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1. 28. 07:59ㆍ중국 여행기/베이징(北京)
천안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곧고 올바르다는 의미의 똰먼(端門 : 단문)이 나옵니다.
그곳을 지나면 우먼(午門 : 오문)이 나옵니다.
오문은 자금성의 남문입니다.
그런데 이게 문이 아니라 위의 사진처럼 엄청난 크기의 성채입니다.
베이징이라는 도성의 남문은 아까 지나온 전문이라는 정양문이 남문입니다.
24방위 가운데 정남방을 가르키는 오(午) 자를 사용했습니다.
또 오문은 전조(前朝 또는 外朝)의 정문에 해당되겠지요.
전조는 오문부터 보화전까지를 말한다 합니다.
그러니 자금성의 정문은 천안문이 아니라 오문이 정문인 셈이군요.
원래 1420년에 지어졌으나 그동안 수차례 화재로 불타버렸고 지금의 오문은 1647년
청의 순치제에 의해 재건된 문으로 하나의 성채처럼 음의 기운이 강한 모습의 '凹'자
형태로 만들어졌는데 높이 35.6m, 벽의 두께만도 36m라고 하니
문이 아니라 하나의 성입니다.
기네스북에 세계 최대의 문으로 올라 있다고 합니다.
이 문에 오르려면 별도의 입장권을 끊어야 한다는군요.
아래는 자색을 칠한 성대(城臺)가 있고 그 위로 다섯 개의 누각이 있어 그 모양이 마치
다섯 마리의 봉황이 낭창하게 앉아있는 모습이라 하여 오봉루(五鳳樓)라고도 부른다지요.
오문 앞 광장은 2만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광장이 있는데 명절이면 이곳에 모인
백성에게 황제가 친히 춘병을 나누어주며 "해피~ 명절"을 축하했다고 합니다.
가운데 누각이 가장 크니 당연히 황제 전용이 아니겠어요?
주로 매년 달력을 반포하고 출병하는 군사를 독려할 때 오봉루 가운데
옥좌를 두고 앉았을 것이고 양 옆에는 종루와 고루로 황제가 출타하거나
궁정의 행사를 알리는 역할을 했겠지요.
단문에서 오문으로 들어가는 길 오른쪽에 천안문 광장에서 매일 국기를 게양하고
내리는 일을 하는 병사들의 숙소와 연습장이 있습니다.
자금성의 입장료는 60원/1인으로 오문의 왼편에서 판매하는데
경로할인이 되지 않습니다.
중국 인민에게만 할인한다 하네요.
나중에 우리 집에 오면 문도 열어주지 않을 겁니다.
아울러 출병하는 군사를 독려하고 황제의 뜻을 거스른 관리에게 연장(延杖)이라는
형벌을 행하던 장소로도 이용되었습니다.
연장이라는 게 시행 초기에는 형식적인 의미로 가볍게 경고하는 의미로 행했으니
세월이 흐르며 이 또한 하나의 형벌로 변하며 이곳에서 벌을 받아
사망에 이른 경우도 있었다 합니다.
장난하다 뭐 된다고 말입니다.
정덕 14년(1519) 당시 황제였던 무종 주후조는 물 좋다고 소문이 난 강남에서
수십 명의 쭉쭉빵빵 미녀를 선발해 궁녀로 삼으려 했답니다.
그러나 눈치 없는 신하들은 민심을 고려해 이 명을 거두어 줄 것을 간청했고
한 성질 하는 무종은 반대하는 신하를 모조리 잡아들여
오문에서 연장에 처해버렸답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지~~
사실 황제가 평생 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음주와 여자로 대변되는 주색잡기가 아니겠어요?
그걸 하지 말라는 말은 황제에게 죽으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때 연장에 처해진 신하가 130명에 달했으며 얼마나 심하게 때렸는지
그중 11명이 죽었답니다.
황제가 겨우 수십 명의 후궁을 더 뽑겠다고 하면 "그리 하시지요~"하고 모른 척해야지...
중국의 인구가 얼마나 되는데 겨우 수십 명의 여인을 못 뽑게 합니까?
하긴 11명의 목숨이 사라진다 해도 그것도 눈에 띄지도 않겠네요.
맞아도 쌉니다.
에효~ 다분히 감정이 들어가 때렸다는 말이네요.
여러분도 생각해보세요.
왕조시대에 황제 밑에서 한 자리씩 차지해 거들먹거리던 신하들 말입니다.
자기들도 첩을 많이 거느리면서 기생집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황제가 수십 명 정도
더 뽑겠다는데 "아니되옵니다?" 그러니 맞아 싸지요.
황제란 반란군 숫자가 많음은 걱정스러워도 주변에 여자 많은 것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잖아요.
인구가 훨씬 적은 백제의 의자왕도 3천 명을 거느렸다는데....
중국의 기록으로는 황제라고 명함 돌린 사람만 611명이라고 했던가요?
그중 東晉의 무제인 사마염이 10.000여 명의 후궁을 거느려 장원이랍니다.
황제에게 가장 행복하고 살맛 나게 하는 게 바로 술, 여자 그리고
사냥 정도가 아닐까요?
10.000명이나 후궁을 거느렸던 사마염의 삶이 과연 행복했을까요?
천 명이라도 천일야화 정도는 나올 수 있는 일인데...
그런데 말이죠~
사마 염이 어찌 죽었는지 아세요?
사마 염은 술을 마시며 연회를 열던 중 취중에 왕비에 농담 한마디를 했다나요?
그런데 왕비가 그 농담을 듣고 기분이 나빠 왕비의 사주를 받은 시녀에 의해 자다가
베개에 눌려 질식사한 불행한 황제였다고 하니 세상 참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사마 염은 바로 삼국지에 나왔던 제갈 량과 맞장을 떴던 사마의 중달의 손자지요.
처음에는 연장이라는 제도가 황제의 뜻을 거스른 신하에게 그냥 가르친다는 의미로
훈계하려고 만든 제도였는데 황제가 후궁을 뽑겠다는데 달기를 입에 올리고 여희를
들먹이며 포사까지 입에 올리니 황제 입장에서 화가 났나 봅니다.
이런 단순한 연장이라는 가르침도 감정이 개입하면 맞아 죽습니다.
바로 위의 사진에 보이는 넓은 광장에서 매타작이 벌어졌다 합니다.
무종(武宗)은 워낙 사냥이나 무예를 좋아했기에 붙인 이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주 방탕한 사람으로 기억되지만, 사실 무척 총명하였다 합니다.
어린 시절 환관들 사이에서 자라며 공부를 게을리했고 부친이 일찍 죽는 바람에
15세에 황제에 등극함으로 8명의 환관에 의해 주색잡기에 빠지게 되었다 하네요.
30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며,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말을 남겼다 하네요.
오히려 정덕제는 기록으로 남아있는 후궁이 없었다 하네요.
일부 신하가 환관의 폐해를 직언하자 너희들도 같은 놈들이라고 했다나요?
외로운 사내였습니다.
그런데 강남 미인 몇 명 뽑아 올리라 하니 "아니 되옵니다~"?
맞아도 싸지요.
위의 사진은 베트남 오문의 모습입니다.
어때요? 해자로 둘러싸여 있는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황궁의 오문입니다.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황궁은 이곳을 모방해 지었으니 같지 않을까요?
당시의 상상도입니다.
오문 앞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났을 겁니다.
여기도 황제가 후궁을 보겠다고 했는데 "아니 되옵니다~"를 간언 하다
맞아 죽는 불행한 일이 있었을까요?
오봉루 가운데 누각에 황제가 앉았고 그 아래는 세 개의 문이 보이고 광장에는
코끼리가 도열을 했으며 오문을 들어오기 위해 건너야 되는 해자의 다리가 보이고
그 아래는 악어가 우굴거리는 게 보입니다.
해자 건너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사신으로 보이는 많은 사람이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자금성에는 네 개의 문이 있으니 오문 말고도 그밖에 동화문(東華門), 서화문(西華門),
그리고 북쪽으로 신무문(神武門)이 있습니다.
보통 관광객이 드나드는 곳이 오문으로 들어와 신무문으로 나가게 됩니다.
동화문과 서화문은 관광객에게는 개방되어 있지 않다고 합니다.
과거 우리 선조들께서 산 넘고 물 건너 갖은 고생을 하며 북경에 도착했을 겁니다.
중국의 도성을 들어서며 그 크기와 규모에 눈이 휘둥그레졌을 겁니다.
워낙 인구가 많은 나라에 수도가 아니겠습니까?
지금 바라보아도 입이 쩌억~ 벌어지는데 그 당시에는 처음 이곳을 사신행렬에
졸랑거리고 따라온 덜수가 보았더라면 뭐라고 표현했을까요?
천안문을 들어서 오문을 지나며 우선 기선을 제압당했을 겁니다.
아니군요!
사신행렬을 따라온 상인의 보조 짐꾼인 덜수가 황궁에 어찌 따라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고향에 돌아가면 직접 자금성에 들어가 황제라도 보았다고 뻥이라도?
오문의 높이가 무려 38m에 두께 또한 36m였으니 이게 문이 아니라 하나의 성곽입니다.
오문 위에는 오봉루(五鳳樓)라는 다섯 개의 누각이 떡 하니 자리하고 있는데
그 모습이 봉황이 날아가는 모습이라나요?
세상에 누가 봉황을 보았다고 그런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맨날 용이니 봉황이니 정신 못 차리고 살아간 나라가 중국이 아닌가요?
주로 국가의 대사를 발표하고 황제의 출입을 알리고 칙령을 발표하던 곳이라는군요.
그곳에 서면 佳人도 황제의 위엄이 나타날까요?
제가 자금성의 짝퉁이라는 베트남 황궁의 오문 위에 있는 황제 전용이라는 오봉루의
가운데 누각 위에 올라 "이리 오너라! 게 아무도 없는 게야?"하고 소리는 질러 보았습니다.
그곳에 있던 많은 사람이 佳人을 바라보더군요.
그러나 그 사람들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지를 못하더이다.
그 양 옆으로는 고루와 종루가 있어 황제가 어디로 나가거니 들어올 때
행차를 알리기 위해 북이나 종을 치기 위한 곳입니다.
오문을 드나드는 것도 가운데 문은 황제만 드나드는 문으로 정했답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어 황후가 시집올 때 한번 들어올 수 있게 해 준답니다.
처음 황제에게 시집오는 날이니 딱 한 번만 폼 잡으라고 배려했습니다.
만약 그 문으로 수시로 다니고 싶다면 정혁(鼎革)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황제 앞에서 치러지는 전시(殿試)에서 1. 2. 3등인 장원, 방안, 탐화
급제자에게만 집으로 돌아갈 때 폼 한 번 잡으라고 황제만 드나드는
오문으로 나갈 수 있게 배려했다 합니다.
그곳을 나오는 급제자들은 얼마나 영광스러웠을까요?
오호라~ 기쁜 날이여~ 가문의 영광이며 마을의 꿈동이며 자랑이여
천세~ 천세~ 천천세~ 영원하여라~
보세요. 방안 급제만 해도 이렇게 대문 앞에 편액을 걸어 폼을 잡는데 말입니다.
이 집이 풍상에 티끌이 되어 사라진다 해도 용이 스물 거리며 기어가는
저 편액은 영원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어떻게 공부하여 그런 좋은 성적을 올려느냐고 물어보면 답은 뻔합니다.
학원도 가지 않고 서당 수업만 충실히 듣고 훈장님 말씀대로 예습, 복습만 충실히 했다고요.
아래 사진과 비교하면 많이 다르군요?
아래의 편액은 지방에서 열린 과거시험인 향시에 합격한 사람에게 내리는
거인이라는 칭호입니다.
벌써 용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군요.
그래도 이것도 자랑스럽다고 걸어놓았는데...
지방에서 치러진 향시에 거인으로만 합격해도 이렇게 편액을 대문에 자랑스럽게
걸어놓는데 황제 앞에서 치러진 전시에 2등만 해도 그게 어딥니까?
환장하고 까무러칠 일이 아니겠어요?
자랑한들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어디 편액만 걸어놓았나요?
과거에 합격한 사람은 대부분 집안으로 말을 타고 직접 들어갈 수 있도록
대문을 높게 만든 走馬門이더군요.
요게 바로 황제만 말을 타고 자금성으로 들어간 오문의 흉내를 낸 게 아닐까요?
뭐 어떻습니까?
자기 집 드나드는데 황제처럼 거들먹거리며 말을 타고
폼 좀 잡는다고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들어가며 오른쪽인 동쪽 문은 관리가 드나들었고 왼쪽의 서쪽 문은
왕족이나 제후들만 드나들었다고 하네요.
그러나 이들이라도 늘 함부로 드나들 수는 없었답니다.
항상 문은 닫혀있었고 황제의 명에 따라 조회라도 열리는 날에는 모든 신료들이
이 문 앞에 집결을 하고 서열에 따라 줄을 서서 기다리다 문이 열리면
자금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답니다.
더럽고 치사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고 황제는 말이나 마차를 타고 드나들 수 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걸어서만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가 있지요.
네~ 그렇습니다.
바로 이자성과 같은 사내는 반란군을 이끌고 그냥 말을 타고 소리 지르며
"황제 이놈~ 이 개자식아~ 네 목을 얼른 내놓아라~"하며
욕도 하며 막무가내로 들어갔을 겁니다.
왜?
이자성은 촌놈으로 입에 육두문자를 달고 살았던 인물이잖아요.
이자성의 이런 욕을 듣고 황제가 뭐라고 했을까요?
그냥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삐쳐서 자금성 뒤로 몰래 나가 경산공원에 올라
나무에 줄을 묶고 목을 매고는 자살했겠지요.
어디 이자성만 그 문으로 들어갔을까요?
덜수도 이자성의 뒤를 따라 "황제 이놈아~"라고 욕도 하며 가운데 문으로 들어갔을 겁니다.
이날 황제가 먹은 욕은 셀 수도 없었을 겁니다.
욕을 먹으면 오래 산다고 하던데 이 문을 들어가며 하는 욕을 먹으면
그날이 황제의 제삿날이 되고 말더군요.
그러나 그런 날이 아니고 평범한 날 이 문으로 들어가며 황제 욕을 하면
욕한 사람의 제삿날이 될 겁니다.
재미있는 일은 황제를 능가하는 권력을 가진 서궁이 배출한
불세출의 여인인 서태후 말입니다.
그녀는 후궁이었기에 한 번도 오문의 가운데 문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하네요.
황후만 결혼식을 하는 날 딱 한 번만 들어오게 하니까요.
태화전을 바라보고 그 거대한 규모에 놀라고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지붕을 바라보며
눈이 부셔 제대로 쳐다보기조차 어려워 또 놀라고...
좌우간 이곳에 오면 놀랄 일만 있겠습니다.
우리의 조상도 이곳에 들어오며 무척 놀랐을 것 같습니다.
대국이라는 중국을 바라보며 여러 가지로 부러워했을 우리의 선조가 아니겠습니까?
추녀 밑의 단청 모습을 보며 참 아름답다고 했을 겁니다.
지금 佳人이 바라보는 단청을 우리 선조들도 바라보았을 겁니다.
얼마 전 이곳 자금성의 단청을 다시 칠했는데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생산되는
페인트를 실험했는데 우리나라 제품이 가장 우수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 자금성의 단청의 페인트마저 한국산으로 칠했다고 하니...
우리 선조께서는 이런 천지개벽할 일이 일어나리라 예상이나 했겠어요?
지금 우리의 처지는 5천 년 역사상 대국이고 문명의 발상지라는 나라인
중국에서 가장 부러워하는 시기가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지속될까요?
앞으로 이들과 어깨를 겨누며 당당해지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노력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중국 여행을 하며 지방의 작은 마을을 가도 이제 한국이라는 나라는
그들에게는 선망의 나라입니다.
만나는 젊은 사람 대부분은 한국어 인사 정도는 기본으로 하고
그들의 휴대전화의 벨소리는 한국 노래가 흔합니다.
그런데 남북으로 갈리고 얼마 전까지 동서로 갈려 싸우다가 다시 보수니 진보니 갈려
싸우는 모습을 보면 우리나라도 역시 서로 모여 무리 짓는 일을 좋아하는 민족입니까?
중국 여행을 하다 보면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무척 답답하게 느껴지는 게 있습니다.
높은 담장과 건물보다 크다는 생각이 드는 간판입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붙어있는 중국 스타일의 천편일률적인 독특한 색깔의
플래카드와 선전문구, 높은 담장은 시야를 가릴 뿐 아니라 답답함을 줍니다.
중국의 문화는 담장의 문화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큰 도시는 물론 시골길을 걸어도 사람이 조금만 모여사는 동네의 집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집을 지을 때 기초부터 파고 집을 지은 후 나중에 담장을 두르는데,
중국은 담장부터 먼저 둘러친 후 그 안에서 집을 짓는다 합니다.
이렇게 같은 집을 지어도 우선순위가 다른 이웃입니다.
담장 속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외부사람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왕조가 2~300년마다 바뀌었으니 수시로 난이 일어났고
외침을 받았기에 담장의 소중함은 만리장성부터로부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국의 고유영토는 만리장성 안의 땅이며 역사인데
왜 장성 밖까지도 자기네 영토고 역사라고 역사공정을 하고 난리칩니까?
그리고 그 담장의 높이가 지붕과 거의 같은 높이입니다.
바라보면 꼭 막힌 담장으로 답답함을 느낍니다.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 그럴까요?
수시로 도적떼가 돌아다녀 그랬을까요?
그래서 성격마저도 배타적인 가운데 혼자만 살아가려고 나머지는
모두 오랑캐라고 비하했나요?
그런데 지금은 오랑캐의 역사도 자기네 역사라고 하지요.
문명국이라는 자존심을 버리고 스스로 비하했던 오랑캐가 되고 싶었나 봅니다.
어디 담장만 그런가요?
문이 아무리 두껍고 단단해도 그냥 밀어붙이면 다 열리게 마련입니다.
담장의 높이나 문의 두께는 그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베이징이라는 도시는 평지 위에 그냥 만든 도시입니다.
우리나라와는 많이 다른 모습입니다.
아마도 배산임수에 주변의 자연과 가장 잘 어울려 아름답게 조성된 도시가
서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한국의 집은 주변 자연의 형태를 그대로 이용하여 자연친화적인 모습인데
중국은 완전히 무에서 유를 창조하여 베이징처럼 무조건 크게만 짓지 않나 생각됩니다.
같은 동양이지만, 일본도 우리와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보입니다.
한국은 자연을 그대로 살려 사람의 힘은 최소한으로 하여 그 안에 자연과 함께
인간이 살아가는 삶이라면 일본은 아기자기하게 꾸미고 자연을 모방하여 자연을
내부에 그대로 흉내 내어 만들어 예쁘게 만 만든 듯합니다.
그러나 중국은 주변과 아무 상관도 없고 단순 무식 그 자체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전설의 고향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짠~ 하고 마무리합니다.
중국의 산에 가면 필수조건이 있습니다.
돌로 만든 무지무지하게 많은 계단, 케이블카, 잔도 그리고 전설입니다.
나라가 크다 보니 전설도 많고 그 종류도 다양합니다.
등장인물도 상상의 동물이라는 용에서부터 아주 다양합니다.
너무 황당한 이야기라서 더 재미나고 흥미롭습니다.
오문은 세상에서 가장 큰 문이라고 합니다.
남쪽은 양이 강한 곳이지요.
그래서 동양권에서는 궁궐의 문을 모두 남쪽으로 만듭니다.
모양은 '凹'자 형태입니다.
동양권의 나라는 모두 문이 남쪽을 향합니다.
북쪽을 의도적으로 바라보고 싶지 않았나 봅니다.
베트남의 중부지방인 후에(Hue)에 가면 응우웬(院) 왕조가 자금성이 탐이 났는지
그곳에 자금성과 거의 비슷하게 궁궐을 짓고 문 이름도 오문이라고 했으며
태화전이니 뭐니 많이 만들어 놓았더군요.
오문 위로는 오봉루(五鳳樓)라고 다섯 마리의 봉황이 날아가는 형태로 누각을 만들었습니다.
가운데 가장 큰 누각은 황제 전용으로 주요 행사를 했던 곳이라 합니다.
양 옆으로는 종루와 고루를 만들어 북 치고 장구 칠 때 사용했겠지요.
베트남도 황제라 했습니다.
중국과 맞먹겠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중국과 당당하게 따지고 덤비는 나라는 주변에서 베트남뿐일 겁니다.
중국이 가장 어려워하는 나라가 바로 베트남일 겁니다.
지난번에도 남지나해에서 문제가 생기니 베트남에서는 바로 예비군 동원령을 내려버렸지요?
때리고 싶으면 때리랍니다.
그냥 맞지만 않겠답니다.
인도와 연합하여 나짱에다가 미군이 버리고 간 군항을 인도 해군이 주둔하게 허락했습니다.
이이제이에 이열치열로 생각 없이 달려 붙는 베트남이기에 중국은 사실 두렵기도 합니다.
우습게 보았다가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한번 창피당한 일이 있기도 했잖아요.
이제 안으로 들어갑니다.
안채와 바깥채로 나뉘었답니다.
국가적으로 행사가 있을 때 사용했던 바깥채와 집안일을 주로 했던 안채로 나뉘었겠지요.
우리는 황제만 드나들었던 가운데 문으로 들어갑니다.
이 문을 통과하면 이제 본격적인 자금성 내부가 되는 겁니다.
오늘 돌아본 곳입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배가 지나고 나면 강물은 다시 잔잔해집니다.
전쟁도 끝나고 나면 세상은 다시 고요를 찾습니다.
마지막을 맞이하는 나라의 입장에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겠지만.
세월이 흘러 지금 수많은 나라가 일어났다 사라진 것을 돌이켜 보면 그게 그것입니다.
이렇게 자연은 언제나 다시 고요해지지만, 사람들 마음에만 파문이 일어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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