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1. 29. 09:43ㆍ중국 여행기/베이징(北京)
이제 오문을 지나 그야말로 황궁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우선 눈 앞에 보이는 게 바로 태화문입니다.
태화문은 태화전으로 들어가기 위한 문이라는데 왜 이렇게 크게 만들었을까요?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에게 기죽으라고 완전히 보여주기 위한 전시행정의 표본이 아닐까요?
그런데 저 기와 색깔이 황금색이라고 하던데 정말 황금색이 맞습니까?
佳人 눈에는 아무래도 개 눈에만 보인다는 그 색깔처럼 보입니다.
뭐라고요?
옴마야~ 佳人이 개라고요?
처음 자금성을 축조할 때 땅을 7m 깊이로 파고 돌과 벽돌을 채웠답니다.
바닥을 견고하게 만들기 위함이 아니고 혹시 밖에서 궁 안으로 땅굴을 파고 들어올까 봐서요.
정말 중국사람들은 의심이 많았나 봅니다.
그리고 황궁 밖으로는 52m의 해자 폭에 2m의 넓이의 담장으로도 불안해 숨어든 자가
숨을 곳도 없게 한다고 나무도 심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니 자금성은 요새 중에 요새였나 보내요.
황제로 살아가는 일이 행복한 일만 아닙니다.
이렇게 늘 암살에 대한 불안한 마음으로 살아갔으니까요.
침대도 수십 개를 마련하고 밤이면 밤마다 옮겨 다니며 잤다고 합니다.
그러니 어느 처소로 갈까요?라고 물어보는 내시는 오늘 황제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묻는 겁니다.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했다고 자랑질하는 진시황 말입니다.
진나라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가장 식겁한 일이 바로 자객
형가가 황제를 살해하려다 실패한 일일 것입니다.
그때 진시황이 식겁했다잖아요.
위의 사진에 보이는 대전의 기둥을 잡고 빙빙 돌며 자객 형가의 칼을 피하느라
오줌까지 저렸지만 발수는 물론 방수까지 완벽한 최첨단 방수 텍스로 만든
곤룡포 덕분에 다른 사람은 전혀 알지 못했답니다.
자객이 시퍼렇게 날이 선 비수를 들고 따라오는데 대전의 기둥을 잡고
빙빙 도는 마음을 누가 알기나 할까요?
이게 차라리 대전에서 할 수 있는 술래잡기라면 오죽 좋겠습니까?
결국 어의 중에 한 사람인 하무저라는 친구가 약주머니를 던져 겨우 죽음을 면하고
나중에 크게 상을 내렸다나요?
약주머니 던졌다고 목숨을 구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잘했다고 말입니다.
약주머니 던져 상 받은 사람은 아마도 하무저가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사람일 겁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진나라 어의는 퇴근 후 모두 약주머니 던지는 연습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형가의 친구 고점리도 같은 일을 도모했지만 어쩌면 친구가 이렇게도 같이
실패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유유상종이라 했나요?
제법 중국 역사상 이름께나 날린 자객이며 사마천도 자객열전이라고 하여 별도로
다루었던 형가나 그 친구 고점리의 이야기가 같이 실패하고 말았잖아요.
실패한 자객도 자객입니까?
그동안 후원자에게 많은 지원을 받으며 매일 청요리로만 대접받고, 금수레만 타고
다니며 보석이며 예쁜 미녀까지 밤이면 밤마다 불러주며 호의호식하며 지내게 했는데
밥값 정도는 해야 체면치레라도 하지요.
연나라 태자 단은 흙 하고 땅만 파서 대접했습니까?
조나라 서부인이 지녔다는 명검까지 비싼 값을 치르고 마련해 주었지만, 합려를 왕위에
오르게 한 생선 비린내 나는 어장검의 주인공인 전제보다도 못하잖아요.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천하의 진시황도 대전에 자주 가지 못했답니다.
대전에만 가면 기둥 뒤에서 형가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얼레리 꼴레리 하며
놀리는 듯하여 결국 아방궁을 새로 지었다잖아요.
생각해보세요,
다 큰 어른이 곤룡포가 흥건히 젖도록 오줌을 저리며 기둥을 잡고 빙빙 돌며
북망산 가까이 갔다 왔는데 그 장소가 어찌 마음에 들겠습니까?
그런데 佳人은 대전의 기둥만 보면 왜 자꾸 진시황의 겁먹은 얼굴이 떠오르죠?
기둥 때문에 또 다른 엉뚱한 생각을 잠시 하였네요.
방화시설로 궁내에는 모두 360개의 구리로 만든 항아리가 있었으며 겨울에 어는 것을
막기 위해 아래는 불을 땔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수차례 화재에는 결국 당할 수 없었나 봅니다.
9.999개의 방을 만들어 황태자가 태어나면 하루에 방 한 군데만 잠을 자면
모두 돌아오면 27세의 건장한 나이가 되고 두 바퀴를 돌면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다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하늘의 천제(天帝)가 살았다는 자궁(紫宮)과 같은 금지구역이라는 의미의 자금성은
그래서 천제의 아들인 천자가 살았나 봅니다.
오문과 태화문 사이에 벽돌이 깔려있는 넓은 마당에는 한백 옥을
정교하게 다듬어 만든 다리가 있습니다.
아마도 중국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 할 겁니다.
그 다섯 개인 다리의 의미는 각각 仁義禮智信을 의미한다 합니다.
그 아래로 물이 흐르는데 이 물을 금수하라고 한다는군요.
그 모습이 지금은 지저분하지만, 옛날에는 무척 맑은 물이 흐르지 않았겠어요?
그 모습이 마치 옥으로 만든 허리띠를 풀어놓은 모습이라 하여 옥대하(玉帶河)라고도
한다는데 그 용도는 비가 오면 물길이 필요하였고 혹시 궁궐에 불이라도 나면
소방용수로 사용하기 위해 인공으로 만든 개천입니다.
조경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무미건조한 황궁에 개천을 만들어 놓아 한층 더 멋집니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으로 천도하며 한양도성으로 들고나는 문 중 사대문이
바로 인의예지신을 의미하는 이름을 지었지요.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이 바로 그 이름에 仁義禮智를 넣었으며
마지막으로 한양 가운데 보신각을 지어 信을 넣었습니다.
금수교(金水橋)라고 부르는 다리 중 가운데 다리는 또 황제만 다니는 다리랍니다.
이제 그 다리를 건너 안으로 들어가면 태화문을 만나게 됩니다.
원래는 양쪽으로도 들어갈 수 있게 두 개의 문이 있습니다.
그 문은 지금 황실의 물건을 보관하는 33개의 건물로 들어가는 문이지만,
지금은 들어갈 수 없게 하였네요.
오문을 통과한 다음에 태화문 안으로 더 들어가면 삼대전이라 부르는 세 개의 대전을 만나게 됩니다.
이곳부터 내정에 이르기까지 나무 한 그루 없지요.
물론 우리나라 경복궁도 그렇게 하였지요.
혹시 자객이라도 숨어들어 나무 사이에 숨어있기라도 한다면 쉽게 발견할 수 없잖아요.
황제의 신변은 소중하니까...
삼대전은 전조의 핵심입니다.
이윽고 태화문에 도착합니다.
태화문은 현존하는 중국 최대의 목조문이라 하네요.
태화문은 처음에는 하늘을 받든다는 의미로 봉천문(奉天門)이라 했지만,
수차례 화재로 소실되고 다시 짓고...
하늘을 받든다고 봉천문이라 했지만, 하늘이 화재예방에 전혀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 후에 청대에 만주족이 한족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크게 서로 화합한다.'라는 의미로
太和門이라고 바꾸었다고 하네요.
맞아요.
화재 한 번 잡아주지 못하는 하늘이 무슨 얼어 죽을 하늘입니까?
차라리 백성을 섬기는 일이 실속이 있잖아요.
문 이름 그렇게 지었다고 돈 더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한족 기나 살려주지요 뭘~
문 이름을 짓는데도 서로 화합하는 마음으로 지었습니다.
문 이름 하나 화합한다고 지어서 그랬나요?
다수의 한족이 만주족의 지배 아래 한동안 숨을 죽이고 살았지요.
몽골의 지배는 100년을 넘기지 못했지만, 만주족은 제법 오래 지배했잖아요.
중국이 앞으로도 이웃나라와 같이 더불어 사는 이런 화합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글자만 그렇게 쓰고 마음은 콩밭에 가있으니 우짜면 좋겠습니까?
그래도 요즈음에는 세상 여러 나라 사람을 위한다고 오디오 가이드도 만들어
태화문 앞에서 서비스도 합니다.
물론 한국어 서비스도 하지요.
여기서 빌려 들으며 갈 수 있고 반납은 북문으로 나갈 때 해도 된다고 하더군요.
중국어는 10원이고 다른 나라 말은 40원이군요.
젠장 ~ 이러면서 무슨 세계인민단결만세를 외칩니까?
보증금은 100원이군요.
위의 문은 태화문입니다.
아마도 자금성 안에서 가장 큰 문이 아닐까요?
명대에는 황제가 이 문에 옥좌를 놓고 앉아서 신하의 상소를 경청하기도 한 곳이었다죠.
문에 박아놓은 금으로 도금한 문정(門釘)은 9행 9열로 황제만이 사용하는
가장 큰 수를 의미하지요.
이 문정은 복과 장수를 상징한다고 하여 드나드는 사람마다 만지게 되니
매년 도금을 새로 해야 한답니다.
만주족은 과거 몽골의 원나라가 중국을 지배할 때 한족의 차별화 전략으로
끊임없이 반란이 일어나 100년도 통치하지 못하고 쫓겨난 것을 알고
있었기에 융화정책을 많이 편 듯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남이가? 점령군 행세하지 않을 테니 한족도
우리 만주족의 지배를 인정해라~"
뭐 이런 의미가 아니겠어요?
위의 문이 활짝 열리고 군사가 말을 타고 이 문을 넘어올 때면 종묘사직은 거덜 납니다.
태화문 앞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게 바로 청동 사자상 한 쌍이 아닐까요?
물론 보는 사람에 따라 사자가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다.
건륭제 때 만든 작품으로 들어가며 오른쪽에 있는 수사자는 세상을 의미하는
여의주를 발로 밟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여의주를 발로 밟고 있다는 의미는 아마도 천하를 발아래 두려고 만들었을 것 같습니다.
생긴 게 참 험상궂게 생겼습니다.
왼쪽에 있는 것이 암컷입니다.
암수를 구분하는 것은 팬티를 벗겨야만 한다는 편견은 버리세요.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녀석이 암사자입니다.
벌러덩 누워 자빠진 새끼의 배를 왼발로 누르고 있는 모습으로 중국사람은
사자는 발가락 사이에 젖이 있다고 믿어서 그렇게 만들었다 합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했습니까?
사자도 보지 못했답니까?
발가락 사이에 젖이라니요?
사자가 이 소리를 들었다면 하품할 일입니다.
새끼 사자가 자빠져 젖을 빠느라 무아지경에 빠진 듯합니다.
가끔 미련 곰탱이 같은 암사자는 새끼에게 젖을 먹인다고 하다가 깜빡 졸기라도 하면
그 여린 새끼를 밟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런 암사자는 빠떼루라도 받아야 하겠어요.
아니군요? 진정 빠떼루를 받아야 할 사람은 이런 엉뚱한 이야기를 꾸민 사람이겠군요.
아~ 이 녀석아 빠떼루는 엎어져 받아야지 자빠져 있으면 어쩌냐?
오늘 심심한데 사자에게 시비나 걸고 가렵니다.
사자!
너는 한 때 세상의 으뜸가는 하늘의 아들인 천자의 아들 황제를 모신다고 폼 잡았지만,
이제 네 세상은 끝이 났단다.
요즈음 중국을 돌아다니다 보면 업소마다 암수 쌍으로 모두 사자로 대문을 장식했단다.
젠장 성인용품 파는 가게 앞에서도 너를 보았지.
그런데 너도 이 사실을 알면 충격 먹을 테지만, 알고 있어야 한단다.
요즈음은 시골 가정집의 대문에도 네가 세트로 있단다.
물론 비싼 돌로 만들 수는 없어 비닐에 인쇄하여 코팅까지 하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변치 않고 집이나 지키라고...
우리나라의 시골집에는 집이나 지키는 게 뭔지 아니?
독구란다.
사자가 개가 되니 네 세상은 끝이 났나 보구나.
네가 받을 충격을 생각해 이 사진을 올려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단다.
그래도 세상이 변했음을 너도 알아야 하지 않겠니?
잘 봐 두거라.
오른쪽에 여의주를 밟고 있는 수사자, 그리고 왼쪽에 찌찌 먹이는 암사자.
정확하게 위치도 틀리지 않게 붙여 놓았지 않니?
이게 지금의 너란다.
사자!
이제 너도 퇴장할 시기가 되었나 보다.
노사자는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라고?
이제 태화문 앞에서 시비도 했으니 그만 다음 장소로 넘어가야겠습니다.
내일은 태화문 뒤에 있는 태화전으로 들어가 보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인간이 가진 능력 중 가장 위대한 것은 처음 보는 것이라도 그것을 이해하고
이치를 알아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일은 바로 이런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여행이 필요하고 많은 곳을 다닌 사람일수록 더 많은 지혜를 지닐 수 있습니다.
세상과 교감하며 지혜를 터득하는 일이야 말로 우리가 후손에게 가르쳐주어야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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