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강석굴의 대표선수

2012. 2. 28. 08:00중국 여행기/산서성(山西省)

이제 제20 굴에 왔습니다.

이곳 윈강석굴도 거의 끝나갑니다.

물론 아직 많은 석굴이 남았지만, 예술적 가치가 떨어지는 것뿐이랍니다.

제20 굴은 백불야동(白佛爺洞)이라고 부른다네요.

백불야 동이라고 띄어 읽기 발음을 정확히 하셔야 합니다.

공연히 백불 야동이라 읽으시면 순재 아저씨처럼 됩니다.

이제 이곳만 보면 나머지는 모두 무너지고 세월을 이기지 못한 안타까운 모습으로 남아있는 곳뿐입니다.

 

이제 이곳도 앞에 세워놓은 기둥이 무너지며 지붕이 사라지고 말았네요.

그러니 벌거벗은 모습이라고 해야 하나요?

요나라 시절에 만든 목조구조물은 전쟁을 피할 수 없었나 봅니다.

아무리 전쟁을 해도 왜 부처가 있는 곳에 불을 지르고 난리를 친답니까?

전쟁이란 이렇게 선한 민초를 야차로 만드나 봅니다.

불력의 힘도 인간의 탐욕 앞에는 아무 소용이 없었나 봅니다.

 

위에 보이는 비천상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지금까지 보았던 과도한 허리 꺾기도 없고 표정 또한 편안한 모습이군요.

 

여기 제20 굴인 백불야동은 석벽과 연결하여 횡목을 치고 대들보를 올리고 기둥을 받혀 벽을 만들어

처음에는 완벽한 절의 형태로 만들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요?

佳人도 이곳에 온지 벌써 몇 시간이 지났잖아요.

왜 이러세요!

과인이 총명하여 백을 들으면 겨우 하나 정도는 통할 수 있는 능력은 지녔습니다.

 

사진을 보시면 불상 뒤에 있는 석벽 위로 일정하게 구멍이 뚫어진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곳에 횡목을 끼우고 석벽 앞으로 목조 구조물을 만들었을 겁니다.

왜 이러세요?

佳人도 이제 척 보면 압니다.

그러나 요나라 시절 전쟁으로 나무 구조물은 모두 불에 타버려 이렇게 알몸을 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천대불이라고도 부른다네요.

 

오른쪽 어깨는 그냥 드러내고 왼쪽만 걸친 길고 중후한 가사를 걸치셨네요.

옷감의 문양이 올록볼록한 모습입니다.

이 모습은 간다라 양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봐야 하지 않겠어요?

20 굴은 바로 북위를 일으킨 태조인 도무제 탁발규라고 합니다.

佳人이 보아도 얼굴 모습이 우리가 아는 중국인과는 많이 다르네요.

 

 

주불의 높이는 13.7m로 머리 부분이 돌출되었고 시원하게 넓은 이마와 보름달처럼 풍족하고 둥그런 얼굴에

기다란 눈, 오뚝한 콧날에 콧수염까지...

부처가 정말 콧수염을 길렀을까요?

되게 궁금합니다.

머리 주변 뒤쪽으로 화려하고 세밀한 후광으로 보이는 조각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명상에 잠긴듯한 손의 모습까지 대단한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눈동자까지 만들었지만 조금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되네요.

마무리가 영 장인이 만든 모습이 아니네요.

얼굴에 보이는 얼룩말 무늬는 조상이 얼룩말이 아니고 이곳 석벽의 재질이 그렇기에 방법이 없었을 겁니다.

마치 전투에 임하여 적진 후방으로 침투하기 위해 위장한 특전대 얼굴로 보입니다.

 

이제 이곳이 거의 마지막입니다.

이곳 이후부터는 볼 게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은 풀고 가야 하겠어요.

 

대한민국의 큰스님이셨던 성철스님께서 하신 단순하면서도 깊은 뜻이 있을 것 같은 말씀 말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당시 이 말씀에 대한민국이 떠들썩했잖아요.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입니까?

담요 스님도 모르시죠?

왜 말이 없으세요?

한국말은 팅부동이라고요?

 

그럼 제가 중국어로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저도 이 정도는 중국어로 할 수 있걸랑요.

山 = 山, 水 = 水

중국도 수학을 할 줄 알죠?

됐죠?

 

"산은 산이고

......

......

물은 셀프라고요?"

그렇군요?

물은 셀프라...

워낙 오랜 세월 석굴 파는 일에만 올인하다 보니 갈증이 심하셨나 봅니다.

그래서 요즈음 식당에만 가면 모두 물은 셀프라 써놓았나 봐요.

 

강건하게 보이는 육신과 위엄과 기품이 철철 넘치는 표정까지...

이런 것이 바로 유목민족인 탁발 선비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제20 굴인 백불야동은 윈강석굴의 대표적인 표현이며

동시에 중국 고대 불교 조각예술을 그대로 보여주는 백미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하이라이트에 속하는 불상입니다.

북위를 일으킨 태조의 모습이라 그랬을까요?

귀가 너무 언바란스하게 큽니다.

북위의 민초가 아무래도 임금님 귀 당나귀 귀라고 놀리지 않겠어요?

 

양쪽 옆으로는 협시보살로 보이는 대불이 서 있습니다.

가운데는 앉아있고 그 옆으로 서 있으니 혹시 벌은 받고 있지는 않나 모르겠네요.

물은 셀프라고 했다고 벌 받고 있지나 않나 모르겠네요.

그거야 모르지요.

옛날 북위의 빠떼루 자세는 저렇게 서게 하는 게 맞는지 모르잖아요?

그래도 머리 뒤로는 배광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왼쪽의 보살은 무너졌네요.

벌 받다가 졸도하여 응급실로 실려갔을까요?

아마도 왼쪽의 바위는 약한 곳이었나 봅니다.

 

불상을 보시면 가슴 부위의 바위는 다른 곳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흐름이 오른쪽의 협시보살 쪽으로 연결되어 있네요.

아마도 이 부분은 무척 무른 재질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부처의 귀가 길면 보살의 귀도 깁니다.

따라쟁이란 말입니까?

 

그러나 이곳도 불력의 힘은 세월을 이기지 못하나 봅니다.

세상에 초능력자도 세월의 힘에 겨워 부서지고 티끌로 사라집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도 없나 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운강석굴을 대표하는 모습일 겁니다.

한마디로 대표선수라는 말이지요.

운강석굴을 나타낼 때 늘 앞장선 사진이 바로 당당한 이 모습일 겁니다.

이후의 사진은 제20 굴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진임을 밝혀둡니다.

21 굴부터의 사진입니다.

 

네 개의 부처는 굴 안에 모셔져 있지만 제20 굴은 동굴 밖으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처음부터 노숙하지는 않았겠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석굴 입구가 무너지며 노출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노천대불(露天大佛)이라고도 부른다는군요.

 

믿음이 약해 그랬나요? 적당히 만들었나요.

노천대불이라고 하기에 처음에는 옷을 입지 않은 노출대불인지 의심했습니다.

부끄럽지만, 이게 佳人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입니다.

 

위의 사진은 21불의 모습입니다.

사진 오른쪽 아래를 보시면 페인트로 21이라고 쓴 게 보이실 겁니다.

이다음부터는 그렇게 볼 게 없다는 의미가 아니겠어요?

그래도 우리 부부는 계속 굴을 따라 끝까지 다녀오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을 그대로 다 맞아가며 버티고 있습니다.

부처도 상황에 따라 처음은 모두 같았으나 이렇게 노숙하며 지내는 부처님도 계십니다.

원래는 안전한 석굴 속에 안치되어 있었겠지만, 굴의 앞부분이 무너지면 이렇게 황당한 일을 당하기도 하네요.

세상에 한자리에 만든 부처상도 이렇게 다를진대 세상에 평등이 어디 있겠습니까?

평등을 부르짖는 사람조차 평등하지 않은 사람이며 그런 사탕발림으로 민초의 눈을 흐리게 하는 나쁜 사람입니다.

진정한 평등이란 같게 하는 게 아니라 능력에 따라 다른 대우를 하는 것이 평등입니다.

 

그러나 석굴 부처께서 노숙하신다고 어찌 나쁜 일만 있겠습니까?

저녁에 노을이라도 붉게 물들면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띠고 다른 부처상은 컴컴한 동굴 속에서 밤을 준비하지만,

노숙하는 덕분에 더 아름답고 더 유명해졌습니다.

지는 저녁노을 속에 화려한 색칠을 하고 세상을 관조하고 계실 겁니다.

그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면 佳人의 마음도 아름답게 물들 수 있지 않을까요?

 

살아가는 일이 모두가 걸림돌이라고요?

그걸 딛고 일어서면 디딤돌이 된다는 사실을 직접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길에도 그리합니다.

비록 한때 힘듦도 있지만, 그런 것을 이기고 나면 그게 나를 더욱 업그레이드시켜주잖아요.

 

윈강석굴의 52 굴은 이렇게 숫자만 채우기 위해 흰 페인트로 번호를 적어 넣었네요.

안타깝고 슬픈 일이지만....

그래도 한때는 무척 잘 나갔을 텐데 말입니다.

내일 윈강석굴의 마지막 이야기를 하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이곳을 모두 돌아보고 난 후의 전체적인 느낌은 외부로 비치는 모습이

우리의 불교문화와는 많이 다르다는 생각입니다.

석불의 모양도 서구적인 모습이고 석불 주변을 장식한 모습도 힌두교의 영향이 그대로 남아있는 조각이 많습니다.

힌두교에서는 변신의 귀재라는 비슈누가 혼탁한 세상을 구하기 위해 9번째로 변신한 것이 부처라 했습니다.

10번째는 백마 탄 칼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했던가요?

이곳에는 아직 힌두교 양식과 혼재된 모습의 불교 조각이 많이 보입니다.

지금 세상이 혼탁합니다.

우리 모두 백마 탄 칼키를 기다려 봄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