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8. 08:00ㆍ중국 여행기/산서성(山西省)
우선 먼저 이백부터 먼저 만나보렵니다.
이백이라 함은 唐代에 제법 이름깨나 날린 명 시인이 아니겠습니까?
먼저 눈에 띄는 게 "장관(壯觀)"이라는 두 글자입니다.
당나라 개원 23년인 735년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이 친히 쓴 것이라 하네요.
나이 34살에 이백이 이곳에 배낭여행 왔다가 현공사의 모습을 보고 잠시 혼절했다가
정신을 차린 후 생각난 단어가 바로 장관이었기에 이런 글을 남겼다 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그 장관이라는 글을 자세히 보면 壯이란 글자 옆에 점 하나가 더 있습니다.
壯이란 글자 오른쪽에 점이 보이시죠?
물어보나 마나 너무 멋진 모습이라 강조하려고 그리했다 하겠지요.
저도 이제 중국을 어느 정도 돌아다니다 보니 말하지 않아도
눈치로 아는 처지가 되었네요.
이백도 별거 아닙니다.
그런데 이게 정말 이백의 글씨일까요?
만약, 덜수가 여기 왔다면 당연히 기념으로 하나 남기고 싶을 겁니다.
이백이 쓴 글자 그 옆에 점 하나 더 찍고 가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이백보다 더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말입니다.
이백이 쓰면 오래도록 남고 덜수가 한 마디 쓰려고 하면
낙서금지가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모습을 장관이라 하나요?
이백이라는 사람도 정말 이상한 사람이네요.
장관이 아니라 기묘하다는 말인 奇觀이 더 어울리는 말이 아닌가요?
佳人 생각에는 이백이 보고 놀란 쉬앤콩쓰의 모습이 장관이 아니고
이백이 썼다는 글씨가 장관입니다.
아닌가요?
분명히 달라 보이는 저 돌이 왜 저기 굴러 떨어져 있답니까?
저렇게 서 있는 모습도 기묘합니다.
이백에게 글을 쓰라 마치 가져다 세워놓은 것으로 보이는 게 장관입니다.
혹시 이백이 현공사를 보고 장관이라 생각하지 않고 글을 썼다는
저 돌을 보고 장관이라 한 것은 아닐까요?
저곳에 저 정도 크기의 글을 쓴다는 게 쉬운 일이 분명 아닐진대
이백이 붓을 들어 썼다고 우기니 우짜면 좋겠노~
이백이 이곳에 와 절벽에 매달린 현공사를 바라보고 절의 모습에 감탄한 후
웬일인지 시를 짓지 않고 붓으로 바위에 글자를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모습에 감동한 나머지 더 임팩트가 강한 감정 표현하기 위해
점 하나를 더 찍었다고 전해집니다.
어떤 말보다 그게 더 효과가 있었다는 말이겠지요.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그때 쓴 글자도 희미해졌겠지요.
그래서 다시 글자를 복원하면서 점 하나도 같이 조각돼 되살아났다고 하는데.....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백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었겠네요.
그런데 죽은 이백을 불러내 물어볼 수도 없고..
죽은 자가 말을 할 리도 없잖아요.
어서 말을 하라고 재촉해도 말입니다.
정말 그럴듯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佳人도 이 말을 듣고 정말 대단하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기 바위 말입니다.
그 바위에 글을 쓸 정도의 큰 붓이 과연 있었을까요?
만약 붓이 있다 하더라도 이백이 천하장사도 아니고 로봇 태권 브이처럼
무쇠 팔도 아니기에 저곳에 글을 쓸 정도의 붓을 들 수 없잖아요?
서안에 가면 고루 위에 있는 현판에 文武盛地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글이 당나라 8선 중 하나라는 한종리가 쓴 글이라 합니다.
재미있는 일은 武자의 오른쪽 획이 부자연스럽게 조금 비켜 나 있지요.
잘못 쓴 글일지라도 중국만 가면 전설이 됩니다.
이 글을 쓴 한종리는 허름한 거지차림으로 어느 노인네 부부가 운영하는 서안 남문 부근의
여관을 기웃거리자 노부부는 그를 딱하게 생각하고 안으로 불러 여관에 머물게 했답니다.
마침 그때 성문을 수리하는 중이었고 그 문에 걸 현판을 공모하는 중이었다 합니다.
만약 당선만 되면 은 200량이나 준다는 조건이었다네요.
거지차림의 한종리는 노인에게 붓과 먹을 달라 하자 집에 아무것도 없어 망설이니
한종리는 뒷마당에 있는 마당을 쓰는 빗자루를 들고 글을 써서 노인에게 건네고
응모하면 틀림없이 당선될 것이고 은 200냥으로 그동안 재워주고 먹여준 것의
수천 배는 될 것이라 했다네요.
그런데 너무 잘 쓴 글이나 애석하게도 武 자의 오른쪽에 점 하나가 빠져
모든 사람이 애석해하게 되었답니다.
물론 1등으로 당선되어 점이 없어도 현판에 걸렸답니다.
현공사에는 이백이 점 하나 더 넣고 서안에서는 점 하나가 빠지고...
환장하겠습니다.
점 하나 가지고 너무 티 나게 장난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비림에도 임칙서가 장난했지요?
다음날 현판 아래 그 거지차림의 한종리가 나타나 먹물을 묻힌
빗자루를 냅다 성문 위로 집어던지니
정확하게 武 자의 오른쪽에 날아가 점이 찍혔답니다.
이번에는 빗자루 가지고 장난합니다.
무슨 한종리는 오즈의 마법사나 된다고 합니까?
그곳에 모여있던 사람이 좋아하며 손뼉을 치고 뒤를 돌아보니
한종리는 홀연히 사라지고 없더라 내요.
정말 중국사람들 빗자루로 많이 맞아야 합니다.
그곳 높이가 33m로 빗자루가 날아갈 수 있는 한계를 벗어 낫지요.
혹시 서안에 가시면 고루에 가보시고 빗자루를 한 번씩 던져보세요.
그리고 그곳에 쓰여있는 현판을 자세히 보시면 文武盛地라는 현판이 보이실 겁니다.
반대편에는 성문우천(聲聞于天)이라고 타산지석이라는 귀절이 나오는 시경 소아편의
학명이라고 학의 울음소리에 나오는 말이고요.
그러면 武 자의 점을 유심히 보세요.
조화에 어긋나 조금 비켜나 있습니다.
그 글자나 보시려고 가실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옛날에 갔을 때 찍어놓은 사진이 여기 있으니 그냥 사진으로만 보세요.
차라리 그곳에서 빗자루 던지는 이벤트나 하는 잔치를 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중국이라는 나라는 글자의 획 하나에도 전설이 있는 나라입니다.
물론 중국인도 그게 말도 되지 않는 헛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겠지만,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정말 佳人은 제 자신에 화딱지가 나요.
있는 그대로 믿지 못하고 자꾸 태클 건다는 인상을 주어서 말입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여러분이 제게 욕하는 것 다 알지만, 의심스러운 데 우짭니까?
왜 이백만 다녀갔겠어요.
佳人이 갔던 중국의 유명한 관광지 대부분은 쉬샤커라는 명나라의 배낭여행자인
서하객이 다녀 갔더랬지요.
쉬샤커 그 사람도 빨빨거리고 모두 훑어버렸더군요.
그래서 이곳에서도 흔적을 찾아보았지요.
어멈! 아니나 다를까 흔적을 남겼네요,
우리의 호프 덜수처럼 정말 빨빨거리며 많이 다녔네요.
덜수와 함께하는 佳人의 여행기는 이백도 불러내고 서하객도 불러내고
한종리까지 불어내어 태클 걸고 갑니다.
왜?
심심하니까!!!
천하거관(天下巨觀)이라고 글을 남겼네요.
관거하천입니까?
오른쪽으로 읽어야 하나 왼쪽으로 읽어야 하나 중국에서 글을 읽을 때마다 헷갈려 못살겠어요.
장관이나 천하거관이나 같은 말이 아닌가요?
차라리 덜수의 제안대로 奇觀이라 하면 어떨까요?
그러면 빗자루로 맞는다고요?
얼마 전 타임지에서는 거시기하고 기이하고 위험해 보이는 세계 10대 건축물에
그리스 메테오라 수도원, 피사의 사탑 등과 함께 이곳 현공사를 선정했다고 합니다.
그런 곳에 선정되지 않았더라도 이곳은 오랜 세월 바위에 저렇게 아등바등
붙어 있었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거시기하고 기묘한 모습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이곳에는 북위가 다통에 도읍을 정했을 때 옛 군사도로가 있었다 합니다.
지금은 이곳에서 항산으로 가는 길에 터널을 뚫어 쉽게 다니지만,
당시는 절벽을 타고 넘어가는 잔도를 만들어 다녔다 합니다.
아직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하여 찾아보았습니다.
여기에 그 흔적이 남아 있네요.
저렇게 절벽을 타고 가며 바위를 구멍을 뚫어 그 안에 나무 기둥을 박아 차례로 끼우며
길을 만들며 갔던 모양입니다.
지금이야 여러 가지 기계가 동원되어 잔도 만드는 일이 쉽겠지만, 옛날에는 일일이
손으로 바위를 구멍 내며 만들었기에 시간도 많이 걸렸을 것이고 많은 사람이
공사 중 죽거나 다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이 흔적의 위치는 현공사가 있는 협곡 제일 안쪽에 있으니 이곳을 가시는 분들은
한 번씩 찾아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현공사가 있는 절벽 쪽에 이런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물론 잔도를 만들었다가 얼마 전에 철거한 모습입니다.
북위 시대에 만든 잔도와는 많이 다른 모습입니다.
그때는 커다란 구멍을 뚫고 큰 통나무를 박아 길을 만들어 나갔지만, 후대에 만든 잔도는
철근이 들어갈 정도의 작은 구멍만 만들어 철근을 끼워놓았습니다.
조금은 흉물스럽게 남이 있네요.
철거하려면 깨끗하게 정리하지 이렇게 흉물스럽게 남겨 놓았습니다.
그 부근에 위의 사진과 같은 글이 절벽에 남아 있습니다.
무신년에 쓴 글이라는 것은 선명하게 남아있는데 누가 썼는지는 글이 분명하지 않네요.
덜수가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글씨 위에 매단다는 의미인 현(懸)이라는 글자가 있고 그 아래
공중견불(空中見佛)이라는 글이 남아 있습니다.
"하늘에서 부처를 보다!"라는 의미로 글을 써놓았지 않나 생각되는데
그러면 "공중에서 부처를 보다."라는 글을 걸어놓았다는 의미입니까?
내일은 현공사 위로 올라가 천천히 걸어가며 요모조모 살펴보렵니다.
오늘 이야기는 조금 거시기하죠?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참 특이한 절입니다.
옛사람의 특이한 생각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냥 산속이나 평지에 만든 절이라면 이곳을 많은 사람이 찾지 않을 겁니다.
절벽에 걸어놓은 절이기에 많은 사람이 비싼 입장료를 치르고라도 찾아옵니다.
현공사는 다른 곳과 차별화 전략에 100% 성공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꼭 한 번은 들려보아야 할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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