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2. 12. 00:03ㆍ중국 여행기/베이징(北京)
가이드가 없이 이렇게 독립군이 되어 자유 배낭여행을 하다 보면
누가 알려줄 사람이 없는 게 제일 힘든 일이죠.
그러기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들어오면 사람과 건물만 보고 나가게 됩니다.
佳人 혼자만의 생각으로 하는 이야기가 무척 지루하고 재미없으셨을 겁니다.
뭐 가이드와 함께 들어왔더라도 함께 여행을 온 일행이 많을 경우, 뒤에 서서는
가이드의 말이 들리지도 않고 한마디라도 들으려고 사람 사이를 헤치고 앞으로 나가면,
"돌아보세요."라는 마지막 말만 듣기 십상이지요.
이곳에서도 한국 단체 분을 만났지만, 대부분 독립군이 되어
여행자끼리만 몰려다니며 고생하시더군요.
어화원에는 이곳 외에도 춘하추동 사계절을 의미하는 네 개의 정자가 남아 있다는데...
완춘팅(萬春亭 : 만춘정), 푸삐팅(浮壁亭 : 부벽정), 쳰치우팅(千秋亭 : 천추정) 그리고
촁뤠이팅(澄瑞亭 : 징서정)이 바로 그 이름처럼 계절마다 최고의 비경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좁은 공간에 만든 곳이라 순전히 말로만 그렇다는 말이지,
우리가 사는 곳의 춘하추동과는 다릅니다.
한편, 어화원에는 작은 통로가 구석구석 빈틈없이 이어져 있습니다.
이 통로에는 5가지 색깔의 작은 돌과 기와 조각으로 만든 720폭의 그림이 담겨 있다고 하니
바닥을 내려다보며 찾아보며 걷는 일도 즐거울 것 같습니다.
농사 한번 지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소를 부리며 쟁기질하는 풍경도 보입니다.
사냥은 좋아했으니 동물도 보입니다.
저잣거리의 행상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어찌나 무료했던지 나중에 쑤저우지에를 가면 소꿉장난 하듯이
상가를 만들어 놓고 그곳에서 황제를 비롯한 황가 사람은 고객이 되고 태감이나
궁인들은 가게 주인이 되어 장사 놀이도 했던 어린아이들과도 같은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이때부터 고객은 왕이라는 말이 생겨났을 겁니다.
총길이가 약 300보에 이르는 이 그림들은 중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삼국지의
내용도 담고 있다니 아름다운 정원의 모습과 더불어 재미있는 소설까지
구경할 수 있어 우리에게도 일거양득의 즐거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곳에 가시면, 앞사람 머리만 쳐다보지 마시고 가끔 바닥도 내려다보고 가십시다.
그 뒤로 동륙궁과 서륙궁이 동서로 나뉘어 있습니다.
동륙궁에는 진보관이 있는데 황실에서 사용하던 공예품을 전시해 놓았다 합니다.
그 외 경인궁, 영화궁, 승건궁, 연희궁, 종수궁, 경양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경인궁은 원대에 만든 궁으로 하얀 대리석이 무척 아름다운 궁전으로 청나라 말기
비련의 여주인공이었던 광서제가 그렇게 아끼고 사랑했던 진비(珍妃)의
침궁으로 유명한 곳이라 하며 영화궁은 원래 이름은 영안궁으로 승정제 때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으며 광서제의 근비(瑾妃)가 거처했던 곳으로
지금은 승건궁과 더불어 도자기 전시장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승건궁은 순치제가 좋아했던 동소악(童小鄂)의 침궁이었다 하네요.
동소악은 죽은 후 순치제에 의해 황후로 추존되었으나 끝내 순치제는 그녀를
잊지 못해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출가하여 평생 그녀의 명복을 빌며 승려로
생을 마감했다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입니다.
아무리 무소불위의 황제일지라도 가끔 이런 순애보적인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다.
이 궁은 훗날 황실의 물고기와 새를 기르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하네요.
연희궁은 도광 30년과 함풍 5년에 발생한 두 차례의 큰 화재로 그 이름이
수장궁으로 바뀌었던 곳입니다.
그 후 다시 신식 공법으로 개축되어 지금은 궁내에 유일한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 되었답니다.
종수궁은 원래 함양궁이었다는군요.
주로 태자가 거처하는 곳으로 청말 광서제의 황후였던 융유(隆裕)의 침궁으로
사용되었으며 어린 나이에 청나라 황제에 오른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도
이곳에서 입궁 후 잠시 머물렀던 곳입니다.
경양궁은 명나라 신종 만력제의 황후였던 효정황후의 침궁이었다는군요.
강희 25년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하여 한때 황실 서가로 이용되기도 한 곳입니다.
지금은 황실 의류를 보관 전시하는 곳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동륙궁에는 여섯 개의 궁 외에도 많은 전각과 제실이 모여 있습니다.
서륙궁에는 영수궁, 익곤궁, 저수궁, 장춘궁, 함복궁, 태극전을 말하는데,
장춘궁에는 사방으로 연결된 회랑에는 소설 홍루몽을 주제로 한 그림이 있는 곳입니다.
선통제의 숙비인 문수의 거처로 낭만적인 궁인 셈입니다.
익곤궁은 서궁 비빈들의 거처로 서태후도 귀비 시절 이곳에서 기거하였던 곳입니다.
저수궁은 광서제의 총비였던 진비가 처음 황제의 승은을 입은 곳으로 유명하다고 하네요.
마지막 황제 푸이의 황후인 완용도 이곳에서 지냈다고 합니다.
그중 익곤궁과 저수궁을 이궁이라 하는데 저수궁은 서태후의 침실로 사용되었고
그곳에서 함풍제의 유일한 아들인 동치제를 낳았다고 하네요.
저수궁과 익곤궁 사이에 있는 체화전은 식탐이 많고 입맛이 까다로운 서태후가
개인 식당으로 사용하였다 하네요.
이런 것을 보면 서태후의 당시 권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영수궁은 명나라 시절 최악의 전횡을 휘두른 환관 위충현이 공놀이 하던 곳으로 알려졌습니다.
함복궁은 원래는 수안궁이라 했다는군요.
태극전은 미앙궁으로 동치제의 후궁인 유비가 거처했던 곳입니다.
서륙궁 남쪽에 있는 양심전(養心殿)은 황제의 집무실이자 거처로 사용되었던 곳입니다.
특히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한 곳으로 유명세를 타지요.
"工"자 형태의 건물입니다.
아직도 내전 옥좌 뒤에는 발이 쳐져 있어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이곳은 지금도 많은 관광객이 기웃거리는 곳이기도 하답니다.
위의 사진에서 발이 처진 게 보이십니까?
마지막 황제 푸이가 이곳에서 퇴위하겠다고 서명을 한 역사적인 곳입니다.
사실 퇴위하겠다고 한 게 아니고 퇴위하라고 압력을 받고 견디다 못해 한 곳이지요.
그러니 이곳이 바로 수천 년을 이어온 중국의 군주제가 끝장났던 역사적인 장소인 셈입니다.
함풍제는 승려 격림심과 함께 이곳에서 군신포아예(君臣抱兒禮)라는 행사를 대대적으로
주관하였고 동치 7년에는 중국번이 3차에 걸쳐 상소를 통해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할 것을
주청하여 받아들여졌던 곳이지요.
비록, 자금성 안의 수많은 전각의 하나이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정말 엄청난 일이 벌어진 곳입니다.
전각 하나가 역사의 소용돌이를 혼자 간직하기에는 너무도 힘겨워 보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사람이 이 건물을 둘러보고는 하는가 봅니다.
우화각 뒤편에 있는 서화원은 아름다운 누각과 수목이 우거져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가경제는 건륭제 때 모아두었던 많은 보물과 그림들을 이곳에 보관하였으나 마지막 황제
푸이가 폐위되고 난 후 혼란한 틈을 타 먼저 본 사람이 임자라고 많은 도둑이 들끓게 되었답니다.
설상가상으로 1923년 6월 26일 징셩짜이(敬勝齊 :경승제)에서 큰 불이 나는 일이
벌어졌다는데 이 불은 삽시간에 번져 서화원을 불바다로 만들며 그곳에 보관하던
수많은 보물과 그림, 책 금불상 등을 삽시간에 재로 만들어 버린 이야기도 남아있는 곳입니다.
자금성...
정말 넓은 구중궁궐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무척 많은 사연이 남아 있습니다.
진비는 언니와 함께 황제를 모시던 이 아름다운 여자.
그러나 한 여인의 비뚤어진 생각으로 25살 때 언니와 함께 살해당하고
우물에 버려진 여인을 누가 기억이나 하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아름다운 이 여인의 꿈을 짓밟아버렸습니까?
자희태후에게 물어보면 이 여인이 자신을 능가할 여인으로 판단되어 죽였다고 할까요?
사람들은 이곳이 화려한 곳이고 인간으로 태어나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무대라 하지만,
佳人의 생각에는 전혀 인간적이지 못한 숨이 막히는 곳이었습니다.
이제 우리 부부는 북문이라는 신무문을 통해 자금성의 북쪽으로 나옵니다.
아침 8시에 숙소를 출발해 8시 30분부터 정양문을 통과해 천천히 걸어
천안문 광장을 가로질러 자금성으로 들어왔습니다.
이제 북문인 신무문을 통해 나간 시각이 오후 2시경입니다.
그러니 전부 6시간이 걸려 자금성을 구경한 셈입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이런 곳에서는 바삐 겉모습만 보고 지나가지 맙시다.
가끔은 자리를 깔고 앉아 시간을 거꾸로 돌려 그때로 돌아가 봅시다.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앞으로 무수리도 지나가고 궁인들도 지나갔을 겁니다.
안 보이신다고요?
너무 피곤해 제가 헛것이 보이기 시작하나 봅니다.
그녀들은 궁내에 있었던 작은 일에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귓속말로 소곤거리며
확대 재생산을 했을 겁니다.
그 이유는 이 안에서의 삶이 무척 단조롭고 지루했기에
할 일이 그런 일밖에는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 같은 보통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은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이 없었다면 살아가는 일이 무척 힘이 들었을 겁니다.
한줄기 바람을 느낄 수 있어도 사랑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고
낙엽 하나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 보아도 가슴 한구석을 따뜻하게 채우는
그런 사랑 말입니다.
지나고 나니 모든 게 사랑이었습니다.
여행 중 동행의 손을 한 번 잡아도...
미소 한 번 지어도...
눈길 한번 주어도 그게 모두 사랑이었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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