고 있었던 금은보화와 함께 청명상하도 그림마저 빼앗기게 되지요.

그 후 이 그림은 팔자도 사납게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다 합니다.

그러다 명나라 때 엄숭이라는 사람의 손에 들어가고 엄숭이 탄핵을 받아 가산이 압수될 때,

이 그림은 명나라 황실에 귀속되었다 합니다.

 

명나라에 이어 청나라에서도 이 그림을 자금성 안에 있는 영춘각에 걸어 놓았다 합니다.

다행히 영국 프랑스 연합군의 침입과 의화단 사건 때 약탈당하지 않고 살아남았기에 지금까지

중국에 남아 있다 하네요.

만약, 그때 빼았겼더라면 지금은 아마도 대영박물관의 고개지가 그린 여사잠도라는

그림 옆에 걸려 있을 겁니다.

물론 마지막 황제 푸이가 만주로 갈 때 다른 문화재와 함께 갔었지만,

얼마 후 다시 보내져 자금성에 보관되어 있다고 하네요.

 

북송이 패망하자 휘종의 11번째 아들이 항저우로 천도하자 장택단도 따라 항저우로 갔고

그는 다시 청명상하도를 그려 위로한답시고 고종에게 바치자 예술에 문외한인 고종은

그림을 다시 장택단에게 돌려보냈다 합니다. 

멍청한 고종의 행동에 열 받은 장택단은 예술의 의미도 모르고 애술만 아는 고종에게

항의하는 의미로 청명상하도를 불태워 버립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달려들어 불을 껐으나 이미 그림의 절반은 불에 타버렸고 장택단은

이 일로 인하여 화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합니다.

원래 그림은 길이가 11m가 넘을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 남아있는 그림은 5m 28cm

정도라고 하며 그래서 카이펑에는 청명상하원 테마공원이 만들어져 있어

물론 80원의 입장료를 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이 모두 700여 명, 84마리의 가축, 100여 채의 집, 교량이 20개,

크고 작은 배가 20척, 190그루의 나무, 100여 자의 낙관과 6개의 도장,

34개의 점포가 강을 따라 등장합니다.

당시의 카이펑이 얼마나 번화하고 흥청거렸나 알 수 있습니다.

 

 마차를 끌고 다니는 게 소나 말만 있는 게 아니고 낙타도 보입니다.

낙타란 중국에는 없었던 동물로 아마도 서역과 교류를 하며 그곳 장사꾼이 물건을 싣고

변경까지 드나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당시에 이미 서역과 장사도 제법 많이 했던 모양입니다.

가게의 간판도 보이고...

 

그림은 크게 3 부분으로 나뉘어 볼 수 있답니다.

초반, 중반, 후반으로 나누고 초반부는 카이펑의 교외에 해당합니다.

중반부는 무지개다리라고 하는 홍교를 중심으로 그렸습니다.

후반부는 성을 중심으로 점포들이 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 카이펑의 청명상하원 공원은 그림에 보이는 모습을 비슷하게 만들어 놓은

테마공원인 셈입니다.

굳이 들어가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림만 자세히 보아도 그게 그 모습이니까요.

80원의 입장료를 보고 멋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테고 본전 생각이 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위를 클릭하시면 "청명상하도"라 하는 중국의 국보 1호 급의 다른 버전을 보여 드립니다.

위의 제목을 클릭하여 그림이 나온 뒤 커서(화살표)를 그림에 올려놓으면 그림이 좌우로 이동합니다. 

커서를 중심에서 좌로 이동하면 그림이 우측으로 이동하는데 커서를 좌로 많이 옮길수록

그림의 이동 속도가 빨라집니다.

 

그림을 보다 보면 그림에 사각 박스를 해놓은 곳이 있는데 그곳을 클릭하면

3차원의 영상을 실감 나게 보실 수 있습니다.

 실물의 크기는 폭 24.8cm 세로 5m 28cm로 현재 베이징 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화폭 앞부분에는 양시정의 글이 들어 있습니다.

건륭황제의 도장이 있으나 후대에 찍었다고 추측합니다.

그러니 이 그림은 원본이 아니라 모사본일 수도 있다는?

 

아래를 클릭하시면 돼지털이 아니고 디지털 청명상하도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2010년 5월 상하이 엑스포에서 공개한 것으로 원작 청명상하도를 700배 확대해

 가로 126m, 세로 6.5m로 만든 것입니다.

원작은 700명만 등장하는 낮 풍경이지만, 돼지털 청명상하도는 1.000명이나 나오게 하여 밤과 낮의

두 버전으로 제작해 당시의 풍속을 간접 체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중국이 얼마나 이 작품에 자부심을 갖고 있나 알 수 있잖아요. 그쵸? 

https://www.youtube.com/watch_popup?v=UdRIbCP4N4Q&vq=medium

 

이 그림을 첨단 디지털 기술로 700배 확대하고 사람과 동물이 움직이는 동영상으로 만들어

천 년 전 중국의 도시상황이 스펙터클처럼 재현됩니다

 

13분 50여 초가 소요되는 동영상을 보시려면 클릭하시면 됩니다.

정말 놀라운 작품입니다.

2010년 상하이 만국 박람회에서 6개월간 중국 전시관에서 전시되었을 때,

인기가 대단하여 입장을 위하여 3시간 이상 기다려야 했다고 합니다.

오늘 佳人이 여러분을 위해 줄 서서 기다리지 않고도 볼 수 있도록 연결해 드립니다.

물론, 엎드리셔도 좋고 누워서 보셔도 됩니다.

물구나무서서 보시는 것은 권장사항이 아니오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우리나라도 조선 시대에 청계천을 따라 살곶이 다리까지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천변을 따라 그린다면 청명상하도보다 더 긴 대작이 나올 텐데...

제가 한번 시도해 볼까요?

제목은 청명상하도가 아니라 청계상하도 말입니다.

지금 웃고 계신 거 다 압니다.

그림의 그자도 모른다고 꿈도 꾸지 말라는 말씀이세요?

그러면 한강상하도는 어떻겠어요?

두물머리부터 한강하구까지를 그리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