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산(景山:경산)공원

2011. 12. 14. 08:01중국 여행기/베이징(北京)

이제 자금성 뒤에 보이는 징산(景山 : 경산) 공원을 오르렵니다.

예전에는 아무나 가까이할 수 없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2원만 내면 누구나 오를 수 있습니다.

고궁의 북문인 신무문을 2시경에 나섭니다.

 

바로 건너편에 108m의 야트막한 언덕 같은 산이 하나 있습니다.

산이라 부르기에는 98% 부족하지만, 베이징이라는 곳은 평야이기에 이 정도의 높이라면

주변 어디에서나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징산공원입니다.

신무문을 나서 길을 건너면 징산의 정문인 북상문이 나타납니다.

 

징산공원은 자금성의 어화원과 더불어 황제가 주로 찾던 휴식공간인 셈입니다.

중국의 황제 중 누구나 다 휴식을 위해 찾지는 않았죠?

명나라의 숭정제는 목을 매기 위해 올랐던 곳이기도 합니다.

에고에고 이게 무슨 일입니까?

황제만 올라 즐기려고 만든 공원에서 목을 매다니요.

 

여기에 올라보면 높지는 않지만, 워낙 베이징이라는 곳이 평지에 건설된 도시라 전망이 좋습니다.

어디 전망만 좋았겠습니까?

이곳에 올라 굽어보면 세상이 모두 발아래 있으니 간이 배 밖으로 나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천하를 내 발아래~"

그래서 황제는 수시로 이곳에 올라 자기만족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황실의 공원이라 당연히 일반인은 오르지 못했겠지요.

 

자금성을 에워싼 해자입니다.

궁궐 문을 나서면 이렇게 해자로 둘러싸고 있지요.

이렇게 물로 둘러싸고 자금성의 바닥은 벽돌로 차곡차곡 쌓아 어느 사람도 땅굴 파고들어 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왜?

황제의 목숨은 소중하니까!

 

신무문을 나와 뒤돌아 봅니다.

자금성이 아니라 고궁박물원이라네요.

세월이 하늘의 아들이 살았던 집을 이렇게 우습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에고에고 불쌍하다.

하늘의 아들이라는 황제여~

문패마저 빼앗기고 개털 신세 되었구나. 

 

징산은 바로 자금성 서쪽에 있는 베이하이(北海 : 북해)를 만들기 위해 흙을 파내다 보니 마땅히 버릴 곳이 없어

이곳에 쌓아놓고 인공으로 조경도 한 인공산이라 하는군요.

몽골족의 원나라는 이곳을 칭샨(靑山 : 청산)이라고 불렀답니다.

처음에는 그냥 흙을 쌓아놓았지만, 명나라 주원장이 원을 멸망시키고 이곳에 천도한 후에 한족이

오랑캐라 불렀던 이전 왕조의 기를 누르기 위해 나중에 더욱 높여 만든 인공산입니다.

 

명대에  만든 북경성은 원대의 다두(大都) 성보다 약간 남쪽에 터를 잡았다 합니다.

이 때문에 다두성의 후궁인 연춘각은 자금성의 북쪽 성벽에 놓이게 되었다 하네요.

명대 북경성의 설계자는 이점을 이용해 새로운 북경성 주변에 만든 해자인 호성하를 팔 때 나온 흙을

연춘각 자리에 쌓아 인공산을 만들게 했습니다.

이렇게 원의 힘을 흙으로 쌓아 누르려고 했네요.

 

그리고 일설에 의하면 그 산에다가 황도가 포위될 경우를 대비해 비상연료용 석탄을 쌓았다 하는군요.

청산이 이때부터 석탄을 일컫는 메이산(煤山 : 매산)이라는 아름답지 못한 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하네요.

오늘 포크레인을 불러다 경산을 한 번 파볼까요?

쳰먼 지하철역에서 쳰먼따지에와 나란히 남쪽으로 난 도로 이름이 메이산루라 하여

아직 그와 관련된 이름이 남아있습니다.

 

청나라 건륭 연간에는 이곳에 있는 다섯 개의 봉우리 위에 각각 새 정자를 세우고 동쪽에서부터 관묘, 주상, 만춘,

부람, 집방이라고 이름 하고는 각 정자 안에다 동으로 만든 불상을 안치했다고 합니다.

이 다섯 개의 불상이 의미하는 것은 신맛, 단맛, 쓴맛, 매운맛, 짠맛을 의미했다 하네요.

이 다섯 가지 맛을 우리는 인생의 맛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먼저 왕조의 기를 누르기 위해 청나라 황제들은 수시로 이곳에 올라 기를 밟는다고 산책을 즐겼다 합니다.

지금은 일반에게 공개하였으니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올라 자근자근 밟아버리니 이제 과거의 왕조는

다시 기를 펴는 꿈도 꿀 수 없게 되었네요.

우리 같은 외국인도 올라 밟아줍니다.

 

그 산 위에는 다섯 개의 정자가 있는데 완춘팅(萬春亭 : 만춘정)을 제외하고는 모두 의화단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곳으로 진격한 8국 연합국에 의해 불타버렸답니다.

저녁 석양이 물들면 이곳 완춘팅에 올라 황금색으로 지붕을 덮은 자금성을 바라보는 일도 멋진 풍경이

될 것고 아마도 이곳이 중국 북경에서 바라보는 최고의 풍경이 아닐까요?

 

그러나 그런 감상적인 것보다는 아픈 역사의 현장이기에 더 많은 사람이 찾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산의 동쪽에는 명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가 이자성이 농민군을 이끌고 궁내로 진입하자 다급하게 피해

이 산에 올라 자결을 한 곳으로도 유명하지요.

중국 황제 중 유일하게 자결을 한 황제로 기록되어 있을 겁니다.

 

오늘 이곳에 올라왔는데 그때 이야기나 한번 들어볼까요?

황제란 하늘을 대신해 하늘의 뜻을 여린 백성에 펴는 사람입니다.

과연 무소불위의 힘을 지녔다는 황제가 행복하기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객의 침입을 두려워하여 자금성 전조에는 나무 한 그루 없습니다.

황제와 함께 생활했던 많은 후궁들...

한번 발을 들이면 죽어서야만 궁궐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민초와는 다르게 먹는 것과 입고 자는 것은 호사를 누리며 살았겠지만,

과연 그녀들의 삶이 행복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섬서성 사람인 이자성...

그는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가렴주구로 모든 재산을 잃고 화딱지가 나 농민반란이 일어나자 처음에는

반란군에 들어가 가담합니다.

얼마나 속으로 열불이 났으면 부농의 집안에 태어나 농민군에 가담했을까요?

이거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겁니다.

 

이자성은 그가 모시던 농민군 대장이 관군에 살해당하자 다른 사람의 추대를 받아 농민군을 이끌게 됩니다.

가방끈이 길어 워낙 배운 놈이라 뭐가 달라도 달랐기에 대장으로 추대되지 아무나 되는 게 아니지요.

 

허베이성 양양을 함락하고 그곳에 나라를 세우고 40만 대군을 이끌고 북경으로 진군합니다.

당시 북경은 북쪽 만주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병력 대부분을 산해관 중심으로 이동하였기에

북경은 사실 비어 있는 도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1644년 섬서성을 출발한 이자성은 바로 태원을 함락합니다.

사람에게는 이렇게 타이밍이 맞아야 도모한 일이 성공에 더 가깝고 쉽게 갈 수 있습니다.

 

이제 북경으로 진격하자 명나라 조정은 동복방에서 남침을 대비해 주둔한 군을 비밀리에

북경으로 회군 조치를 합니다.

그 이유는 호시탐탐 남침을 노리던 만주족에게 빌미를 주지 않게 하기 위함이겠지요.

그러니 북쪽의 만주족만 신경 쓰다가 뒤통수를 맞은 꼴입니다.

 

그러나 이자성이 한 발 빨리 북경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이미 돌아선 민심으로 이자성의 군은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쓰나미와 같은 속도로 밀고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 튼튼하다는 팔달령 장성마저 자동문처럼 그냥 열립니다.

민심의 배반이라 함은 이미 천운이 다 되었다는 말이잖아요.

황제는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고 했습니다.

평소에는 물이 배를 안전하게 띄워 가라앉지 않지만, 물이 소용돌이치면 배는 뒤집히고 마는 게 세상일이잖아요.

 

이자성의 군대가 성 안으로 밀어닥치자 다급한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는 종을 울려 백관과 환관을

소집했으나 웃기는 종소리가 되고 맙니다.

평소에 성은이 망극 어쩌고저쩌고... 했던 신하는 모두 제 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고

자식도 없는 환관들마저 반려동물이라는 강아지까지 데리고 도망을 갔지만,

황제라고 보살피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인심이 그렇지요.

광에서 인심 난다고 먹을 게 없는 곳에는 상갓집 개도 얼씬거리지 않습니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황제는 위급한 경우에는 환관의 강아지보다도 못한 자신의 처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요.

황제란 이렇게 그 천운이 다하면 환관의 강아지보다도 못한 딱한 신세가 됩니다.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유일하게 따르던 환관 왕승은 한 명만 대동하고 궁을 빠져나와

궁의 북쪽에 있는 메이산에 오릅니다.

메이산이 바로 지금의 경산입니다.

딱하게도 궁 안에서만 지내던 황제는 아는 곳이 없기에 그래도 갈 곳이라고는 오직 이곳 한 곳뿐입니다.

 

그곳에 올라 궁성을 바라보니 이미 여기저기가 불길에 휩싸여 참담할 뿐입니다.

환장할 노릇입니다.

저게 원가가 얼마나 많이 들었는데 웬 개뼉다귀 같은 녀석이 욕까지 하며 씩씩대고 들어와 불까지 지른단 말입니까?

눈물이 앞을 가려 세상이 뿌옇게 보입니다.

젠장~ 자금이 많이 들어갔기에 이름도 자금성이라 지었건만...

하늘 한 번 바라보고 다시 황궁을 내려다보니 조금 전보다 불길은 더욱 거세집니다.

차라리 이게 꿈이라면 좋겠습니다.

헛것을 보고 있다고 외치고 싶습니다.

정말 그리하고 싶습니다.

 

황제란 곤룡포만 입고 있으면 저절로 모두가 말을 들을지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처지가 되고 나니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고 모두 제 살 길만 찾습니다.

황제란 주변에서 만들어 주는 것이지 혼자 힘으로 황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갑니다.

 

그는 다시 걸음을 돌려 궁으로 들어와 열다섯 살이 된 장락 공주를 불러 옷소매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오른손으로

칼을 뽑아 딸을 내리쳤으나 공주는 손으로 칼을 막아 오른팔이 잘리고 맙니다.

공주는 그대로 땅바닥에 뒹굴고 바닥은 선혈이 낭자해 더는 딸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뭐 그냥 내버려 둬도 과다출혈로 말미암아 쇼크사했을 겁니다.

나이 열다섯이라면 아직 꽃도 피지 못한 나이가 아니겠습니까?

줄을 잘 선 덕분에 황제의 딸로 태어나 장래가 보장되고 무지개 꿈을 꾸며 살다가

무지개가 정말 무지한 개가 되는 순간입니다. 

 

지나가는 무수리에게 이리 오라고 하자 무수리마저 황제에게 "웃기고 자빠졌네~"라고 욕을 합니다.

그 뒤에 있던 인턴 태감에게 "너 이리 오너라~" 하자, 그 녀석이 실실 웃으며

"자네가 이리 오겠냐?" 하지 않은 게 아닙니까?  

 

보세요.

세상이 변한다는 것을 알면 이렇게 돌변하는 게 민심입니다.

이제야 황제는 하늘이 아니... 민초가 자신을 버렸음을 깨닫게 됩니다.

민초가 버린 황제는 개털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아갑니다.

뭐~ 카다피도 민심이 돌아서니 하루아침에 하수구에서 비명횡사하더군요.

 

황제는 다시 황후와 석별의 정을 나누는 잔을 들어 술을 마신 뒤 자결을 권유하고

어린 딸 소인 공주와 비빈을 죽입니다.

그 경황에 술잔을 나누었다...

사실 그 당시의 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소설을 쓰는 셈이지요.

자결을 권유했는지도 사실 모릅니다.

다 죽고 만 사람에게 누가 당시의 상황을 남겨놓았겠어요?

황후는 농민군에 황후가 능욕을 당할 수 있다는 황제의 권유에 따라 곤녕궁에서 목을 매 자결합니다.

 

그 후

 어두운 밤을 이용해 다시 메이산에 올라 불타는 성을 바라보며 긴 소맷자락에 유지를 남겼답니다.

그 난리 속에 이렇게 산책하듯 여유롭게 올랐다 내려와 술 한 잔 마시고 다시 올라가도 되는 겁니까?
이미 황궁 안은 이자성의 반란군이 들이닥쳐 모조리 학살을 자행하는 긴박한 상황에 말입니다.

 

"오호라 애재라~ 짐은 나약하고 덕망이 부족해 하늘의 노여움을 샀도다.

에고에고 원통해라~ 도적 떼가 짐의 도성을 점령했건만 신하들은 모두 짐을 저버렸도다.

어찌할꼬 어찌할꼬~ 죽어서도 조상을 뵐 낯이 없어 스스로 면류관을 벗고 머리카락을 풀어헤쳐 얼굴을 가리노라.

도적들이 짐의 시신을 능욕할지언정 백성은 한 사람도 다치지 않게 하라"

 

죽어가는 마당에 자기 죄를 모르고 도적떼라고 하며 일말의 양심은 있어 백성은 다치지 말게 하라고 합니다.

그가 지칭한 도적떼가 바로 백성임을 알지 못하는 황제는 죽는 순간까지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는 머리카락을 풀어헤쳐 산발한 체 얼굴을 가리고 왕승은의 도움으로 위의 사진에 보이는 나무에

목을 매 자살합니다.

 

죽는 순간까지 황제는 혼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목을 매는 것까지 도움을 받습니다.

중국 황제 중 유일하게 목을 매 자살한 황제로 기록되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중국 황제의 죽음에 관한 기록에 새로운 기록이 수립되는 순간입니다.

중국의 황제들에 관한 자료를 살펴보면 죽은 사유를 보면 참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황제가 목을 맨 메이산은 지금은 경산공원이 되어 많은 시민이 찾아 즐기는 공원이 되었습니다,

숭정제가 목을 맨 나무에는 황제의 목숨을 앗아간 죄지은 나무라는 뜻으로 죄괴(罪槐)라는 글자가

새겨진 철판이 걸려 있었는데 의화단 사건 때 누가 훔쳐갔다고 합니다.

중국사람은 별걸 다 훔쳐갑니다.

 

그리고 그게 왜 나무의 잘못입니까?

오늘도 나무는 그냥 그 자리에 푸르게 서 있을 뿐인데 인간이 나무에 못된 굴레를 씌웠습니다.

나무는 그냥 나무입니다.

나무가 역사의 뒤안길에서 너무 힘겨워하는 듯 보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이 나무 아래 모여서 그 나무를 바라봅니다.

 

나무 역시 문화 대혁명 때 타파되어야 할 네 가지 구습(봉건사회의 구사상, 구문화, 구풍습, 구습관)으로 지목되어

절단되었는데, 지금 그 자리에는 그 당시 절단된 나무를 수습하여 다시 심은 것이라 합니다.

사라졌던 나무를 다시 환생시키는 중국인의 기술은 화타를 능가하는 나무 의사가 있었나 봅니다.

 

그러나 나무 하나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역사의 급류가 강한 듯합니다.

어찌 가냘픈 나무에 인간은 그런 역사의 굴레를 안긴단 말입니까?

오늘도 황제의 슬픈 사연을 안고 나무는 아무 말 없이 서 있을 뿐입니다.

 

우리 부부가 걸었던 길입니다.

자금성 북문을 나와 길을 건너 경산에 올랐다가 서문을 통하여 나갔습니다.

그곳에서 북쪽으로 걸어 후통이라는 골목을 지나 고루로 향했습니다.

물론 튼튼한 두 다리로만 말입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말을 타고 천하를 얻을 수 있지만,

말 등을 타고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이자성은 말을 몰아 황궁을 접수했지만, 이자성의 운은 거기까지입니다.

황궁으로 몰아닥쳐 불을 지를 때는 천하를 얻었다고 생각해 황제 자리에 올랐지만,

역시 황제라는 자리는 말만 잘 탄다고 되는 게 아닌가 봅니다.

우리 부부도 나중을 위해 이번 여행길에 몽골에 들러 말 타는 연습이나 해 둘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