쳰먼다제로 걸어갑니다.

2012. 1. 11. 08:00중국 여행기/베이징(北京)

오늘 이야기는 천단 북문을 나와 북경의 거리도 기웃거리며 전문까지 걸어서 가는 이야기를 하렵니다.

물론 가는 길에 중국의 골목이라는 후통도 걸어보렵니다.

 

우선 먼저 천단의 북쪽 가장 끝에 있는 황치엔뎬(皇乾殿 : 황건전)을 먼저 살펴보렵니다.

위치는 바로 기년전 뒤에 있습니다.

기년단 북쪽에 있는 황건전은 황천상제(皇天上帝)와 황실 선조의 신위가 보관된 곳이라 합니다.

그러니 이미 황제의 조상과 하늘님이 이미 여러 차례 제를 올리며 만난 사이라 구면인 관계로

한 곳에 놀고 계시는 것이지요.

신의 길이라는 神道를 함께 손도 잡고 걸었다 했지요?

이 건물은 제일 처음 명나라 영락 18년인 1420년에 만든 것이라 하네요. 

 

이곳에는 푸른 바탕에 금색 글씨로 쓰여진 명나라 가경제의 친필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글의 내용보다 편액 주변에 구름 조각과 용 문양이 더 사람의 눈을 끕니다.

이 소리를 가경제가 들었다면 뭐라고 할까요?

 

그러니 가경제라는 황제보다 이 편액을 만든 목공 장인이 더 낫다는 말이 아니겠어요?

우스갯소리로 황제 사인 100장과 목공 사인 한 장과 바꿀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진품명품 프로에 출품하면 표구 값을 더 쳐준다는 말입니다.

 

제사 규정에 따르면 제천행사가 있기 전날 밤 황제는 이곳에서 천제와 조상에게 먼저 향을 피우고

조상에 대한 예를 올린 후 제사를 책임진 신하로부터 내일 제례에 대한 경과와 진행사항을 보고받은 후

비로소 숙소인 재궁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러니 안부인사를 겸한 일차 신고식을 하는 곳이라는 의미일 겁니다.

 

이곳은 제천행사가 있을 때 태묘에 모신 조상 위폐도 함께 이곳으로 와 황천상제(皇天上帝)와 함께 있기에 

이날 만은 조상이 하늘님과 동등하게 맞먹는 날이 될 겝니다.

그래도 갑갑한 태묘에만 있다가 오랜만에 이렇게 나들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게

귀신들에게는 얼마나 즐거운 일이겠어요.

모처럼 날을 잡아 외출하는 전날 밤, 조상귀신은 어린 시절 소풍 가는 전날 밤 잠을 뒤척이는 그런 기분일 거예요.

요즈음 신세대는 해외여행까지 가 그곳에서 제사를 올린다는데...

 

기년문 동쪽에 판차이루(燔柴爐 : 번시로)라는 화로가 하나 있습니다.

이 화로는 녹색 유리 기와로 만들어졌는데 제천 대전이 시작되면 이곳에서 소나무와 잣나무 가지 등을 태워

그 연기로 제신(帝神)을 영접했고 제례가 끝나면 그 불에 행사에 사용된 제수용품과 축문 등을 태웠다 합니다.

물론 축문을 태울 때 황제는 곁에서 꼼짝하지 않고 지켜보았을 겁니다.

 

그 옆에는 리아오루(燎爐 : 요로)라고 횃불을 태우는 화로가 있습니다.

황제가 제단 앞에서 하늘에 제를 올릴 때 이곳에 불을 피워 주변을 밝혔다 합니다.

폼나는 일은 아주 다 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런 게 모두 신비감을 조성하고 제천의식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하는 방법일 겁니다.

 

번시로의 동쪽에도 8개의 톄랴오루(鐵燎爐 : 철료로)가 일렬로 늘어서 있습니다.

제천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이곳에서는 소나무와 잣나무 가지와 송화와 각종 향료를 태워

여기에서 피어오르는 향긋한 냄새와 아련한 연기가 제천행사의 분위기를 한층 업시켜 주었다고 합니다.

정말 좋은 것은 골라하지요?

이런 게 생쇼라고 하나요?

 

그러니 지금은 여자 치어리더들이 야구장에서 춤을 추며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겁니다.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일에 반라의 여자만 동원하는 일도 있겠지만, 여기처럼 냄새와 연기로 몽환적인 것으로

분위기를 업 시키는 일도 있습니다.

 

북문을 나오기 전에 잠시 벤치에 앉아 쉬기로 합니다.

우리 부부 건너편 벤치에 나이가 많은 음악을 사랑하는 연인으로 보이는 두 남녀가 있습니다.

음악을 사랑한다면 서로의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어요.

사랑은 나이도 걸림돌이 아니잖아요.

걸림돌이란 딛고 올라서면 바로 디딤돌이 되잖아요.

 

이제 북문으로 나와 숙소가 있는 쳰먼 다제라는 전문대가로 걸어갑니다.

우리 부부는 이렇게 걷는 것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걸어가며 현지인이 사는 모습을 기웃거리는 게 바로 여행의 한 부분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아침에 노구교를 다녀왔고 베이징 남역까지 버스를 타고 와 역에서 천단까지 걸어왔습니다.

물론 천단 안은 모두 두 발로 걸어 다니며 보았고요.

이제 피곤하기도 하고 몸도 매우 아프기에 그냥 걸어서 숙소가 있는 전문대가와 대책란으로 가렵니다.

 

그래도 매일 드나들며 보았던 첸먼다제(前門大街 : 전문대가)와 대책란 두 곳의 모습도

잠시 살펴보아야 하지 않겠어요?

 

우리가 숭례문을 일상적으로 남대문이라 부르듯, 북경에 토박이들인 라오 베이징(老北京)도

정양문을 前門이라고 부른다네요.

첸먼이라고 하는 전문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똑바로 난 길이 첸먼다제라는 전문대가입니다.

이 길은 옛날에는 어도(御道)라고 불렀다네요.

오늘 제가 어도를 걸어보렵니다.

 

황제가 중국을 다스리던 시절 황궁 밖을 나설 때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길이었기에 그리 부르나 봅니다.

그러다 보니 황궁으로 이어지는 길이기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고 황실에 사용하는 물품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가게가 많기에 품질은 묻고 따지지 않아도 중국에서 가장 뛰어난 제품에 늘 흥청거리고 번화했을 겁니다.

 

서양의 세력이 중국에 들어오며 가장 먼저 변화를 겪은 지역이 바로 이 지역이 아닐까요?

워낙 시류에 따라 빠른 변화를 추구하는 지역이라 늘 첨단을 걷게 되잖아요.

서양식 가스등에 전찻길이 만들어지며 전차가 다니게 됩니다.

물론, 기찻길이 생기며 베이징에서 제일 먼저 역이 생긴 곳도 바로 이 부근입니다. (지금의 철도박물관)

 

전문대가라는 지역이 늘 이렇게 좋은 것만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의 늙은 곰탱이가 가장 고민했던 일이 바로 아편이었잖아요.

돈이 흥청거리는 곳에는 언제나 이런 것이 사람을 유혹하게 마련이잖아요.

그래서 이 지역은 또 아편과 여자를 사고파는 곳으로 유명해지기도 했더라네요.

 

비단이장수 왕 서방도 있었을 것이고 오리구이 전문점 진취덕도 있었습니다.

신발만 전문으로 만들어 파는 가게도 있고 여인네 마음을 훔치는 노리개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곳도 있었지요.

중국에서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많이 알려진 동인당 약방도 이곳에 있었습니다.

바로 우리나라 종로에 있었던 육조거리가 아닌가요?

 

이런 전문대가도 새로운 중국이 탄생하자 개인 재산은 모두 국유화가 되며 사람이 모여들어

주인 없는 집에 들어와 살게 되며 그야말로 난개발이 되며 쪽방촌을 이루게 되었다네요.

한때는 가장 품위 있는 상가거리에서 이런 영욕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베이징 올림픽은 또 한 번의 변화를 하라 합니다.

결국, 베이징 시 당국은 전문대가에 대대적인 공사에 들어갑니다.

목표야 당연히 옛 모습을 만드는 일이겠지만, 그게 어디 그리 쉽나요?

 

그 옛 모습이라는 게 어느 시대를 일컫는 말인지 알 수 없잖아요?

그래서 도로 한가운데로 전차가 지나가는 시대로 만들었나 봅니다.

얼마 전 모 방송국의 드라마 '야인시대'로 돌아가는 시기를 목표로 했나 봅니다.

이 전차가 첸먼 1호와 2호라는 이름으로 도로를 예전 속도라고 하는 딱 8km/시속으로 전체 길이 840m를 다닌다네요.

 

전문을 등지고 오른쪽이 따자란이라고 하는 대책란(大柵欄)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따쟈란이라 하지 않고 따샬랄이라 부른다고 하더군요.

이 부근이 우리나라로 치면 남대문 시장과 비슷한 곳으로 숙박시설도 많은 상업지구입니다.

지금이야 외국인도 서민도 함께 어울려 돌아다니는 길이지만, 옛날에는 내로라하는 부자들만 다녔던 곳이라네요.

 

대책란이란 이름은 강도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길 입구에 거대한 나무로 만든 울타리인

책란을 쌓았기 때문이라네요.

누구는 철로 만들었다고도 합니다.

밤에는 울타리로 통행을 막고 낮에는 장사를 위해 치우고...

지금으로 말하면 바리케이드를 도로 입구에 쌓아놓았다는 말이 되네요.

 

중국이라는 나라를 가만히 살펴보면 무척 흉흉했던 나라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장사하는 가게가 즐비한 곳에 사람의 출입을 막은 바리케이드를 친 나라가 중국이라는 말이 아니겠어요?

중국에서는 아버지를 포함해 정말 믿을 사람 아무도 없나 봅니다.

고객은 왕이 아니고 강도였답니까? 나 원 참!!!

 

지금 이 일대에는 무척 역사가 오랜 가게가 아직도 많습니다.

대책란가 1호라는 주소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일대의 터줏대감이 있습니다.

비단이 장수 왕 서방을 친척의 힘으로 몰아내고 이곳에 터를 잡은 비단가게 의성후(宜城厚)라는 가게입니다.

그 힘깨나 쓴다는 친척이 바로 서태후였으니 누가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제품이 좋고 나쁘고를 따지지 않고 고관대작의 아낙들은 무조건 이곳에 들려 싹쓸이 쇼핑에

날 새는 줄 몰랐을 겁니다.

아마도 출근부라도 두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돈을 갈퀴로 끌어 담아 베이징의 팔대상 중의 하나가 되었답니다

그러니 세월 이기는 장사가 있겠어요?

지금은 서민용 저가 의류점으로 타락해 버렸습니다.

 

다관러우라는 대관루(大觀樓)는 중국 영화의 요람이라는 곳이라는군요?

1905년 중국 최초의 영화인 정군산이 상영된 곳으로 유명한 곳이지요.

공명의 진묘가 있는 곳이 정군산 아닌가요?

정군산은 삼국지의 한 대목으로 경극으로도 자주 무대에 오르는 대목이라 하네요.

지금은 쇼도 보고 영화도 본다는 우리나라의 삼류 극장 수준이 되어 버렸네요.

 

유명한 오리구이 집 진취덕이 있고 건륭제가 직접 가게 이름을 하사했다는 음식점 도일처도 있습니다.

그 외 유명한 약국인 동인당, 차엽을 파는 장일원, 비단가게 서부상(瑞蚨祥) 등

오랜 역사를 지닌 가게가 즐비합니다.

이 중 제일 먼저 생긴 가게는 동인당으로 1702년이라 하니 300년이 넘었네요.

 

지하철 첸먼 역에서 내려 큰길을 건너 첸먼다제 오른쪽 주바오 시장의 좁은 골목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비단을 파는 첸샹이라는 가게가 보입니다.

이 건물을 지나 별별 잡동사니를 파는 가게 골목을 지나면 대책란 시작되는 조금 더 큰 골목으로 이어집니다.

계속 걸어가면 류리창이라는 거리에 이릅니다.

여기는 구경을 하다 보면 시간 가는지 모르는 곳입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12시 반에 남문으로 들어와 꼭 3시간이 걸린 3시 30분에 북문을 나섭니다.

마눌님 눈치를 보니 또 걷고 싶은가 봅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요.

그래서 또 걷습니다.

발뒤꿈치의 통증은 점점 더 심해져 신발이 닿을 때마다 통증이 느껴집니다.

몸에 열도 나며 몸살 기운도 더 심해집니다.

사랑은 이렇게 아파도 아픈 내색을 못하고 쫄랑거리며 따라가야 하나 봅니다.

 

들어오는 길에 정해 놓은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숙소로 들어옵니다.

방에 들어오자 약부터 챙겨 먹고 발뒤꿈치에 준비해 간 종이테이프를 다시 갈아붙입니다.

내일은 이화원입니다.

또 많이 걷는 날입니다.

식겁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