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2. 13. 08:22ㆍ중국 여행기/베이징(北京)
해외여행을 하며 자유 배낭여행이라는 독립군으로 뛴다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지 모릅니다.
풍경이야 그냥 바라보면 되지만, 역사가 있는 곳에서 그냥 우두커니 바라본다는 일은 서럽습니다.
게다가 말도 통하지 않아 물어볼 사람도 없고...
그야말로 허허벌판 눈 내리고 삭풍이 몰아치는 광야에 홀로 서 있는 기분입니다.
그게 다 사서 하는 고생이라고요?
중국의 중심이라는 베이징의 한가운데 황제가 거주했던 황궁이 있고
베이징은 황궁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계획도시입니다.
우리에게는 쯔진청(紫禁城 : 자금성)이라고 알려진 꾸궁(故宮 : 고궁)이라고 부르는 황궁이 그곳에 있습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고 한때 아시아를 모두 호령했던 중국 정치의 1번지...
아마도 현존하는 세계 최대의 궁전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자금성의 자(紫)와 금(禁)의 두 글자에는 모두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원래 동양의 국가는 이런 이름을 지을 때 인디언이 이름 짓듯 "주먹 쥐고 일어나나 늑대와 함께 춤을"이라고
생각나는 대로 짓지는 않잖아요?
혹시 커다란 궁전을 짓는데 너무 많은 자금이 들어가 자금성이라 했나요?
자(紫)는 자미원(紫微垣)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하네요.
송사 천문지에는 이런 글이 기록되어 있답니다.
"자미원은 동쪽으로 여덟 개의 별이 늘어서 있고 서쪽으로는 일곱 개의 별이 늘어서 있다.
북두의 북쪽에서, 좌우로 둘러싸고 있으면서 서로 돕고 보호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또는 황제의 자리나 천자가 상주하는 곳을 일컫는다."
그러니 자미원은 그냥 하나의 별자리를 이르는 말이 아니라 북극성을 중심으로 큰 곰과 작은 곰, 용,
카시오페이아 등 15개의 별로 이루어진 별자리를 말한다 합니다.
북극성은 움직이지 않고 언제나 함께 하기에 아마도 천자와 같은 개념으로 생각한 모양입니다.
원래 좋은 것은 모두 황제의 몫이죠.
이 별이 바로 자(紫)색을 띠었기에 자색은 바로 황제의 색이고 황제가 사는 곳이 바로 자미궁(紫微宮)이라 불렀고
황궁의 담장을 붉은빛이 감도는 자색으로 칠했다 합니다.
어때요?
그럴듯한 이야기입니까?
금(禁)이란 이름은 황제가 거처하는 곳이라 일반 백성은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지역이라
그리 사용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자금성이란 "황제가 사는 성역"이라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아무나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제한구역이라는 말이겠지요.
그러나 국공내전을 거치고 신해혁명의 혼란 속에 자금성 내부에 있던 많은 유물은 타이완으로 옮겨져 있고
지금 이곳에는 존귀한 유물은 많지 않다고 하네요.
문화혁명 당시 자금성을 부패의 잔재라고 무식한 사람들이 부숴버려야 한다는 말도 나왔지만, 그리하면 쓰나요?
저우언라이의 노력 끝에 간신히 사라지는 슬픔만은 면했습니다.
자금성은 사실 지금은 꾸궁박물원(故宮博物院)이라는 이름으로 일부가 개방되었고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보호받고 있습니다.
황제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색은 바로 황금색입니다.
황색은 오행사상과 관련이 있고 천하의 중앙은 토(土)이며 색은 황색이지요.
그래서 황금색은 아무나 쓸 수 없는 색이며 황궁이나 황실과 관련된 건물의 지붕을 모두 황금색으로 칠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황색은 권위의 상징입니다.
사실 황색은 모든 사람이 사랑하는 귀중한 금의 색이기에 소중하게 생각하나 봅니다.
폼도 나고요.
자금성의 네 귀퉁이에는 각루(角樓)라고 부르는 누각이 각각 있습니다.
남북 길이가 960m이고 동서로는 750m라 하니 직사각형으로 만든 궁궐이군요.
이 안에 방의 숫자만 9.999개(실제로는 8.886개)라 하니 9라는 숫자는 황실을 의미하기에
실제보다 더 부풀린 듯하고 높이 9m의 성벽에 색깔 또한 위압감을 줍니다.
그 외각으로는 폭이 56m인 인공 해자를 만들어 그 이름이 통즈허(筒子河 : 통자하)라고 부른다는군요.
그러니 자금성으로 들어가려면 남쪽의 오문 외에 동서남북에 하나씩 있는 문을 통하여
들어갈 수밖에 없게 만들었네요.
1420년 명나라 영락제가 난징에서 물 좋다고 소문난 이곳 베이징으로 도읍을 옮기며 베이징이 수도가 됩니다.
그러나 이미 1267년 쿠빌라이 칸에 의해 이곳은 大都라는 이름으로 이미 원나라의 도읍이었지요.
중국에서는 새로운 나라가 도읍을 정할 때 먼저 전 왕조가 사용했던 황궁은 그대로 사용하지 않지요.
찝찝하기도 하지만, 망한 나라의 기운이 남아 있다는 생각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영락제가 자금성을 지을 때 먼저의 황궁을 완전히 파괴한 후 비슷한 위치에 다시 짓게 되었다네요.
그래도 그 터가 반 정도는 겹친다 하네요.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중국은 이제는 인민에 의한 정부라는 이름으로 공산당을 위한 정부를 만들게 됩니다.
황제라는 전제군주제가 끝장난 게지요.
그러니 황제의 상징인 자금성을 어찌해야 합니까?
세상이 개벽하면 원래 먼저의 권위니 위엄이니 하는 것은 개털이 됩니다.
처음에는 폐위된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 푸이가 자금성에 머물 수 있었답니다.
하지만, 1924년 황제복위 운동이 있었고 실패로 돌아가자 푸이는 톈진의 일본 영사관으로 몸을 피하는 일이
터졌으며 논쟁 끝에 프랑스 루브르 궁전을 박물관으로 개조한 예를 따르기로 했답니다.
헐어버리기도 아깝거니와 헐려고 해도 돈도 많이 들어가는 건물이 아니겠어요?
이게 이렇게 놔두면 하루 수입이 얼마인데 말입니다.
외국인은 깍아주지도 않고 다 받습니다.
드디어 1925년 10월 10일 자금성은 고궁박물관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며 금단의 지역에서 일반에 개방되게
되며 또 한 번 자금성은 시련을 겪게 됩니다.
바로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겁니다.
이미 자금성은 마오쩌둥에 의해 구시대 유물로 간주하였잖아요.
그러니 부숴야 한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나오는 겁니다.
다행스럽게도 저우언라이에 의해 철거계획은 백지화되며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니
무너진 황권이 가져온 파란만장한 삶이었나 보네요.
자금성에 대해 오래도록 이야기했네요.
정말 지루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로 도배했습니다.
너무 넓어 어디를 다녀온지도 모르겠고 어디를 중복해 보았는지도 모르겠네요.
때로는 닫힌 문만 바라보고 돌아서기도 했습니다.
내일부터는 자금성 밖으로 나가 돌아다니며 본 이야기를 하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영원한 것은 없나 봅니다.
한때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고 영원불멸의 권력으로 세상을 호령했지만, 지금은 그냥 시민의 놀이터에 불과합니다.
영원불멸로 보였던 카다피도 하수구에 머리를 처박고 생을 마쳤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세상을 호령하는 어느 권력도 영원하지 않을 겁니다.
또 다른 세상이 나타나면 그 주인공의 자리를 물려주게 되겠지요.
이게 세상의 섭리가 아닌가 생각되네요.
가울이 무르익어가는 10월의 어느 날 자금성을 돌아보고 혼자 생각만 하고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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