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상하도는 타임캡슐입니다.

2012. 7. 2. 08:00중국 여행기/하남성(河南省)

우리 부부는 이곳에서 청명상하도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원래 계획은 카이펑에 가서 그곳에 만들었다는 청명상하도 공원을 가려고 했지만,

여기서 자세히 보면 그곳에 더는 볼 게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꿩 대신 닭이라 했나요?

그럼 여기 박물원에 있는 게 닭이고 그곳이 꿩이겠지만, 사실 여기는 입장료도 없는 곳이라

더 좋아 보이니 여기는 닭이 아니라 치킨인가요?

 

일을 마친 덜수가 오늘 받은 품삯으로 파라솔을 친 주막에 앉아 탁배기 한 장 걸치며

주모와 노닥거리고 있습니다.

그러며 은근한 눈빛으로 주모의 손도 슬그머니 잡아봅니다.

아마도 덜수는 오늘 집에 들어가 덜순이에게 혼이 날지도 모릅니다.

하루 일과를 마친 후 마시는 탁배기 한 잔이 덜수에게는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되고 행복의 첫걸음이라고 하는데...

죽을 땐 죽더라도 오늘 마신 탁배기 한 잔은 생명수와 같은 것이 아니겠어요?

 

청명상하도는 가로 5m 28.7cm 세로 24.8cm의 대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남아있는 작품은 사실 처음 그린 그 모습이 아니라 합니다.

이 그림은 북송시대 말 한림학사(翰林學士) 장택단(張擇端 960-1127)이 당시의 수도였던

변경(카이펑)의 평화로운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서민이 살아가는 모습을

사실 그대로 화폭에 옮긴 대작이라 합니다.

워낙 유명한 그림이라 우리에게도 무척 친숙한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장택단은 북송 말기에 대단히 유명한 화가였던 모양입니다.

그는 산동성 사람으로 관직은 한림승지(翰林承旨)에까지 올랐다 하네요.

그가 그린 청명상하도는 당시 북송의 도성인 변경을 가로질러 흐르는 변강을 따라 민초가

사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 합니다.

어찌나 자세히 묘사했는지 마치 사진으로 찍은 듯 사람 하나 건물 하나까지 사실적이라 하네요.

그러기에 그림으로 뿐만이 아니라 당시의 생활풍습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아니겠어요? 

 

위의 사진을 보시면 건물의 지붕이 마치 가설무대처럼 보입니다.

그 앞에 많은 사람이 모여 웅성거리는 모습을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무슨 용도로 보이십니까?

佳人과 함께 하신다면 제가 여러분을 가상세계로 인도하렵니다.

자... 이제 그림 속으로 들어갑니다.

 

짠~ 그 모습을 재연하면 위의 사진과 같이 가설무대로 연극도 하며 약도 파는 그런 모습입니다.

위의 사진은 바로 그림 속으로 들어가면 실제 만나볼 수 있는 상상 속의 세상입니다.

여러분도 지금 佳人과 함께 현실과 이상을 넘나들고 계십니다.

어느 게 현실인지 어느 게 상상 속의 세상인지 그게 중요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佳人의 이야기에 빠져드셨다면 여러분은 지금 저와 같은 덜수가 되고만 겁니다.

 

성문을 통과하는 낙타에 짐을 싣고 서역인 장사꾼의 모습도 보실 수 있습니다.

낙타가 이곳을 활보한다는 말은 아라비아 상인이 이미 들어와 장사하고 있다는 말일 겁니다.

우리가 뤄양의 고묘박물관에서 이미 서역인의 모습을 한 당삼채를 보았기에 전혀 낯선 모습은 아니지요.

 

유심히 아래를 내려다보는 성벽 위에 한 사내를 봅니다.

저 사내는 아마도 외국인에 대한 관심이 많은 덜수일지 모릅니다.

지금 서역으로 배낭여행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성문 위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는 차양을 친 노점상도 보입니다.

 

장 화백은 특히 배, 수레, 다리, 성곽, 길, 저잣거리 등의 그림에 뛰어난 실력을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장택단은 벼슬을 잃은 후 그림을 팔아 생계를 이을 만큼 어렵게 살았다 하네요.

그러나 살아생전 불행했던 그도 그가 남긴 이 한 편의 그림으로 장택단은

중국의 최고 풍속 화가에 등극한 겁니다.

 

낙타를 끌고 성문을 통과하는 그 그림을 디지털로 복원하면 위의 사진처럼 이런 모습일 겁니다.

사진 중앙을 보시면, 성문 앞의 어느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이고 문 왼편에 正店이라고 쓴

간판이 보이는데 이 집은 아주 고급 술집이라 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아주 유명한 수도자들이 즐겨 드나들었던 룸살롱 정도는 되지 않겠어요?

 

佳人이야 술을 마시지 못하니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당시 동경성에서 가장 고급 술집이었던

모양으로 송나라 미인은 모두 여기 다 모였다는 말이 시중에 돌 정도로 유명한 곳입니다.

그리고 문 앞에 서서 양손으로 안으로 들어가기를 권하는 저 사내는 바로 18번 번호를 단

관우라는 가명을 쓰는 삐끼일 겁니다.

   

강을 건너는 무지개다리도 있고 장사하는 저잣거리도 있습니다. 

그는 이 그림에서 당시 번화한 변경(汴京)의 성안과 근교 사회 각 계층의 생활 풍경을

훌륭하게 묘사해냈다고 평가받는다 합니다.

주로 표현한 대상은 노동자와 소시민으로 민초의 애환을 그대로 그림으로 표현했답니다.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저잣거리의 시끌벅적한 그 소리가 그대로 전해옵니다.

다리 위에서 강을 내려다보며 지나다니는 배를 구경하는 사람도 볼 수 있습니다.

다리 오른쪽 끝으로는 배를 정박하기 위해 밧줄을 잡아당기는 모습도 볼 수 있어요.

물론 다리 위에 웅성거리고 사람이 모인 곳은 지금 터미널 부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주사위를 이용한 야바위꾼일 겁니다. 

 

그는 또 이름 없는 장인의 피와 땀의 결정체인 돌로 만든 홍교(虹橋)나 흙으로 만든 다리인

하토교(下土橋)의 건축도면을 완벽하게 묘사해냈다고도 평가받는다는군요.

사실, 지금 위의 사진에 보이는 홍교 모습이 청명상하도의 중심점인 하이라이트라 해도 과언이

아니고 이 모습을 중심으로 양쪽에 그림 구상을 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즉 사람, 건물, 거리 주변, 운반수단, 나무, 물의 흐름 등 대상이 서로 교류하는 모습을

매우 교묘하게 처리했으며, 전후 사정이 명확하고 서로 연계가 아주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통일미가 매우 뛰어나다고 하네요.

 

위의 세 장의 사진은 모두 같은 곳을 묘사한 것으로 미니어처와 그림과 디지털로 재구성한

모습으로 홍교 아래 큰 배를 대는 모습으로 뱃사공의 분주한 움직임과 밧줄을 연결해

배를 끄는 모습, 그리고 그런 광경을 홍교 위에서 즐겁게 구경하는 변경 사람들을

그린 것으로 뱃사람의 질펀하게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이 그림이 바로 청명상하도의 대작 중 아주 작은 한 부분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당시 북송의 도성인 변경(汴京 : 지금의 카이펑)의 청명절 동안의 모습을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도성 모습을 그린 작품이라 합니다.

이 대작 속에는 도성의 모습, 아주 자연스러운 교외의 풍경, 변강(汴江)의 모습, 길거리를 따라가며

민초의 생활상을 그대로 사실적으로 묘사한 대작입니다.

가운데 물길을 따라 그곳의 모습을 그린 게 바로 청명상하도가 아닌가 생각되네요.

 

여기서 우리는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위의 사진을 보시면 설서(說書)라는 직업이 당시에 무척 많이 있었나 봅니다.

 

혹시 이번 여행기 중에 佳人이 타이위안에 들렸을 때 나관중 기념관을 들렀던 일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때 나관중은 그가 쓴 소설 수호지가 나리들의 비리를 건드렸다는 일 때문에 가문의 내침을 받고 쫓겨나

고향을 등지고 출외인(出外人)으로 멀리 타관객지로 떠돌이 생활을 했다는 말씀을 드렸지요?

 

동양의 톨스토이라는 나관중도 배가 고프면 톨스토이는 서양개의 개털이지만, 나관중은 중국 개의

개털로 사흘 굶어보면 범 털도 족제비 털이 되잖아요.

그래서 택한 일이 바로 설서(說書)라고 하는 일을 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설서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을 위해 책을 읽어주는 일을 말하며

이런 사람을 설서인(說書人)이라 했답니다.

당시 중국은 지금보다 더 문맹자가 많았기에 글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합니다.

이렇게 저잣거리에서 사람을 모아놓고 책을 읽어주고 수고비로 푼돈을 벌어먹고살았다 하네요.

누가?

동양의 톨스토이였다는 나관중이가 말입니다.

왜?

배가 고파서...

 

지금 바로 위의 사진을 보시면 오른쪽에 한 사람이 서서 "장비가 말을 타고~"라고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이실 것이며 띄어 읽기를 잘못하여 "장비 가말을 타고~"로 읽었다면

듣는 덜수는 "장비 가마를 타고~"로 이해합니다.

그러면 제일 앞에 듣고 있던 덜수가 한 마디 크게 소리칩니다.

"장비가 가마를 탔다면 이는 필시 많이 다쳤을 게야~ 어디서 다쳤지?"라며 큰 소리로 떠들면

나머지 사람도 수군거리며 뒤에 듣고 있던 사람은 "장비가 많이 다쳐 죽었데~"로

전개되던 시기였습니다.

 

여기 청명상하도에도 나관중처럼 글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 저잣거리에서 푼돈이나 받으며

소설책을 읽어주는 직업을 가진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번 여행기 중 태원의 나관중 기념관을 갔던 이야기를 할 때 나관중이 문중에서 버림받고

떠돌이 생활을 하며 입에 풀칠하기 위해 저잣거리에서 문맹자를 위해 소설을 읽어주고

동냥을 받아먹고살았다고 했더랬지요?

젠장! 대단한 사람도 때를 잘못 만나면 이렇게 사나 봅니다.

 

당시 나관중처럼 글도 많이 알고 재미있게 말을 지어내는 사람은 이렇게도 먹고살았답니다.

이런 사람을 설서인(說書人)이라 했던 모양입니다.

佳人 같은 사람은 여행기를 써도 說書人처럼 되기는 틀렸습니다.

나관중은 푼돈이라도 벌었지 佳人의 여행기는 워낙 재미없기에

어느 누구도 땡전 한 푼 던저주지 않더이다.

 

중국은 정말 예전에 글을 모르는 사람이 무척 많았다 합니다.

지금이라고 다를까요?

우리 부부처럼 시골로 다니다 보면 글로 써달라 하면 미소만 짓는 사람을 자주 만나고 버스를

기다리며 가는 방향 반대편에 서서 운전기사에게 큰소리로 행선지를 물어보고

길을 다시 건너와 타는 사람도 많습니다.

가는 목적지를 커다란 판자에 써서 버스 창문 앞에 붙여놓아도 말입니다.

중국어를 모르는 우리 부부도 읽을 수 있는 것을 중국인은 읽지 못한다는 말이겠네요.

오죽했으면, 마오가 글자를 단순화했을까요?

 

장택단의 그 묘사 솜씨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치밀하고 사실적이라는 데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도로 교차로의 도시 풍경은 마치 사진을 찍은 듯 사실적으로 정확하게 그렸고 가게의 위치나

상호까지 표시했으며 부산하게 움직이는 교통상황, 강을 가로질러 왕복하는 배들의 움직임,

여러 사람이 몰려다니며 여행하듯 이동하는 군중,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장사꾼, 서로에게 소리치는

뱃사람, 거리를 지나는 낙타 행렬 등 북송시대 중국의 일상을 파노라마처럼 그려낸

청명상하도는 중국에서도 명화(名畵) 중의 명화로 꼽히는 대작이랍니다.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12세기 북송의 도성인 동경성의 민초의 삶과 일상 모습이 사실 그대로

전해오는데 이 그림 앞에 서면 마치 그때로 돌아가 佳人도 그들과 같이 소리치며

호흡하는 그런 기분이 드는 그림입니다.

불에 달군 쇠를 두드려 농기를 만들고...

 

먼 길을 떠나기 전에 많은 짐을 싣고도 아무 탈도 없이 거뜬히 다녀오기 위해

타이어 공기압도 체크하고 마모도 검사를 하며 수레바퀴를 손보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살아갔나 봅니다.

 

변경의 가운데로 흐르는 변강을 따라 송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부지런히 살아갔습니다.

그런 그들의 사람 사는 이야기를 장택단은 한 폭의 그림으로 그대로 옮겨놓았습니다.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바로 세상을 살찌웠던 풀뿌리 민초의 삶이 아닐까요?

오늘 佳人은 천여 년 전 민초들의 삶 속으로 여행했습니다.

이렇게 여행이란 시간도 초월하며 다닐 수 있어 행복합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비록, 워낙 예술적인 감각이 미천하여 이런 모습에 별로 흥미도 없고 감동하지는 못하지만,

이 그림과 미니어처로 만들어 놓은 것을 바라보는 순간 그만 감전이나 된 듯

얼어붙어 버릴 정도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佳人도 가끔 이런 순간이 찾아오기는 하나 봅니다.

살다 보니 전혀 어울리지 않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