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4. 14. 08:00ㆍ중국 여행기/산서성(山西省)
중국의 작은 마을에서 이런 모습을 보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마을이라 하면 우리 이웃이 사는 그런 곳이 아니겠어요?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며 양보했던 이야기가 남아 있고 흥부와 놀부도 있고, 변학도와
춘향이의 이야기도 남아 있고... 그런데 젠장... 여기는 전쟁의 달인이 살았던 마을인가 봅니다.
정말 중국에는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한 일들이 많이 있었나 봅니다.
비록, 우리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은 곳이지만, 이런 작은 마을의 지하에 요새를
만들어 놓고 마을도 골목마다 전쟁을 대비하여 만든 모습을 볼 때 이들이 얼마나 전쟁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고 살았나 알 수 있네요.
땅굴을 나와보니 바로 앞이 까마득한 절벽입니다.
그러니 외부사람은 이곳의 출입문을 도저히 찾을 수 없게 하여 놓은 곳이죠.
사람도 다니지 않는 절벽 건너편에서 유심히 찾아야 겨우 입구를 발견할 수 있는 곳입니다.
더군다나 입구를 나무로 가려놓기라도 한다면, 10년 차 며느리인들 찾을 수 있겠어요?
이제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살펴보렵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군사시설 외에 이 장벽 촌에는 종교시설이 무척 많습니다.
많다고는 하지만, 손바닥보다 조금 큰 작은 마을이라 16개나 되니 많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사람의 힘만으로 외부의 침입자를 방어하기 어려우니 귀신까지 동원한 게 아닐까요?
그런데 장비 마을의 모든 사찰이 죄다 성벽 담장 위에다 만들어 놓았습니다.
왜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그 불편한 진실은....
그러니 성벽은 귀신들이 지키고 사람은 지하요새로 숨어든다는 말인가요?
이 마을을 공격하는 군사는 먼저 귀신과의 전투에서 승리해야
마을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이겠군요?
우리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 것은 왜 이런 작은 마을에 이런 작지만 강한 놈을 만들었느냐입니다.
큰 도시라면 충분히 이해하겠는데 이곳은 너무나 작은 마을입니다.
그렇다고 이곳이 어느 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거점마을도 아니고 말입니다.
작은 마을이기에 군사조차 많지 않았을 거 아니어요?
위의 사진에 보이는 나무는 수령이 1.000년도 넘은 고수(古樹)입니다.
수종은 괴포류(槐抱柳)라고 하며 지에시우 시에서 보호수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습니다.
이 나무는 장비 마을의 비밀을 알고 있을까요?
이 작은마을이 왜 이런 어마어마한 군사요새로 만들어졌는가에 의문이 생겼습니다.
오늘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렵니다.
이 마을은 수나라 장수인 유무주라는 사람이 당나라의 이세민과 마지막 결전을 위해 만든
군사마을이라 알려졌습니다.
물론 진실 게임을 하듯 아직 역사적으로 고증되지는 않았지만,
마을에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이야기라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 수나라 황제인 수양제 양광은 안으로 만리장성의 축조와
항주까지 잇는 대운하 공사와 뤄양에 동경성까지 만드느라 민심이 흉흉한 데다 고구려와
세계대전에 버금가는 5전 3선승제인 월드시리즈를 벌여 3연패로 박살이 나며 국운이
저녁에 서산을 넘는 석양처럼 기울기 시작합니다.
아니군요?
이미 수문제가 고구려에 집적거리다가 먼저 한번 얻어터졌으니 명실공히
7전 4선승제에서 싹쓸이당했군요?
그러길래 바보같이 왜 고구려와 전쟁은 했느냐고요~
바보스러운 수양제는 머리가 무척 나빴나 봅니다.
나라가 자빠져가는 판에 왜 고구려와 죽기 살기로 싸웁니까?
하긴 북쪽의 오랑캐를 모두 제압했으니 고구려와 세계대전에 버금가는 전쟁을 함으로
패권을 잡기 위해 했을 겁니다.
전투란 군사가 많다고 이기는 게 아닌데 수나라는 군사 숫자만 믿고 덤볐습니다.
지금도 중국이 엉뚱한 말을 가끔 하던데 이게 사람 숫자만 믿고 하는 게 아니었나요?
중국의 이런 생각은 그 역사가 무척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겠죠?
게다가 흉년까지 겹치고 민심이 흉흉해지며 지방의 토족들이 서서히 민심을 등에 업고
하나 둘 등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그중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지요?
대업 11년(615년), 수양제에게 발탁돼 우효위대장군을 지낸 뒤 태원도 안무대사를 거쳐
태원유수(太原留守)에 올라 장안성의 동쪽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이연(李淵)도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이연은 사실 수양제와는 남남이 아니지요.
이종사촌 형뻘이 이연이라 했던가요?
그러니 황제 자리를 두고는 남보다 더 못한 셈입니다.
이연이 잘나서 그 자리에 올렸나요?
큰 이모가 날이면 날마다 찾아와 칭얼거리니...
자리 하나 마련해 준다는 게 그만 너무 힘을 쓸 자리를 마련해 준 모양입니다.
이연은 617년 3명의 아들을 거느리고 장안성을 함락한 뒤 당(唐)을 세우고 고조로
즉위했지만 그러나 수나라의 장수와 유민들은 처음부터 당나라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하게 되었다 하네요.
원래 어느 나라나 손바뀜이 있을 때 의리를 지키느냐 아니면 부귀영화를 쫓느냐의 갈등을 겪게
되는데 이때 북방의 유목민 돌궐 족의 지지를 받고 있던 장수 유무주(劉武周)가 우리가 찾아온
장비 마을을 거점으로 반격을 꾀하게 되었다 합니다.
이곳이 바로 태원과 멀지 않고 뤄양과의 중간 정도라고 하니까요.
원래 이런 혼란한 시기가 오면 여기저기서 모두 황제라 하고 용을 꿈꾸잖아요.
우리는 이런 사람을 일반적으로 "개나 소나"라고 표현합니다.
그 중에 잘난 개나 소가 용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다시 말해 용은 개나 소 중에 잘생긴 동물입니다.
당나라 무덕(武德) 2년(619년) 유무주와 위지공(尉遲恭)이 장비 꾸바오에 제대로 된
성벽을 쌓고 땅굴을 파기 시작했답니다.
이연이 정한 무덕과 마찬가지로 유무주는 천흥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답니다.
그렇다면 유무주는 수나라를 되찾겠다는 뜻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정권을 만드는데 앞장선 이연의 둘째 아들 이세민(李世民)과의 일전을 위한
근거지가 필요했던 것이며 비록 수나라는 사라졌지만, 그는 수나라의 복원보다는 사실,
자신이 이연과 겨루어 황제의 꿈에 취했던 겁니다.
그에 대한 근거로 이미 이곳에 자리를 잡으며 스스로 자신을 왕이라 칭하고 국호를
위천흥(爲天興)라 하고 스스로를 정양가한(定楊可汗)이라 칭했던 것으로 보아서 말입니다.
가한이라는 칭호는 우리도 알고 있는 말로 몽골에서는 칸(Khan)이라고 하고 돌궐족에게서도 왕이라는
의미며 물론 돌궐의 후예라 하는 튀르크족이 세운 터키에서도 칸이라는 말은 왕을 이르는 말이고
우리나라 신라에서도 마립간(麻立干)은 왕을 부르는 말이잖아요.
세상을 품에 안아보려는 거대한 용꿈을 꾼 사내였던 유무주는 안타깝게도 그의 용꿈은 개꿈이 되고
이세민이 꾸었던 꿈에 용의 날개만 하나 더 달아준 셈이 되었습니다.
젠장! 이렇게 용꿈과 개꿈은 끗발 하나 차이인가 봅니다.
이곳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에서 이세민에게 패한 유무주와 그를 따르던 군사 모두는
이 마을 안에서 도륙을 당했을 것이고 그들이 흘린 피는 내를 이루어 지금 위의 사진에 보이는
북문을 통하여 꿈과 함께 흘러갔을 겁니다.
땅굴 안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군사는 땅굴이 무덤이 되었을 것이고 그 안에서 모두 매장되었을
것이기에 역사의 기록에는 유무주는 이때 이곳을 탈출해 돌궐족이 있는 북으로 피신했다가
나중에 다시 옛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이 지방으로 숨어드는 도중에 발각되어 붙잡혀 결국,
그가 꾸었던 황제의 꿈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합니다.
사내로써 제법 거창한 꿈을 꾸며 한 세상을 멋지게 살아보려 했지만, 결국....
이렇게 하여 탄생한 장비 꾸바오는 정말 교묘한 마을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합니다.
지하 땅굴은 물론 지상의 마을 자체가 전쟁을 위한 미로와 같은 그런 마을이었던 겁니다.
일부당관 만부막개(一夫當關 萬夫莫開)라고 제대로 만든 문은 한 사내가 막아서면
만 명의 군사도 쉽게 돌파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하네요.
정말 만 명이 열어보기나 하고 하는 말입니까?
문을 열기 위해 만 명이 달라붙을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물론 중국의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그러니 이 마을에 살았던 사람에게는 전쟁은 그들의 생활이며
인생의 목표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땅굴은 입체적인 상, 중, 하 3층 구조로 이뤄졌습니다.
제일 위층은 지면에서 1m 안팎, 중간은 4~8m, 제일 아래층은 17~24m의 깊이로 만들었고
땅굴 안의 폭은 약 1.5m와 높이 약 2m의 지하 통로를 만들었습니다.
그 땅굴 안에는 초소가 있고, 말을 키우는 여물통이 있고, 식량 창고가 있고, 매복용 굴이 있고,
통기구, 배수구가 있습니다.
각층은 상하 좌우로 이어져 공격, 방어, 후퇴, 저장, 탈출 등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정도의 시설을 짧은 시간 안에 만든다는 일은 역시 중국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겁니다.
말을 키운 여물통은 남아있지만, 소를 키운 흔적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소는 누가 키우고...
이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면 우물 속이나, 벼랑으로 이어져 땅 위에 있는 성곽, 거리,
일반인이 거주하는 민가와 함께 어우러진 땅굴의 출입구는 규모가 크고, 숫자도 많지만
아주 체계적으로 만들어 놓았다 합니다.
이는 고대 중국의 군사문화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해야 할 겁니다.
아주 재미있는 출입구는 가정집 벽장 안에 만들어 놓았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벽장으로 통하는 문은 모두 폐쇄해 버렸다 합니다.
높은 성벽과 골목은 바로 전투에 돌입하면 들어온 군사는 독 안에 든 쥐와 같은
신세가 된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장비 마을에서 남문과 북문을 일직선 상에 배치하지 않았습니다.
효과적인 방어를 위해 풍수설도 따르지 않았답니다.
이 마을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인명피해를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피해를 보는 인명이란 지휘자의 처지에서는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수단에
불과하기에 민초란 어느 사람의 도구며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마을로 들어오며 얼핏 보면, 장비 마을은 성벽만 잘 쌓아 올린 보통의 군사 도시 같지만,
속까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천 년의 땅굴을 지닌 독특한 복합 역사문화 마을인 셈입니다.
정말 흥미롭고 재미있는 마을입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중국 금융의 발상지인 핑야오(平遙) 고성의 서남쪽 개휴(介休)시에 속한
장비 꾸바오(張壁古堡 : 장벽고보)는 중국 제일의 옛 군사보루(中國第一軍事古堡)인 셈입니다.
미엔산(綿山 : 면산) 아래 용과 봉황이 휘감고 있는 형상을 한 곳이 바로 이 마을입니다.
옛 보루와 땅굴, 궁전묘우(宮殿廟宇), 물고기 모양의 골목(魚型巷), 용 모양의 출입구(龍型口),
공작 유리 등 다양한 건축의 보물 창고인 셈입니다.
진무전(眞武殿), 공왕전(空王殿), 삼대토전(三大土殿), 이랑묘(二郞廟), 그리고 관제묘(關帝廟) 등이
있는데 전쟁의 제왕인 관우까지 불러 모셨으니 조조의 100만 대군 정도는 와야
장벽 촌을 함락하지 않을까요?
헐!
그런데 이 시설의 대부분이 모두 성벽 위에 있다는 점입니다.
아주 귀신으로 하여금 앞장서 성벽 위를 지키라 했나 봅니다.
과연 귀신이 성벽 위를 지키는데 이곳을 넘볼 인간은 바보였을 겁니다.
그중 제일 유명한 절이 명나라 시기에 지어진 공왕불행궁(空王佛行宮)이라네요.
이 절은 장벽 촌 북쪽의 성문 위에 있는데 노란 유리 기와를 지붕에 얹어
아주 정교하게 조각을 해놓았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기에는 유리 기와는 황제가 거처하는 황궁의 지붕에만 올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 황제가 거처하기라도 했나요?
이 또한 국가 기밀이라 자료가 없다고 할 건가요?
이 절에서 꼭 보아야 할 것은 특이한 유리로 만든 비석입니다.
아마도 유리로 만든 비석은 흔치 않을 겁니다.
그러나 이곳 장비 마을에는 두 개의 유리 비석이 있습니다.
공왕불행궁의 복도 앞쪽에 공왕불의 수련과정을 적어놓은 유리 비석과 공왕불행궁의
축조과정을 적은 유리비석 등 두 개의 희귀한 유리 비석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비록 사진을 통해 보시지만, 정말 유리로 만든 비석을 보고 계시는 겁니다.
흔히 볼 수 없는 유리로 만든 비석을 보셨습니다.
북문은 통상적으로 만드는 그런 성문이 아니고 위의 사진에 보이듯 완전히 'ㄱ' 자로 꺾이는
성문으로 모르고 덤볐다가는 큰코다치겠어요.
지금 위의 사진이 바로 희귀한 모습의 성문입니다.
사진으로나마 보시기 바랍니다.
위의 사진이 바로 용의 꼬리 부분인 북문입니다.
용의 꼬리란 늘 일직선이 아니고 휘어졌기에 이 꼬리로 한 방 때리면 바로 보낼 수 있잖아요.
장벽 촌은 오래전부터 도자기업이 발달했고 양조업도 번창한 곳이라 합니다.
전통 수공예도 발달한 곳입니다.
백자와 유리제조가 유명해 이런 비석도 유리로 만들었고 그래서 유리로 만든 많은 조각이
장벽 촌 곳곳에 남아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나누어준다 하네요.
천천히 돌아다니며 예술작품과도 같은 유리공예품을 살펴보며 다니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입니다.
골목은 이리저리, 꼬불꼬불 이어지지만 교묘하게 막힌 듯하다가 열려있고
열린 듯하지만, 끝에 가보면 막혀있어 입구가 있어 들어가면 출구를 좀체 쉽게 찾을 수 없고,
다시 입구를 되돌아가려 해도 이 또한 여의치 않습니다.
마을 사람들이야 늘 다니는 길이라 쉽게 다닐 수 있지만,
우리 같은 사람은 왔다 갔다를 해야 합니다.
장비 촌의 건축은 특이합니다.
보(堡) 위에 묘(廟)를 짓고 당(堂) 위로 루(樓)를 세웠습니다.
방(房) 위에 각(閣)을 올리고 성벽 사이에 숨겨진 암문(暗門)을 냈습니다.
그 암문은 외부사람은 쉽게 발견할 수 없는 그런 문이겠지요.
이렇다 보니 보중보(堡中堡), 항중항(巷中巷), 택중택(宅中宅), 문중문(門中門)의 체계가 만들어진데다
땅속으론 총 3,000여 m에 이르는 수, 당 시대의 지하통로까지 있어 사통팔달,
어느 한 곳으로 통하지 못할 곳이 없습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장비 꾸바오를 중국의 10대 매력 마을로 선정했나 봅니다.
이 근처에 오시면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은 곳이니 한 번쯤 들려보는 것은 어떨까요?
오늘의 계획은 아침에 장비 꾸바오(張壁古堡 : 장벽고보)라는 마을을 다녀오고 후커우 폭포를
보기 위해 린펀을 거쳐 후커우로 가기 위한 가장 가까운 마을인 지시엔까지 가는 일입니다.
그러나 중국에서 먼 거리를 여러 번 차를 바꾸어 타고 간다는 게 계획대로 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대한 후커우 가까이 가서 숙박할 예정입니다.
마침 장비 촌을 구경하고 마을 앞에 나오니 지에시우로 갈 버스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만약, 저 차를 놓치면 2시간 후에나 버스가 운행될 겁니다.
떠나려고 하는 버스를 우리나라 말로 "같이 가요~"라고 크게 외치니 서는군요.
급하면 통한다고...
우리 이제 후커우 폭포로 함께 가실까요?
가는 길에 우리 부부는 참으로 당황스러웠지만, 감동하는 일이 생겼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장비 꾸바오라는 곳은 아주 오래된 군사 고보입니다.
수나라의 퇴장과 맞물려 새로운 세력이 우후죽순처럼 궐기할 때 유무주라는 사내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황제의 꿈을 키우기 위해 만든 군사 마을인 셈입니다.
비록, 실패하여 우리 기억에조차 남아있지 않지만, 성공했다면 당나라 이연을 대신했을 인물입니다.
운명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이 운명에 눌려 질식할 수도 있고 운명의 날개에 올라탈 수도 있습니다.
지금 佳人은 운명과 어떤 씨름을 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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