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후와 만두, 그리고 이화원.

2012. 1. 12. 08:00중국 여행기/베이징(北京)

10월 17일 여행 7일째

오늘은 이화원을 가보렵니다.

이화원은 중국 최대의 황실 정원이라고 했나요?

만약, 이화원을 구경하고 오후에 시간이 나면 그 옆에 있다는 원명원에도 다녀오렵니다.

오늘이 베이징에서의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 밤에는 미리 기차표를 예약한 대로 내몽골의 성도라는 후허하오터를 향하여 갈 예정입니다.

 

어제저녁에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서 구부리라는 만두가게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서태후 마네킹을 이용한 선전을 하는군요.

이 가게는 원래 톈진에 있었던 만두가게라 하더군요.

그런데 당시 서양 연합군과의 혼란한 격동기에 우연히 서태후가 톈진의 구부리라는 만두가게를

들렸던 모양으로 워낙 식탐이 많고 미식가였던 서태후는 그곳에서 만두를 맛본 후

그만 그 맛에 반한 모양입니다.

나중에 전쟁을 피해 시안으로 잠시 몸을 피했을 때 시안의 모든 요리사에게 명령하여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을 올리는 요리사는 죽이겠다고까지 하였다고 하네요.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서안의 유명한 108가지 만두라고 하더군요.

 

서태후와 만두는 무척 관계가 깊은 모양입니다.

佳人에도 만두에 얽힌 눈믈 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아마도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이었을 겁니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친구 하나가 어느 날 佳人에 만두 먹으러 가자고 하더군요.

당시 우리는 무척 가난하여 용돈이라고는 땡전 한 푼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조금 부유했나 봅니다.

둘이서 만두가게를 들어가 그 친구는 고기만두를 시켰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가 나오자...

저는 그 친구를 따라 만두를 초간장에 살짝 찍어 먹어 보았는데....

 

그때 태어나 처음 고기만두를 먹었을 때입니다.

그 고기만두가 입안에서 금방 녹아 없어지는 겁니다.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맛난 음식은 처음 먹어보는 것입니다.

이런 맛은 세상에 없는 하늘의 맛이라 생각했습니다.

 

저요~ 그때 결심했어요.

이다음에 돈을 벌면 매일 만두만 먹겠다고요.

그것도 고기만두로 말입니다.

 

그 후 그 만두 맛을 잊지 못해 드디어 용기를 내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전혀 하지 않았던 거짓말로 엄마를 속여 돈을 타낸 것입니다.

그 돈으로 그 친구를 불러 만두가게에 가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기만두를 시키고 먹었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 걱정이 태산 같아 그 만두가 처음 먹었을 때 그 맛이 아니더군요.

 

얼마 후 저는 드디어 엄마한테 거짓말이 탄로 났고 엄마에게 빠떼루보다 더 큰 벌을 받았습니다.

어떤 말로 이 순간을 모면할지 고민이 생길 때는 진실을 말하라 했습니다.

그게 가장 확실한 해결책이 될 터이니까요.

그 이유에 대해 모두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그리고 엄마를 따라 그 만두집에 다시 가

엄마가 시켜준 만두 한 접시를 먹었습니다.

눈물 젖은 만두를 먹어보셨습니까? 먹어보지 않으셨으면 말을 하지 마세요.

 

지금 그렇게 佳人의 잘못에 빠떼루보다는 만두 한 접시를 사주신 엄마는

이 세상에 더는 안 계십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용서해주시고 만두를 사주신 엄마가 보고 싶습니다.

 

지금도 佳人은 만두를 좋아합니다.

외식을 거의 하지 않지만, 가끔 하게 되면 만두를 자주 먹었습니다.

울 마눌님도, 울 아들도 제가 왜 만두를 외식 메뉴의 제1순위로 두는지

이야기를 하지 않아 아직도 모를 겁니다.

그러나 지금 어떤 만두도 그때의 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엄마가 사주신 눈물 젖은 만두를 먹을 때 그 맛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아직도 만두를 그리는 이유는 아마도 엄마를 그리는 마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아직 그런 맛의 만두를 그 후에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제게는 만두에 얽힌 눈물 나는 사연이 있습니다.

지금도 만두를 보면 가끔 그때를 생각하며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야단을 맞더라도 엄마가 사주신 만두가 그립습니다.

엄마가 일찍 돌아가셔서 살아생전 엄마에게 만두 한 접시를 사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만두에 욕심을 부린 서태후도 울 엄마한테 걸리면 빠떼루를 받을 겁니다.

울 엄마가 서태후보다 더 무서운 분이셨으니까요.

자꾸 서태후가 먹는 거로 가지고 짜증 부리면 울 엄마에게 일러줄 겁니다.

 

오늘은 서태후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 이화원으로 갑니다.

이화원을 이야기할 때 서태후를 빼면 사실 별로 이야기할 게 없지요.

 

숙소를 일단 체크 아웃을 합니다.

그리고 무거운 배낭 두 개는 그곳에 맡기고 저녁에 와 찾아갈 예정이라 이야기합니다.

 

전문 앞 전루 앞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만리장성을 갈 때 탔던 690번 버스를 타면

이곳 종점에서 그곳 종점까지 가기에 중국어를 몰라도 갈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우리가 목적한 곳으로 가는 일이 식은 죽 먹기입니다.

 

이허위엔(颐和園 : 이화원)은 베이징 북서쪽 16km 지점에 있는 중국 최대의 황실 정원이랍니다.

물론 면적 대부분이 호수로 이루어져 있지만, 인공으로 조성된 행궁이었습니다.

북방민족이 중원을 장악하며 가장 고통스러웠던 일이 바로 더위가 아니겠어요?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 등등...

 

여름만 되면 베이징은 대륙성 기후로 찜통더위가 아주 잘 달군

프라이팬에 올라선 느낌이었을 겁니다. 

더위에 평소 적응한 사람도 이곳의 여름은 힘을 쓰지 못하는데 북방의 시원한 푸른 초원을

말달리며 놀던 북방민족에게는 베이징의 더위는 황제고 나발이고 없잖아요.

 

착한 며느리라도 들어오면 아버님 댁에 겨울에는 보일러, 여름에는 에어컨을 놔주지만,

황제 댁에는 들어오는 며느리마다 아버님 신경 쓰는 며느리가 없었나 봅니다.

그러니 시아버지고 나발이고 여름만 되면 강아지 혓바닥 내밀고 체온조절하듯 헥헥거리며

지내다 보니 물가가 그립고 그늘이 그립지 않겠어요?

 

그래서 이들이 생각해 낸 것은 자가발전이지요.

바로 이 여름 행궁입니다.

여름 행궁이란 바로 물가에 잡아야 더 시원하잖아요.

그런데 베이징에 어디 강다운 강이라도 있습니까?

그러니 믿는 게 중국은 사람 숫자라...

 

단순 무식하게 생각하면 금방 떠오르는 일이 무지하게 넓게 땅을 파고 물을 채우는 일입니다.

그게 바로 이화원이나 그 주변에 있는 비스무리한 호수잖아요.

원래 삽질에는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중국이 아니겠어요?

우공의 후손답게 시키기만 하면 대를 이어 열심히 뚫으라면 뚫고 파라면 파는 민족입니다.

 

전설 속의 우공이산의 삽질에서 출발한 중국은 다음에 경항대운하라는 삽질도 하게 됩니다.

또 있지요.

삽질의 종결자라는 만리장성....

우공이산을 특허 낸 중국인이 그러니 이런 곳에 호수를 판다는 것은 아주 초보의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런 삽질이 중국을 더욱 중국답게 만들었다는 생각입니다.

중국의 위대한 유산으로 남게 되었고요.

 

우리의 위대한 선조였던 열하일기를 쓴 연암 박지원 선생께서도 베이징으로 열심히 찾아갔더니

건륭제는 열하에 있는 피서 산장으로 여름 피서를 떠났잖아요.

우쒸~ 베이징이 얼마나 더운데 찾아갔더니 피서 갔다고 하니 환장할 노릇이 아니겠어요?

1780년 6월 25일 한양을 떠나 10월 27일 귀국하셨다 하니

제대로 여름철에 베이징의 더위를 경험하셨을 겝니다.

 

그래서 닷새 동안 또 부지런히 열하로 찾아가 결국, 건륭제를 만난 일화도 있잖아요.

그만큼 북방민족에게는 베이징의 더위는 살인적이었던 모양입니다.

그 죽일 놈의 더위가 이렇게 아름다운 호수를 만들게 하고 후손이 돈을 벌게 했습니다.

 

이화원의 역사는 금나라부터였다고 합니다.

한 15년 정도 팠다고 하던가요?

물론 파낸 흙은 바로 완셔우산(萬壽山 : 만수산)을 쌓았고요.

그때 이름은 금산행궁(金山行宮)이라고 했으며 그 후로는 자금성에 자리 잡은 정권이

아주 사랑했던 곳이 이곳이라는데 여름에 더운데 지들이 사랑하지 않고 배기겠어요?

모두 만들고 보니 3.000여 칸이 넘는 전각과 누각, 정자들이 여기저기 자리하여

인간이 만든 최고의 고전원림이 되었답니다.

 

그 후 청나라의 건륭제 때 확장되었고 다시 서양의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전각이 불타고

허물어진 것을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서태후라는 자희에 의해 대대적으로 리모델링에 들어가

국고가 바닥이 나던지 세상이 망하던지 무조건 자기 자신을 위한 투자를 게을리하지 않았잖아요.

 

맞아요!

서태후가 이런 곳에 돈을 사용하는 바람에 청나라가 자빠졌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생깁니다.

지금 입장료만 해도 일 년에 청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울 예산이 생긴다는군요.

 

그러니 이 두 남녀에 의해 이화원이 발전했다고 할 수 있겠네요.

건륭제야 워낙 쌓아놓은 재산이 많아 더는 세금을 올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한 사람이고

풍류객에, 능력이 있는 사내라 이해할 수 있지만, 자희 쟤는 왜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이런 일에 군비로 준비한 돈도 전용하여 이곳을 재건하는 데 사용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빠떼루 받아야 하지 않겠어요?

 

원래 원림이란 한번 빠져들면 나라 망하기 딱 좋은 일입니다.

춘추전국시대 진(晉) 나라의 헌공(獻公)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새공이 아니고 헌공 말입니다.

 

이웃 나라 여융을 침범하고 여희와 소희라는 미스 여융 자매를

세트로 전리품으로 데려온 일이 있었지요.

세트였는지 마트 1+1 행사 때 데려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헌공은 그런 여희 자매에 빠져 원림을 지어주고 그곳에서 놀다가

나라까지 말아먹은 고사도 유명한 이야기라지요?

 

사실 이화원 리모델링 자금이 해군의 증강을 위하여 독일에 전함을 주문하려고 했던 자금으로

군비까지 전용해 이런 짓을 한 서태후라는 여인은 제삼자의 입장에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여자인가 보네요.

결국, 그 돈이 개인을 위해 사용되는 바람에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보기 좋게 패하고

청나라가 기울기 시작했으나 사실은 이화원이 청나라의 종말의 도화선인 셈인가요?

그 전쟁으로 우리 조선도 중국에서 일본에 암묵적으로 양도한 셈이니 서태후 그녀 때문에

우리나라도 피해를 본 셈이네요.

 

그녀가 마지막 유언으로 남긴 말이 또 걸작입니다.

"앞으로 절대 여자가 정사를 농락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합니다.

환장하겠습니다.

이 심성이 고운 여인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속은 멀쩡한 여자였다는 말이 아닙니까?

 

경국지색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데 예쁘지도 않으며 이런 일을 한 자희라는 여인을 어찌 이해해야 할까요?

너무 야단치면 쟤 또 삐칠까 봐 그만 하겠습니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자희(慈禧)...

무슨 인자함을 베풀었던가요?

또 무슨 경사스러운 일이 많았던가요?

그녀가 인자함을 베푼 것은 민초도 아니고 중국도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진정 베푼 것은 서구 열강에 백은 12억 6.500만 냥이 었으며 할양된 중국의 토지만

7만 제곱킬로미터였습니다. 

혼란의 시대에 태어나 권력을 휘두르며 더 큰 위기로 몰고 간 자희는

중국을 고통과 도탄에 빠지게 했을 뿐입니다.

48년간 대국이라는 커다란 나라를 좌지우지하며 살았던 자희는 진정 행복한 여인이었을까요?

그녀의 일생을 더듬어 보면 정상적인 여자라고는 할 수 없는 일이 참 많습니다. 

 

690번 버스를 타고 8시 35분 전문을 출발해 10시에 이화원 종점에 도착합니다.

종점에서 종점까지 가다 보니 공연히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에 떠올라 구시렁거렸습니다.

어디서 내리느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이 모두 내리면 따라 내리면 됩니다.

버스 요금은 조금 먼 거리라 2원/1인이군요.

내일부터는 이화원을 하나씩 기웃거리며 살펴보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사랑은 증오보다 고귀하고

이해는 분노보다 높으며

평화는 전쟁보다 고귀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희는 사랑보다 증오를, 이해보다 분노를, 그리고 평화보다 전쟁을 택해

그녀가 살아 있었던 세월 내내 청나라는 증오와 분노와 전쟁으로 얼룩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