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청궁에서 오래 버틴다는 일

2011. 12. 8. 00:05중국 여행기/베이징(北京)

사자 새끼가 발가락 사이에 있는 엄마 젖을 빠느라 자빠져서 무아지경입니다.

쳰징먼(乾淸門 : 건청문)은 이곳부터 안채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그러니 외조와 내정의 구분이 되는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이곳부터는 자금성의 은밀한 사생활이 존중받는 곳이지요.

 

과거 청나라 때는 황제가 이곳에 옥좌를 설치하고 신하들의 주청을 듣거나 정무를 처결하였기에

이를 어문청정이라 했다나요?

그래서 이문의 서쪽에는 황제의 명을 전달하는 비서실 격인 군기처를 비롯하여 중요 결책기구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황제가 문무대신으로부터 아침인사를 받고 신하가 주청을 하면 조서를 내리기도 한 곳이라네요.

 

앞에는 사자상이 있고 큰 물 항아리가 아직 있습니다.

그 항아리는 금으로 도금한 것인데 이자성의 난 때 이곳을 농락한 농민군이 대부분 벗겨갔다고 합니다.

뭐 항아리만 벗겨갔겠어요?

궁 안에 있는 값나가는 것 죄다 훑어갔을 겝니다.

 

건청궁은 황제의 집무실 겸 침실인 셈입니다.

그러니 주로 황제가 가장 오랜 시간 머물렸던 곳이겠네요.

내정으로 분류하지만, 사실 황제가 가장 오래 머물며 정사를 돌본 곳이니까 외조라 해도 무방하지 않겠어요?

건청문 앞에도 청동 사자상이 한 쌍이 있습니다.

그러나 태화문의 사자상과는 무언가 달라 보이지 않습니까?

 

귀를 자세히 보세요.

그렇군요?

태화문 앞에 있는 사자상과는 달리 귀가 아래로 축 처져 있습니다.

기운이 없어 그랬을까요?

그 이유에 대하여는 설이 분분합니다.

어느 사람은 이곳에서 들은 이야기는 무조건 함구하라는 의미라 합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황제의 처소이기에 조용히 하라는 말입니다.

이곳에서의 이야기는 공식적인 발표 외에는 모두 못 들은 것으로 하라는 의미이기도 하고요.

터키의 오스만 제국 시절 오스만의 지도자 칼리프가 머무는 곳이나 회의가 있었던 곳에는 경비병까지 믿지 못해

모두 고막을 터뜨려 귀머거리로 만들어 놓고 그것도 모자라 회의하거나 지시를 내리는 동안 수도꼭지를 틀어놓아

흐르는 물소리로 말미암아 주변에서 누구도 이야기를 듣지 못하도록 조치를 했다 합니다.  

 

건청문을 통과해 건청궁으로 갑니다.

저도 이곳에서 들은 이야기는 함구하렵니다.

고막 터뜨린다고 따라오면 어찌한답니까?

여러분도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했지요?

 

재미있는 일은 건청궁 내부에 걸린 편액입니다.

황제는 후계자의 이름을 적어 숨겨놓은 밀지를 넣어두었던 正大光明이라는 편액 아래에서 집무를 하였답니다.

이 글은 순치제의 친필이라 하네요.

한자가 이렇게 쉬우면 佳人도 모두 읽을 텐데...

순치제의 글솜씨가 영 수준에 미치지 못합니다.

이 정도의 글씨는 한석봉의 엄니가 밤에 불을 끄고 떡을 썰다가 떡가래를 들고 써도

이 정도는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황제의 침실과 일반 집무실로 나뉘어 있어 전면이 9칸이고 측면이 5칸으로 정 가운데 황제가 앉는 옥좌가 있어

금박을 하고 루비와 에메랄드로 상감처리했으며 팔걸이와 등받이는 모두 금룡으로 휘감아 놓았습니다.

그 뒤로는 순치제가 쓴 "正大光明"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아래 사진을 보시면 가운데 집무실에서 좌우로 이런 문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 문으로 들어가면 황제가 잠을 자던 침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佳人도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거실에서 컴퓨터로 글을 쓰다 그냥 방으로 들어가 자니 말입니다.

 

옹정제 이후로는 이 편액 뒤에 다음 보위를 계승할 후임 황제의 이름을 적어 보관해 두었다고 하네요.

황제가 사망하면 모든 대신이 모인 자리에서 편액 뒤에 보관한 서류를 보고 다음 황제를 선포했다고 합니다.

이런 방법을 태자 밀건법이라고 합니다.

이 방법은 그럴만한 내력이 있답니다.

 

이민족으로 중원에 들어와 한족을 통치했던 만주족은 역대 왕조보다

대체로 후임 황제를 선택하는 일에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됩니다.

그 이유는 한족의 왕족은 주로 장자 상속을 채택한 반면에 만주족은 태자를 미리 정하지 않고 왕자들을 관찰하다가

이들 가운데 가장 능력이 있는 사람을 황제로 옹립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300년이라는 세월 동안 중원을 다스렸지요.

중국에서 300년이라면 상당히 긴 세월 동안 나와바리를 관리했다는 말이 아니겠어요?

신라는 천 년의 제국으로 역사상 흔치 않은 기록이지요.

 

그래서인가요?

청 왕조의 황제 열두 명 가운데 장자로 황제의 보위에 오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하네요.

정복 민족으로 제법 오랜 기간 한족의 중원을 통치하며 강력한 국가를 유지한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비록 말기에 접어들며 서태후라는 여인으로 국정이 농단되고 황제를 임의대로 올리고 내렸지만...

 

그러나 작은 문제는 있었습니다.

강희제라는 황제가 있었을 때 그의 재위 기간이 중국 역사상 가장 긴 61년간이나 되었습니다.

강희제는 또한 변강쇠를 능가하는 힘으로 황후와 많은 후비들로 하여금 35명의 아들과 20명의 공주를 생산했습니다.

완전히 대규모 후손 생산 공장 수준입니다.

이게 중국이 자랑하는 인해전술을 펼 수 있는 힘이 아니겠습니까?

정말 황제로서는 기록적인 생산능력이지요.

이게 무슨 인간 공장도 아니고 중국제가 이렇게 성능이 좋다니...

아! 중국산이 아니고 만주산이었군요?

모두 황제 앞에 세워 놓고 이름이나 제대로 알 수 있을까요?

 

아비가 이렇게 오래 살면 자식으로는 복 받은 집안이지만. 천하를 이을 후계자는 전혀 기쁜 일이 아닙니다.

61년간 재위에 있었으니 기다리던 태자는 숨 넘어갑니다.

죽을 맛이지요.

그렇다고 쉽게 포기하고 안 한다고 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니겠어요?

이제나 저제나 보위에 오를 날만 기다린다는 의미는 애비가 빨리 죽기를 기다린다는

불효 막심한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자금성에서 오래도록 살아간다는 일은 여러 사람에게 짐을 지우고 힘들게 하는 일입니다.

 

태자들의 문제만 아닙니다.

강희제로서도 많은 아들 때문에 골치가 아프죠.

자기가 생산한 제품에 고민해야 하는 게 황제의 고민입니다.

불량품이라도 있으면 일찍 검수과정에서 폐기 처분되지만, 재활용이 가능하거나 순정품은 곤란합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아들로 하여금 골머리를 앓게 됩니다.

제일 처음 황후의 소생을 황태자로 책봉했습니다.

하지만, 황태자의 외삼촌이 사건으로 체포되고 그 일당 모두가 축출되는 사건이 생깁니다.

삼촌이란 자가 앞길을 막아버린 평생에 도움도 되지 못한 작자입니다.

 

강희제는 즉시 황태자를 폐위하고 넷째 아들로 하여금 그를 가두고 감시하도록 합니다.

사태가 이렇게 흐르자 나머지 왕자들 사이에 암투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점차 심각한 상황에 이르자 이에 놀란 강희제는 큰아들에게 가한 형벌이 가혹했다고 발표하고 복위시켜버립니다.

 

그러자 또 황태자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돌자 그를 다시 유폐시켜버립니다.

이랬다 저랬다 이게 뭡니까?

황제는 검은 고양이 네로입니까?

맞는군요 네로는 로마의 황제였으니 말입니다.

그 후 10년간 어느 사람도 후계자에 대한 언급을 못하게 하고 황태자를 공석으로 두었습니다.

이제는 언로가 막히자 왕자들 사이에 파벌이 생기고 더욱 혼란해집니다.

 

강희제가 임종하기 며칠 전,

강희제는 원명원에 머물게 되었고 일곱 아들과 원명원의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보군통령인 융과다만 불러

넷째 아들을 후계자로 선포합니다.

 

여기서 의문은 융과다는 넷째 아들의 손위 처남이라는 점입니다.

아무튼 황제가 죽자 융과다는 황제의 시신을 거두어 가마에 싣고 자금성으로 들어와 모든 궁의 문을 닫고

다른 왕자의 궁궐 출입을 금지합니다.

이게 바로 권력을 잡는 최선의 방법이지요.

 

진시황 영정이 죽자 조고와 이사는 시신을 온량거에 싣고 황제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않고

그 먼길을 달려 아방궁으로 돌아왔잖아요.

황제란 죽은 시신일지라도 시신을 먼저 챙긴 사람이 힘을 쓴다는 말이 아닐까요?

썩은 냄새가 진동하더라도 황제의 시신은 이렇게 중요한가 보네요.

 

그리고 드디어 넷째 아들은 중년을 훌쩍 넘긴 44살에 황제의 자리에 오르니 그가 바로 옹정제입니다.    

이렇게 옹정제의 즉위에 얽힌 내용이 비밀스럽게만 진행되다 보니까 많은 소문이 생기겠지요.

 

가장 그럴듯한 이야기는 원래 강희제가 지명한 후계자는 열넷째였다 합니다.

그런데 넷째는 편액 뒤에 숨겨진 아버지의 유언을 훔쳐 십사(十四)라는 글자에서 十의 획을 고쳐 于四라고 만들어

넷째 아들이라는 뜻으로 바꿨다고 합니다.

바꾸는 모습을 제가 직접 보지 못했으니 단정은 하지 못합니다.

 

뭐 괜찮습니다.

백성을 편안하게 하면 되지 않겠어요?

중국인에게 가장 존경받는 한나라의 무제 유철도 사실은 아홉 번째 아들이었으나 태자로 이미 정해진

넘버 1을 하루아침에 보내 버리고 겨우 7살에 태자의 자리에 올라 16살에 황제가 되었지만,

가장 존경받는 황제가 되었잖아요.

 

유철의 친모도 사실 궁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시집을 가 딸까지 낳고 살던 보통 여자였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남편과 딸을 나 몰라라 팽개치고 유부녀가 처녀 입네 하고 황궁으로 들어와 후궁의 자리까지 올라

나중에 동생까지 궁으로 불러들여 두 자매가 당시 황제였던 경제를 낮보다는 밤에 더 성심성의껏 모셔서

결국, 효경 황후까지 되었잖아요.

원래 어느 왕조나 어머니가 일찍 죽거나 힘을 잃어버리면 외가도 몰락하고 왕위 싸움에 뒤처져 탈락하고 말지요.

자고로 어느 나라나 황제에 오르는 힘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의 힘입니다.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만 외치지 마세요.

정말 권력의 핵심은 엄마에게 있습니다.

엄마가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황제라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는 "엄마! 힘내세요~ 우리가 있어요~"라고 바꾸어 부르세요.  

 

사실 말이 그렇지 그걸 누가 증명할 사람도 없고 한번 보위에 오르면 끝난 일이지 않겠어요?

그래서 그랬나요?

옹정제는 재위 기간 새벽 4시에 일어나 7시까지 역사서를 읽고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오후 내내 조정회의를

했으며 종종 자정을 넘겨서도 서류를 읽었다 합니다.

몸으로 때우면 과거는 잊힌다는 생각인가요?

머리 나쁘면 이렇게라도 몸으로 때우고 버텨야 합니다.

그런데 머리도 나쁜 佳人은 공부도 하지 않고 몸으로 때우지도 않으니 무슨 배짱인지 모르겠어요.

세상의 불가사의입니다.

 

후계자가 되기 위한 암투가 빈번하였기에 황제는 후계자를 미리 정하고 그 뒤에 숨기고 다른 하나는 늘 몸에

지니고 있다가 훗날 황제가 서거하면 두 쪽지를 대조한 후 확인되면 새로운 황제를 반포했다 합니다.

이런 방법을 밀건법이라 했다네요.

저도 우리 집 사진틀 뒤에 차기 가장을 적어 넣을까요?

서로 안 한다 할 겁니다.

그 뒤에는 비상금 봉투만 들어 있습니다. 

 

이는 왕자들 간의 선의의 경쟁을 하게 하여 다툼을 방지하고 실력을 향상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하네요.

만주족은 한족과는 달리 장자 세습이 아니고 능력위주로 후계자를 선발했습니다. 

물론 능력 있는 왕자가 나라를 잇는 좋은 방법이지만, 오히려 비슷할 경우 왕자 간의 줄 세우기가 성행하고

골육상쟁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요.

 

그러나 재미있는 일은 밀건법이 시행된 후 이 법이 별로 쓸데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옹정제 이후 청나라의 전성기는 지나가게 되고 이후의 황제들은 아들을 하나만 두거나 후사조차 없어

이름을 적어 넣을 사내조차 없다는 말입니다.

환장할 노릇이지요.

도대체 무슨 음식을 먹었기에 변변한 후사조차 없다는 말입니까?

청나라 대장금도 빠떼루 받아야 하겠네요.

 

원단이나 단오 같은 명절에는 황실 가족을 위한 연회가 이곳에서 열렸고

외국 사신 접견도 이곳에서 했다네요.

1785년 건륭제 때 이곳에서 열린 천수연이라는 노인을 위한 잔치가 열렸는데 이 잔치에 초대되어 온 노인의

숫자가 전국적으로 3천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혹시 나이 많은 노인들이 이곳으로 오느라 고생 하지나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주 열렸던 것은 아니고 역사상 단 두 번만 열렸다 하네요.

이것도 전시행정이었나요?

황제의 침전이자 집무실이며 황제가 죽으면 장례식까지 시신을 건청궁에 안치했다 합니다.

그러니 건청궁에서 원샷으로 황제의 모든 게 진행되었다는 말이 되겠네요.

 

옹건제 이전까지 황제는 주로 이곳에서 잠을 잤으며 황제는 암살 방지를 위해 27개의 침실을 만들고

매일 밤 바꾸어가며 잤다고 합니다.

이거 매일 스케줄 짜던 환관은 머리 골치가 아팠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옹건제 이후에는 뒤에 있는 비밀 침실인 양심전으로 침소를 옮겼기에 이곳에서는 잠을 자지 않았다 합니다.

불안에 떨며 매일 밤잠을 청한 황제보다 아무 곳에서나 두 발 쭉 뻗고 잠을 자는 佳人이 더 행복하다는 사실...

내일은 건청궁 뒤에 있는 교태전과 곤녕궁으로 가보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황제는 무엇이 두려워 궁 내부에 나무조차 심지 못하게 하고 침대를 27개나 만들어

머리 골치 아프게 자기도 오늘 밤 어디서 자는지 모르게 잠을 잤습니까?

잠자리가 뒤숭숭하지 않았을까요?

반지의 제왕은 들어보았지만, 침대의 제왕은 금시초문입니다.

그래도 만약을 위해 황제는 도망갈 마지막 비상구는 마련해 놓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