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2. 10. 09:25ㆍ중국 여행기/베이징(北京)
자금성은 워낙 넓은 곳이라 돌아다니다 보니 여기가 거기고 거기가 여기처럼 보입니다.
전조는 단순하여 금방 이해가 되는데 내정은 워낙 복잡하고
미로처럼 얽혀 도무지 구분이 어렵네요.
가이드의 도움 없이 혼자 배낭여행을 한다는 것은 무척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역사적인 이야기가 있는 곳은 특히 기본적인 내용을 알아야
어느 정도 그곳에 대해 알 수 있잖아요.
그런데 자금성의 내정과 동륙궁, 그리고 서륙궁은 돌아다녀 보니 모두 같아 보입니다.
이때는 잠시 머리도 시킬 겸 의자에 앉아 쉬며 지도라도 보며 방향부터 익혀야겠습니다.
그냥 적당히 보고 나가자니 입장료가 아깝습니다.
자금성은 중국인민에게만 할인 혜택을 준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화딱지가 나 더 자세히 보렵니다.
용이 꿈틀거리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세요?
먼저 본 곳이지만, 좋은 곳은 다시 보고 가렵니다.
바닥에 누워 있으니 土龍인가요?
자금성의 은밀한 곳, 그들만의 리그가 벌어졌던 곳을 내정이라 구분하는가 봅니다.
그 처음이 바로 건청문을 들어가는 일이 아닐까요?
외조의 삼대전 중 마지막 보화전 뒤로는 자금성에서 가장 큰 석조 계단이 있고
그 가운데에는 위롱다스댜오(雲龍大石雕 : 운룡대석조)가 있습니다.
여기서 바라보면 앞에 건청문이 보입니다.
바로 외조와 내정을 구분하는 경계선이 이곳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건청문을 지나면 바로 건청궁이 있습니다.
바로 황제가 주로 거처했던 곳이라는군요.
황제는 하늘이고 황후는 땅이라는 말입니까?
황제가 거주하는 곳은 하늘을 의미하는 건(乾) 자가 들어간 건청궁이라 했고
황후가 거주했던 곳을 땅이라는 의미의 곤(坤)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곤녕궁이라 이름 지었나 보네요.
그 사이에 있는 게 교태전으로 명나라가 처음에 만들었을 때는
황제와 황후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곳입니다.
그러나 황제와 황후가 아무리 사랑을 하고자 해도 아무 때나 합방을 하는 게 아닙니다.
반드시 날을 받아 길일에만 이곳에서 합방하게 됩니다.
황제라고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닌 모양입니다.
곤녕궁은 청대에 이르러 황후의 거처에서 용도가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바꾸어 버렸다는군요.
황제의 후궁들은 곤녕궁을 중심으로 양쪽에 있는 동륙궁과 서륙궁에 거주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곳은 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단청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망한 황제의 집이라도 마치 흉가처럼 만들어 버렸습니다.
한때는 나는 새도 떨어뜨렸지만, 지금은 새똥만 떨어지나 봅니다.
지금의 북경은 명대에 만들어진 기본 틀을 유지하고 있다는군요.
명나라 주원장이 당시 원나라의 도성인 다두(大都 : 지금의 북경)를 점령하고
북쪽을 깨끗하게 평정했다는 의미로
북경을 북평(北平)이라고 개명하고 황궁을 비롯한 도시 전체를 철저하게 부수어버립니다.
원래 정복자는 먼저 세력의 기를 누르기 위해 철저하게 파괴하는 일을 제일 먼저 하고는 하지요.
뭐 지금도 단청도 손보지 않고 아래 사진처럼 운룡석조가 깨져도 보수조차 하지 않습니다.
만약 저 용이 다시 꿈틀거려 세상을 호령할까 봐 겁나서 그러는 것은 아니겠죠?
그 이유는 당시에 명은 지금의 남경을 도성으로 삼았기에 북경은 없어도 되는 도시였을
것이고 한족의 처지에서 오랑캐라고 했던 민족이 세운 나라이고 혹시나 이곳을 그리워하며
오랑캐가 다시 남으로 밀고 내려올까 봐 그 싹을 모조리 없앤다는 의미로
철저하게 파괴를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철저한 파괴가 오히려 나중에 영락제가 천도를 북경으로 하는 데
오히려 계획도시로 만들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준 셈이 되지 않았을까요?
영락제는 아비인 주원장을 따라 이곳에 원나라를 쫓아내고 만리장성을 넘어서까지
철저하게 몰아냈다 하는데 그런 이유로 베이징에는 많은 군사가 남아 있게 되며
후일 영락제가 조카가 이어받은 황제의 자리를 빼앗고 남경에서 이곳으로
천도하게 된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베이징은 삼중의 틀로 이루어졌습니다.
외부는 민가와 상점과 조정의 여러 기구와 왕자가 사는 지역이고 그 안에 황궁이 있고
다시 그 안에 궁성이 있습니다.
궁성은 전조 후침(前朝後寢)의 6개 대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전조는 아주 간단합니다.
바로 삼대전이라도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만 보면 되니까요.
전조는 황제가 정사를 돌보고 국가의 주요 행사가 열리는 곳이고 후침은
황제와 그 일행이 거주하는 곳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전조인 삼대전은 봉천전, 화개전, 근신전인데 명대 후기로 들어오며 황극전, 중극전,
건극전의 바뀌었다가 청대에는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그게 그겁니다.
이게 무슨 튀김 전문점도 아니고 다양한 전만 있네요.
지하철역 이름 바꾼다고 역이 이사 가는 게 아니잖아요.
명대 후기에 極자가 들어간 이유는 이곳이 지상의 북극성에 해당하는 곳이기 때문이고
청대에 和라는 글자가 들어간 이유는 오래도록 천하가 태평하고 황제의 군위가 영원하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주역에 나오는 말인 保合大乃利貞(보합대내이정 : 크게 화합을 보전하고
합해서 이에 이롭고 바르게 하니라.)의 和라는 글자를 사용했다 합니다.
바로 만주족이 한족을 보고 "우리가 남이가?" 하며 화합하자는 말이 아닐까요?
후침은 황제가 거처하는 건청궁이 있고 황제와 황후가 길일을 잡아 합방하는
교태전이 있고 주로 황후가 거처하는 곤녕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또 그 양쪽으로 동궁과 서궁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동궁은 태자가 거처하고
서궁은 황후가 주로 거처했답니다.
나라의 정사를 논의하고 발표하는 공식적인 업무를 하는 전조와는 달리 후침은 한번 발을
디디면 쉽게 나갈 수 없는 은밀한 곳으로 권력을 두고 암투가 벌어지고 골육상쟁의
잔인한 일이 많이 일어난 곳입니다.
여인의 눈물과 한숨과 환희가 함께 얽혀 있던 곳입니다.
이곳을 거닐다 보면 여기저기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혹시 자금성을 가신다면 바삐 둘러만 보지 마시고 높은 담벼락에 귀를 대고
그곳에 살다 간 여인들의 하소연도 들어주고 갑시다.
우리가 바삐 그냥 간다면 그녀들의 한을 누가 들어줄까요?
그러면서 서로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권모술수와 모략과 암투가
극심했던 곳이기도 하잖아요.
경쟁에서 탈락하면 살아있어도 없는 듯 유령처럼 살다 죽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말하는 서태후는 바로 서궁에 거주했던 태후였기에 서태후라 불렀지요.
아마도 이곳이 배출한 스타플레이어를 뽑으라면 서태후가 일등으로 당선될 것입니다.
그녀는 이곳이 배출한 중국 최고의 우등생인 셈입니다.
구궁은 남북이 960m, 동서가 750m의 장방형으로 만든 건축물입니다.
방의 개수가 9999개라 하지만, 실제로 8886칸이라고 하네요.
그러니 그냥 남문으로 들어와 북문으로 걸어가는 데에만 제법 시간이 걸리는데
한 번 와 보면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그러나 원리만 알면 크게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체력입니다.
지치기 쉽고 집중력이 떨어지기에 대부분 건성으로 보게 되겠지요.
佳人도 처음 와본 곳인데 무얼 알고 얼마나 느끼고 가겠습니까?
건성으로 대강 보고 가는 게지요.
위화위엔(어화원 : 御花園)은 자금성 안에 있는 인공으로 만든
가장 큰 황실 정원인 셈입니다.
원래 이름은 꿍허우위엔(궁후원 : 宮后苑)이라고 했다지요.
자금성에는 황제의 안위를 위해 전조에는 나무를 심지 못하게 했지만,
이곳은 제법 많은 나무를 심고 그 사이에 건물을 지어놓았습니다.
정원의 동쪽 한구석에는 태호석을 쌓아 만든 뚜이수이산(堆秀山 : 퇴수산)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전혀 좌우를 생각하지 않고 비대칭으로 쌓아 올렸습니다.
그냥 하기 싫은 사람 일 시켜 놓으면 이렇게 아무렇게나 집어던진 듯
바위를 쌓아 올린 것처럼 보이는군요.
비록 인공산이지만, 정상에 오르면 자금성의 높디높은 담장 너머 세상을
그나마 내다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지요.
이곳에 한번 들어오면 죽어서야 나갈 수 있는 곳이 아니겠어요?
그나마 이곳을 산책하는 게 유일한 낙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그곳에 올라 궁인으로 들어와 이곳에서 한 세상을 보낸 덜수의 누이동생 덜순이가
바라본 세상을 함께 내다봅니다.
주변에는 20여 개의 전각과 정자를 만들어 놓아 재미없는 이곳 생활에 조금이나마
재미를 느껴라 했습니다.
중앙에는 톈이먼(天一門)이 있고 안으로 들어서면 화재예방을 위해 물의 신이라는
현무(玄武)에게 제사를 올리던 친안톈(欽安殿 : 흠안전)이 있습니다.
자금성이 화재예방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가 짐작할 수 있지만,
그래도 많은 화재가 일어난 곳이지요.
흠안전 주변을 보면 수십 그루의 측백나무가 기묘한 형상으로 얽혀 있습니다.
가만히 바라보면 사랑이 그리워 몸부림치는 모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나무는 서로서로의 가지를 휘감아 기대어 수백 년을 지냈나 봅니다.
만수산 드렁칡처럼 서로서로를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뿌리가 다르지만, 이렇게 이곳에 서로 얽혀 살아갔나 봅니다.
결국, 이곳에서 세상을 보낸 많은 사람의 마음이 나무로 표현되어 있다는 생각입니다.
인간의 삶이 참 힘든 삶이었나 봅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한때는 세상의 가장 깊숙한 곳이었습니다.
누구나 이곳을 선망했던 곳입니다.
그러나 한번 발을 들이밀면 죽기 전에는 나갈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지금이야 누구나 수시로 이렇게 입장료만 내면 들어왔다 나갈 수 있지만...
이곳은 모든 사람이 살기를 바랐고 또한 참 험한 세상이었나 봅니다.
그런 곳에서 살았던 사람은 답답한 궁궐을 벗어나 새처럼 날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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