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부 안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2012. 7. 5. 08:00중국 여행기/하남성(河南省)

작두를 대령하라는 포청천의 불호령이 들리는 듯한 곳인 이곳이 개봉부입니다.

옛 모습은 모두 누런 황하가 삼켜버린 카이펑..

지금 만든 개봉부라는 곳은 그야말로 재연해 놓은 어설프기 짝이 없는 민속촌과도 같은

곳으로 이곳 개봉부는 너무 기대를 많이 하고 찾아온다면 실망 그 자체입니다.

재연해 놓으려면 그럴듯하게라도 만들지 도대체 어설프기에 보는 사람이 안타깝습니다. 

 

입구에 서서 바라보았지만, 포청천이 보이지 않습니다.

문표의 그림에는 포청천이 문 옆에 나와 있는데...

아직 근무 중인가요?

오늘 작두 쓸 일이 많은가요?

바쁘다는 핑계로 나오지 않는다면 나중에 포청천이 우리 집에 와도

문 열어주지 않을 겁니다.

 

일단 개봉부 입구에 있는 부문의 누각 위로 올라갑니다.

원래 귀한 손님을 영접할 때 개봉부 앞까지 나오지 않고

그 안에 있는 중문 격인 의문(儀門)이라는 곳에서 맞이한다고 하더군요. 

그곳에서 내려다보니 의문 양쪽으로 북과 종을 매달아 놓았습니다.

저게 바로 우리의 신문고와 같은 역할을 했을 겁니다.

 

젠장! 이슬비가 부슬거리며 내리니까 포청천이 마중조차 나오지 않았습니다.

일기 불순한 날 방문한 佳人의 잘못도 크기는 하네요.

미리 연락하지 않아 그랬나요?

우중충한 날씨와 건물 색깔이 더 우울하게 만들지만,

그나마 국화로 단장했기에 조금은 좋아 보입니다.  

 

세상이 천지개벽하며 황하의 물이 이곳 동경성을 덮칠 때, 항하의 범람은 이곳 도성의 모습은

모두 삼켜버렸고 사라져 버린 북송의 도성은 지금 카이펑 지하에 그대로 매장되어버렸답니다.

지금 만들어 놓은 개봉부라는 곳은 마치 억지로 몸에 맞지도 않은 옷을 입혀 놓은 것처럼

일종의 민속촌 같은 곳으로 들리는 말에 따르면 지금 개봉이라는 도시의 지하 13m 지점부터

당시 도성의 모습이 그대로 묻혀 있다고 합니다.

 

부문 입구 위에 누각이 있고 그 안에도 북과 종을 매달아 놓았습니다.

이곳 카이펑에서는 빗자루질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땅 밑은 그야말로 유물의 보고가 아닐까 생각되네요.

그래서 그런가요?

이곳의 건물은 높은 건물이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포클레인 불러다 모두 파 보고 싶습니다.

만약, 카이펑을 파 본다면 이탈리아 나폴리 인근의 베수비오 화산에 때문에 파묻힌

폼페이와 같은 고대도시가 나올지 모릅니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억울한 일을 당하셨습니까?

그럼 이 종을 두드리세요.

포청천이 뛰어나와 억울함을 풀어줄 겁니다.

포청천은 돈이 없고 백이 없어 억울하게 당한 민초의 억울함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시시비비를

가려줄 것이기에 이런 사람은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한 사람이 아니겠어요?

 

카이펑은 지금은 작은 시골 동네에 불과하지만, 허난성 카이펑은 북송의 수도였다지요?

과거에는 한 나라의 도읍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했지만, 세월이 흐르고 난 지금은

그저 작은 옛 마을에 불과합니다.
 포청천이 근무했던 개봉부는 원래 황궁의 남동쪽에 있다가 서쪽으로 옮겼다고 하네요.

원래 자리는 현재 앞에 보이는 포공(包公) 호수의 북쪽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명나라 숭정(崇禎) 15년(1642년) 황하의 범람으로 순식간에 모두 파묻혀 지금은 지하로

사라져 버리고 그리고 그 주변이 커다란 호수로 변해 버렸습니다.
 포공을 추모하는 사람들은 그 호수를 포부갱(包府坑)이라 불렀고, 세월이 흘러 포공호(包公湖)로

바뀌었다고 하며 황하의 범람은 중국의 청백리도 묻어버리고 그의 사상조차 묻어버려

정의가 없는 세상을 만들었나 봅니다.

 

우선 안으로 들어가 문루 위로 올라가 봅니다.

여기도 호수 앞에다 개봉부 대형 조벽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조벽에는 해치(獬豸)도를 만들어 놓았네요.

중국의 해치라는 동물은 우리에게는 해태라는 말로 더 친근하지요.

그러나 생김새는 우리의 해태와는 달라 보입니다.

 

해태라는 동물도 상상 속의 동물로 선악을 판단한다 했나요?

그림처럼 전설 속에 동물로 뿔이 하나이고 신기하게도 시비를 가릴 줄 알아 사람이

서로 다투면 정의롭지 못한 사람을 저 뿔로 들이받는다 합니다.

중국 인민은 짐승보다 못하다는 말인가요?

왜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동물에게 심판을 받는다는 말이 오니까?

 

아마도 이곳을 빛낸 인물이었던 포청천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선택한 동물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으며 지금 우리 사회도 해치 한 마리 풀어놓는다면 저 뿔에 받혀 죽을 사람이

부지기수일 겁니다.

죄송합니다.

우리나라까지 올 힘도 없을 겁니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저 뿔에 받힐 사람이 너무너무 많을 테니까요.

 

중국은 왜 이런 신기한 동물이 그렇게도 많은데 지금 중국 정부의 나리들은

하나같이 개나리처럼 보일까요?

이렇게 동물로도 착하게 살아가라 주문하지만, 전혀 쓸모없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설마 동물보다 못한 심성을 가졌다고는 할 수 없잖아요.

중국에서 신수라고 하는 상상 속의 동물은 대부분 선악을 가리고 권선징악을 상징합니다.

이런 동물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중국인의 삶 속에 악이 언제나 선을 누르고

득세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좋을까요? 

 

그래도 관화미심의 마음으로 살아가라고 꽃으로 아름답게 장식했습니다.

국화는 바로 카이펑의 시화이고 뤄양의 모란처럼 이곳의 국화는 전국적으로 종류도

다양하고 아주 오래전부터 재배되어 카이펑을 아름답게 치장했다 합니다.

 

다시 내려와 제일 앞에 보이는 문이 의문(儀門)이라는 문입니다.

의문이란 예전 중국의 관청 안에 있는 두 번째 문을 말합니다.

주로 외부의 중요한 귀빈을 접견할 때 의전을 행할 때의 문이 의문이라 합니다.

 

의문 안에는 무기를 감추어 두었습니다.

누구를 위한 무기였을까요?

죄인을 처단하기 위한 무기였을까요? 아니면, 관청의 권위를 위한 무기였을까요?

 

그 안에는 북송개봉부인이라는 큰 모형 도장이 보입니다.

이게 정말 그때의 모습일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사용하지도 못할 도장 크게 만든다고 무슨 의미가 있나 모르겠네요.

이게 폼 나는 일입니까?

권위를 나타내는 겁니까?

보여줄 게 없어 그랬나요?

 

그다음 건물이 업무시설로 보입니다.

정청(正廳)이라는 곳입니다.

본관 건물인 셈이겠지요.

안으로 들어가니 그곳에 양쪽으로 두 개의 건물이 있어 각각 좌청과 우청이리고 부릅니다.

 

개봉부 정청 앞에는 커다란 돌이 하나 서 있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여기에 근무하는 관리의 머리는 돌머리라는 의미인가요?

아니면 돌처럼 변치 말라는 의미일까요?

이 돌은 계석명(戒石銘)이라는 돌인데 관리들이 평소 마음에 새길 제법 유명한 글을

적어놓은 것이라 하니 교실에 붙인 교훈이나 급훈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요?

집에도 있는 가훈 같은 것 말입니다.

 

정청 양쪽 옆으로는 좌청과 우청이라는 건물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예전 이곳에 근무했던 제법 유명한 사람을 마네킹으로 만들어 전시해 놓았습니다.

위에 보이는 마네킹이 1.058년 이곳 판관을 지낸 사마광(司馬光)의 모습입니다.

그는 정치가이며 시인이며 학자로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하더군요.

사마광이 여기에서 일을 했던 판관이었나 봅니다.

 

개혁가 왕안석의 급진적인 개혁에 반대해 보수적인 견해를 견지했으며 유명한

중국 역사서인 자치통감을 편찬한 일은 후세에 대단한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합니다.

오늘도 무척 바쁜가 눈길조차 주지 않네요.

佳人이 칭찬했다고 쑥스러워 고개 숙이는 거죠? 그쵸?

 

이 사람은 1069년 개봉부 판관을 역임한 소식(蘇軾)의 조각상이네요.

소식은 우리에게 소동파(蘇東坡)라고 더 널리 알려진 인물이지요.

당송 8대 가에 속할 만큼 아버지와 동생과 함께 유명한 집안 출신이라네요.

소동파도 왕안석의 정책에 비판적인 견해를 밝히다 스스로 지방근무를 청하여

항저우에 갔다고 합니다.

그게 밀려서 내려갔는지 아니면 스스로 원한 일인지는 당시의 상황을 보아서 판단할 일이지요.

 

그가 자신을 동파라 칭한 이유로는 한때 필화사건을 겪으며 어사대에 체포돼 압송되었으나

다행히 사형은 면하고 좌천되어 간 곳이 황주라는 지역으로 그곳 생활이 비참하여 부인은

양잠을 했고 소동파도 병영으로 있는 땅을 빌려 먹고살기 위해 농사를 지었다 하네요.

그 땅을 동쪽 언덕이라는 의미의 동파(東坡)라 했고 자신을 동파 거사라 불렀다 합니다.

그 유명한 적벽부가 지어진 곳도 바로 그곳에서 생활할 때 지은 것이라 합니다.

만약 서쪽 언덕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면 동파가 서파가 되었을 겁니다.

 

그가 항저우 서호의 확장공사를 할 때 인부들에게 먹였다는 돼지고기가 지금도

항저우 지방에 가면 지역 음식으로 유명한 동파육이라는 음식입니다.

그때 특허라도 냈더라면 생활이 조금은 나아졌을 텐데...

동파육은 우리나라 단체여행객에게 특식이라는 이름으로 제공되는 요리 중 하나일 겁니다.

 

우리에게 포청천이라는 드라마를 통하여 널리 알려진 포청천은 이름이

포증(包拯)(999-1062)이며 안휘성 합비사람으로 1.922년 처음에 진사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으나 나이가 드신 부모 봉양을 위해 사임했다고 하네요.

정말 싱거운 사람이군요?

그럼 부모 나이도 모르고 시험을 봤다는 말입니까?

효자였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이야기죠? 그쵸?

아닌가요?

합격에 대한 자신이 없이 그냥 시험을 쳤다가 얼떨결에 합격해버렸나요?

 

10년의 세월이 흐른 1.037년 다시 관직에 오른 후 드디어 1.056년 개봉부 지부가 되어

당시 수도였던 개봉에 발을 디뎠답니다.

당시 북송은 부패가 극에 달했고 특히 개봉부에는 뇌물과 일부 왕족들의 방자함이

극에 달해 도저히 국법으로는 다스릴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합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 했습니까?

중국이라는 나라는 뭐 지금이라고 그때와 상황이 다를까요?

그 때문에 중국이라는 나라는 영웅 천하이잖아요.

 

부임 당시에 관아에 고소할 때는 고발문을 써서 관아에 제출하게 되어 있는데 이게 관아의

관리에 의해 지부에 전달되었고 더군다나 글을 모르는 사람은 고발조차 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어디 중국 글자가 만만한 글자인가요?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 싶은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펴지 못하는 이가 무척 많았을

것이며 그러다 보니 관리에 의해 전달이 무산되고 변질하기 일쑤였고 고발장 제출에 따른

뇌물 또한 생겨날 정도였다니...

중국의 글자란 소수의 배운 자를 위한 글자라는 말이 되겠네요.

 

그래서 포증이 생각해낸 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신문고와 같은 북이나 징을 이용해

억울한 사연을 알리게 북과 징을 관아 앞에 매달아 놓게 변경했다 합니다.

지혜로운 포 서방이었습니다.

포증은 특히 친구나 친척에게는 더 엄격하게 법을 적용했다 하네요.

 

이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말입니다.

당시 인종 황제는 이런 포증을 몹시 신임하여 추밀부사로 승진시키기까지 했답니다.

자신에게는 무척 엄격하게 대하다 보니 그의 집안 살림은 일반 백성과 다름없을 정도로

가난하였다 합니다.

그는 유서에 후대 자손이 벼슬을 하다가 탐관오리죄를 범하면 집에 들여놓지도 말고

죽어서도 포 씨 집안의 선산에 묻지도 못하게 하였다 하네요.

우리나라는 그런 사람이 민주투사도 되던데...

 

중국에서는 45라는 숫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합니다.

나이가 45살이 되면 작년에 44살이었다거나 내년에 46세가 된다고 하네요.

그 이유가 포증의 나이가 45살 때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대단히 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라

하고 45살이 되면 악귀를 쫓아준다는 부적을 몸에 지니고 상갓집 음식도 먹지 않는다 하네요.

내일은 작두를 만나 볼까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사람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 그 자체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곳을 거쳐간 수많은 사람은 모두 그 마음속에 무엇을 품고 살았을까요?

그중에 포청천의 마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