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성의 교태전과 곤녕궁

2011. 12. 9. 00:29중국 여행기/베이징(北京)

 

그 뒤로 자오타이톈(교태전 : 交泰殿)이 보입니다.

교태전이라는 말은 주역에서 나오는 天地交泰라는 말로 제11괘 지천태(地天泰)에

나오는 말이로 지천태는 하늘(天) 위에 땅(地)을 올려놓은 모양으로 괘의 이름은 태(泰)라

는 말이라고 하니 그러니 천지교태라는 말은 하늘과 땅이 만나 화합하는 의미겠지요.

 

 

그 뒤로 물론, 처음에는 황후가 거처하는 침실로 사용되었던 곳이지요.

그러다 보니 황제의 보좌는 없고 황후의 보좌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명대를 거쳐 청대로 접어들며 황후의 공식업무와 옥쇄를 보관하는 장소가 되었고

황후가 주관되어 치르는 침잠 행사 등이 이곳에서 열렸답니다.

정월 초하루나 황후의 생일에도 신하들의 인사를 이곳에서 받았겠지요.

 

 

그러나 처음에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황제와 황후가 길일을 택해

아름다운 밤을 보내기 위해 합방하던 곳이었답니다.

아무리 황제라 해도 함께 밤을 보내는 일은 황제 마음대로 정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주로 그날은 황태후가 정하였고 하늘을 우러러 가장 좋다고 하는 날을 택해

합체를 명령하였다 합니다.

 

 

그러니 황제라 해도 다른 여인을 빼고 황후하고 합체하는 일은 이렇게

명령에 따라야만 했다니 알다가도 모르는 일로 그날 밤은 물론

모든 후궁은 비상이 해제되고 국가 휴무일로 정해져 아주 편안한 밤을 보냈겠지요.

 

 

이 교태전 안에는 강희제가 직접 쓴 '무위(無爲)'라는 글이 걸려 있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무위도식하라는 말입니까?

별일도 아니면서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도교의 정치적 이상을 함축한 표현으로 자연과 세상의 흐름을 억지로 막으려 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저절로 조화를 이룬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그런데 왜 이런 글을 황제와 황후가 모처럼 만나 사랑을 속삭이는 곳에 걸어놓았을까요?

두 사람 사이에 밤새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래서 황제와 황후는 이곳에서 더는 사랑을 속삭이지 않았나 보네요.

 

 

천장에는 여의주를 입에 문 황제의 상징인 용과 황후의 상징인 봉황이 뒤엉켜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기에 사진을 이렇게밖에는 찍을 수 없네요.

이렇게 밤새 뒤엉켜 있어도 사랑 한 번 제대로 나누지 못했나요?

다른 의미로 황후는 외척 세력과 더불어 정사에 관여하지 말고

개입하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하다는군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서태후라는 권력의 화신을 만들었고 그런 이상한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

하나로 하여금 청나라는 돌이킬 수 없는 망국의 길을 걷게 되었으니 세상 일은 알 수 없습니다.

이 무위(無爲)라는 말은 서태후에게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말을 줄여 무위라 해석하고

자기 마음대로 정사를 농단했나 봅니다.

이렇게 무식하면 용감하게 세상을 바꾸는 힘을 갖게 되나 보네요.

 

같은 칼도 요리사에게는 아주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도구이지만,

강도에게는 흉측한 살인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위에 달린 저 구슬이 무섭지도 않았나요?

입장료를 그렇게 많이 받았으면 청소라도 제대로 했으면 좋겠네요.

사진으로 찍고 보니 아주 뽀얗게 먼지가 앉았네요.     

 

양쪽으로 시계가 있습니다.

동쪽에 있는 것이 물시계인 동일유누(銅壹油漏)이고,

서쪽에 있는 것이 서양의 시계 대자명종입니다.

불타는 밤이 아쉬워 시간 계산이나 잘하라는 의미입니까?

환장하겠습니다.

 

 

건륭제는 이곳에 황제의 옥쇄를 25개나 만들어 보관하였다 합니다.

건륭제 집안이 도장포라도 했나요?

건륭제 시기라면 청나라의 가장 국력이 강했던 시기가 아니겠어요?

그 의미는 앞으로 청나라 황제가 적어도 자신 이후 25대까지 천 년 정도 더 번창하라는 의미?

당시의 평균 수명 40이라고 보면 25개를 사용하려면 천 년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 천 년의 제국이 그리 쉬운 게 아니지요.

중국의 왕조는 길어야 2~300여년밖에는 유지되지 못했잖아요.

 

 

헐!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 푸이까지는 겨우 6대 200년 만에 장사가 거덜 나는 바람에

폐업 정리하고 말았잖아요.

작은 가게 하나라도 폐업 정리하려면 골치가 아픈데 한 국가를 정리하려면 어땠을까요?

화무십일홍, 권불십세라 했나요?

그 권력이라는 게 구름 같고 바람 같아 죽은 귀신은 제삿밥도 얻어먹지 못해

아무리 황제라 해도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지내고 있지 않겠어요?   

 

 

그다음이  쿤닝꿍(곤녕궁 : 坤寧宮)입니다.

명대에는 황후의 침실로 또 청대에는 궁중의 제례의식이 행해지던 곳입니다.

황제의 비빈들은 이 궁을 중심으로 양쪽에 있는 똥류꿍(東六宮 : 동륙궁)과

시류꿍(西六宮 : 서륙궁)에 기거를 했습니다.

아마도 자금성 안에서 가장 은밀한 곳이 이곳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三宮六院이라는 말이 이곳에서 생긴 말이겠지요.

 

 

곤녕궁은 이자성의 난 때 농민군이 밀어닥치자 황후가 목을 매 자살한 곳이기도

한 곳으로 사실 황제가 자살하라고 부추겼지만요.

그래서 이곳은 더 많은 중국 관광객이 밀려와 구경하는 곳입니다.

가이드마다 깃발을 들고 이곳에 오면 휴대용 스피커의 볼륨을 더 올리나 보네요.

 

 

이자성의 난 때 불에 타 없어졌으나 순치제 때 다시 복원한 곳입니다.

황궁의 다른 곳과는 달리 만주족이 신성시하는 동쪽을 향하여

모든 문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추운 곳에 살던 만주족은 문을 대부분 동쪽으로 만들었나 봅니다.

 

 

많은 사람 사이에서 유리창을 통해 사진을 찍다 보니 어쩔 수 없네요.

그런데 유리창을 통하여 들여다보고는 섬뜩한 생각이 들었어요.

바로 위의 사진에 보이는 밧줄 말입니다.

이자성이 말을 몰아 농민군을 이끌고 자금성을 점령하던 날 황후는 목을 매 자살했다고

했는데 그러면 혹시 저 밧줄이 그 밧줄 아닐까요?

물론 그 밧줄이 아니겠지만, 이게 포퍼먼스인가요?

행위예술인가요.

이자성은 왜 욕지거리하며 들이닥쳐 여러 사람 힘들게 했나 모르겠습니다.

 

 

그 동쪽에 마련된 똥난거(東暖閣 : 동난각)은 황제와 황후가 초례를 치르고

3일간을 보냈던 곳인데 그래 지난밤에는 따뜻하게 보내셨나 모르겠습니다.

외국으로 신혼여행도 못 가고 이곳에 신혼방을 차렸답니다.

정말 우리 중생보다 재미없게 살았습니다.

 

3일 후 황제는 다시 제 방으로 돌아갔다 하니 과연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나 싹틀 시간이 있었을까요?

사랑은 서로의 체온을 오래 느낄수록 더 강한 사랑이 싹트는 게 아닐까요?

황제야 아무 체온이나 상관없습니까?

 

 

강희, 동치, 광서제가 이곳에서 첫날밤을 보냈다 하며 처음 세워졌을 때는

비밀 침실로 만들어졌는데 옹정제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후 만든 건물이라는군요.

서쪽의 서난각(西暖閣)은 만주족의 토착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곳입니다.

 

 

오래 돌아다니다 보니 그 전각이 그 전각이고...

그 건물이 그 건물로 보입니다.

잠시 쉬며 머리를 정리하고 가야겠어요.

여행이란 즐거워야 하잖아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황제의 삶이 겉으로는 화려해 보여도 실상 내부로 들어가면, 정말 안쓰럽습니다.

佳人처럼 무지렁이로 살면 밤에 잘 때 그냥 두 다리 쭉 뻗고 코까지 골며 잠을 잡니다.

백수마저 된다면, 자고 일어나는 시간마저 누구에게 간섭받지 않고 아주 자유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