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성의 중화전 그리고 보화전

2011. 12. 1. 00:03중국 여행기/베이징(北京)

 

태화전을 지나면 중화전(中和殿)이 나옵니다.

28m의 정사각형 건물로 그 의미는 글자 그대로 일을 처리함에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공정하게 한다는 뜻의 사각형의 건물이고 이름이 또한 중화(中和)입니다.

말로만 그렇게 짓지 말고 실제 일 처리도 그런 마음이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전조에 있는 세 개의 건물 중 가장 작습니다.

언뜻 보면 마치 누각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중화라는 말은 通書에서 유래한 말로 극단을 멀리하고 자신을 통제할 수 있으면

반드시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뜻이라 하네요.

그러니 황제는 태화전에 나가기 전에 잠시 중화전에 머물며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일 처리를 하겠다고 다짐했던 곳이지요.   

황제가 이런 말을 이해하고 얼마나 생각하며 이곳에 머물다 태화전으로 나갔을까요?

아마도 늘 그 이름을 부르다 보면 그냥 이름만 중화지 아무 의미 없습니다.

 

위의 사진에서처럼 편액이 걸려 있네요.

이 글씨 또한 건륭황제가 자기 자랑 좀 한다고 저기가 썼다고 편액 가운데 써놓았네요.

윤집궐중(允執厥中)이라는 글로 상서에 나오는 말이라 하네요.

의미는 정성과 진심으로 공정한 길을 가야만,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라 합니다. 

 

 

사실 황제도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하늘의 자식인 천자라고 거짓으로 세상을 조롱하였습니다.

그런 하늘의 아들인 명나라의 무종이 강남에서 미녀를 뽑아 올리려 하자 신하

여럿이서 반대를 하자 삐쳐가지고 반대를 한 신하를 굴비 엮듯 엮어서 오문에

모아놓고 다분히 감정적으로 연장에 처했잖아요.

 

 

오문을 보았지요?

위의 사진을 다시 한 번 보시지요.

'凹' 형태로 만들었기에 그곳에서 곤장이라도 때린다면 음향효과 또한 죽여줍니다.

때리는 소리와 고통스러워 지르는 소리가 스테레오로 울리게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은 먼저 맞는 사람의 소리에 이미 기절이라도 할

정도얐을 것이고 턱! 하고 책상을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말이 맞나 보네요.

 

 

황제는 일을 처리하기 전에 이곳에 머물며 정무를 정리하고 예를 받고 그다음 가마를

타고 태화전으로 나아갔다 합니다.

그러니 이곳에 머물며 마음을 가다듬고 중용의 도를 지킬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했던

장소로 순전히 마음속으로만 말입니다.

그러니 중화전은 태화전의 부속건물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삼대전 중 가장 역할이 없었던 곳이지만, 지금은 많은 중국인이 이곳을 둘러봅니다.

그 이유는 청 왕조 말기의 광서제가 서태후와의 권력다툼에 밀려 이곳에 유폐되어

지냈기 때문인데 불운의 황제 광서제는 36살의 젊은 나이로 의문사한 황제로 이곳과

이화원을 전전하며 구차하게 삶을 이어갔다지요?

이 일로 군주제는 서태후에 의해 농락당하고 군주 시대의 몰락을 가져오게 되었겠지요.

바로 이런 일을 떠올리며 많은 중국인이 이곳을 찾나 보네요.

 

 

중화전을 지나 더 들어가면 보화전이 나옵니다.

태화전과 같은 전면 9칸 측면 5칸으로 구오지존(九五之尊)으로 천자의 지위를 상징합니다.

보화전은 과거 시험을 치거나 연회의 장소로 이용된 건물이라 하네요.

그래서 기둥이 없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시험 치를 때 기둥 뒤에 숨어 치팅하지 말라고요. 

 

 

보화전 안에는 황건유극(皇建有極)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이 글은 건륭제가 썼으며 이후 이곳에서 어전 과거 시험이 열린 장소입니다.

글의 의미는 황제로서 천하의 최고 준칙을 세운다는 의미라 하네요.

천하가 뭐라 했나요?

황제만 준칙에 따라 잘하면 천하가 행복해질 텐데...

아래 사진을 보면 가운데 건륭 어필이라고 쓰고 도장까지 찍었습니다.

 

 

皇建有極이라는 말은 서경의 홍범구주에서 따온 문장으로 뜻은 아래와 같다고 하네요. 
"황건유극(皇建有極)이란 하늘이 명을 내려 유극(성인, 제왕)을 세우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왕이 된 자는 마땅히 지공무사한 하늘의 도를 법하여 탕평정직(蕩平正直)의

왕도(王道)를 베풀어야 하며 그렇게 되면 백성이 모두 그 왕에게 모이고 그 왕에게

돌아가는 회귀유극(會歸有極)이 이루어진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의미입니까?

하늘이 황제를 옹립하고 황제만 잘하면 백성 모두가 기뻐 함께한다는 말이 아닙니까?

바로 "너나 잘하세요."라는 의미라 생각되네요.

 

 

보화전은 태화전보다 규모는 작으며 주로 정월 초하루와 보름에 전국 각지의 번왕과

공신을 초대해 큰 잔치를 연 장소입니다.

공주가 시집가는 날에는 3품 이상의 모든 관료가 이곳에 모여 하루를 즐겼다 합니다. 

이와 더불어 중요한 일은 이곳에서 황제 앞에서 치러진 과거시험인 전시가 열린 곳입니다.

그래서 전각 가운데 기둥이 없습니다.

 

 

각 지방에서 열린 향시와 부시를 통해 수재(秀才)와 거인(擧人)을 거친 사람이 황제가

직접 지켜보는 가운데 마지막 관문인 전시를 치르고 합격하면 進士가 되는데 이때

1등을 장원(壯元), 2등을 방안(榜眼), 3등을 탐화(探花)라 하고 이 세 사람은 옴마야~

합격통지서를 들고 평소에 황제만 드나들 수 있는 오문의 중앙문을 이용해

딱 한 번만 궁궐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이때 기분은 환장합니다.

누가 그 기분을 글로 표현하겠습니까?

황제는 이날 하루 세 사람에게 세상에 태어나 가장 영광스러운 경험을 하게 해 주었습니다.

꿈엔들 잊을 수 있겠습니까?

 

 

마을의 수령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금의환향하는 합격자를 마중하고

집안만 아니라 고을의 꿈동이요 희망이며 가문의 영광인 게지요.

더군다나 꿈동이의 애인을 껄떡거리기라도 했던 변사또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지요.

그래요, 변사또는 초주검이 되도록 볼기짝을 맞았을 겁니다.

 

 

그런 탐관오리는 맞아도 쌉니다.

그러나 변사또의 역할이 있기에 몽룡이도 춘향이도 드라마틱하게 만나고

해피해지는 게 아니겠어요?

행복 두 배를 위한 변사또의 역할은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감초 역할이며

필수요소로 만약 춘향전에서 변사또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정말 재미없는 이야기였을 겁니다.

 

 

보화전을 지나면 제법 넓은 뜰이 나옵니다.

이곳이 바로 전조와 후침을 나누는 분계 지역인 셈입니다.

후침을 보통 내정(內庭)이라고 불렀으며 황제와 황후의 일상생활이 이루어진 곳이고

후침은 황제가 거처하는 건청궁이 있고 황제와 황후가 길일을 잡아 합방하는

교태전이 있고 주로 황후가 거처하는 곤령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건청궁은 내정의 정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화전 뒤에는 거대한 대리석 조각인 위롱다스댜오(雲龍大石雕 : 운룡대석조)가

있는데 아마도 보화전에서는 최대의 볼거리가 여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길이가 16.75m로 자금성 안에서 최대로 큰 석조 계단입니다.

황제가 가마를 타고 지나가는 어가(御街)라는군요.

 

 

소용돌이치는 구름 위로 거대한 용 아홉 마리가 날아다니는 모습을 조각한 것으로

이게 하나의 대리석 조각으로 만들었다 하네요.

250톤이 넘는 돌을 50km 밖에서 이곳으로 어떻게 옮겨왔을까요?

이 거대한 돌을 옮겨오기 위해 한겨울에 도랑을 파고 물을 부어 얼린 다음 1만 명의

인부와 1.000여 마리의 말을 동원해 옮겨왔다고 하며 원래 크기는 지금의 3배나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인 하나의 돌이었으며 용 문양의 양쪽으로는 계단이 보이는데

그 계단은 황제의 가마를 맨 가마꾼이 걸어 오르는 계단입니다.

 

 

처음 돌을 발견한 시절은 여름이었다 하네요.

돌을 캐내기는 했지만, 워낙 크기가 엄청난 돌이기에 운반할 방법이 없잖아요.

 처음에는 돌을 잘라서 운반할까 생각했지만, 황궁에 사용할 돌이기에 원석을 그대로

사용하고 싶었기에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겨울에 날이 추워지면 얼음이 언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 방법을 생각해낸 것입니다.

  

 

여름 내내 황궁까지 도랑을 만들고 매 4km마다 우물을 미리 판 다음 겨울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겨울이 오자 우물물을 길어 미리 파놓은 도랑에 부어 빙판을 만듭니다.

이렇게 채석장인 팡산(房山)에서 베이징까지 50km에 달하는 빙판길이 생겼습니다.

돌을 운반하는데 장정 20만 명이 동원되었고 돌을 운반하는 데 28일이나 걸렸다 합니다.

 

 

그 대단한 석조 조각을 다시 한번 보고 갑시다.

어때요?

대단하지 않습니까?

 

 

장인의 생각이 이런 엄청난 조각을 만들게 했나 봅니다.

멀리서 바라보아도 대단한 예술작품이 아닌가요?

그래도 얼마나 다행입니까?

50km가 아니고 500km 밖에서 이 돌이 발견되었고 날이 춥지 않은 강남지방에서

발견되었다면 어찌했을까요?

그렇다고 자금성을 그곳으로 옮기자고 하면 황제가 삐칠 수도 있잖아요.

 

 

이상으로 자금성의 외조에 해당하는 삼대전을 모두 보았습니다.

이제 이곳에서 오른쪽에 있다는 구룡벽을 보러 갑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황제의 3대 엔터테인먼트는 무엇일까요?

네! 그렇습니다.

여자와 술과 사냥입니다. 

그런데 황제가 뉴 페이스를 뽑고 싶다고 하는데 "아니 되옵니다~"라고라?

사실 궁에 들어와 평생 용안도 한 번 보지 못하고 파삭 늙어 귀신이 된 여자도 많은데...

뽑겠다고 하는 황제나 아니 되옵니다라고 하는 신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