쳰먼(前門 : 전문)에서 부터 걸어 올라갑니다.

2011. 11. 22. 08:06중국 여행기/베이징(北京)

 

도성 건축의 원리를 알았으니 오늘부터 하나씩 돌아다니며 찾아보고 기웃거려 보렵니다.

오늘의 일정을 쯔진청이라는 자금성(紫禁城)부터 시작하렵니다.

그러나 자금성으로 바로 들어가기 전에 그 앞에 모습부터 먼저 살펴보며 천천히

두리번거리며 북으로 올라가 자금성을 보렵니다.

 

지금의 천안문 광장은 중국의 심장입니다.

과거에는 황제의 거처인 자금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광장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천안문으로 들어가기에는 원래 우리가 쳰먼(前門 : 전문)이라 부르는

정양먼(正陽門 : 정양문)이 베이징 내성의 정문이었다는군요.

 

 

그러니 황성의 9개의 문 중 남문으로 일반인은 드나들지 못하고 황제만 드나들었던

문으로 황제란 사람은 평생 몇 번이나 드나든다고 이런 비효율적인

전용문을 만들어 놓았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이 성문 밖은 일반 민초가 거주했고 안쪽은 관청을 포함한 황성의 중심으로

구분한 곳이 되겠는데 지금 우리 부부는 전문부터 천천히 걸어 들어가렵니다.

 

우리가 흔히 남대문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 이름은 숭례문이듯 말입니다.

예전에는 황제만이 지나다닐 수 있기에 정양문을 첸먼(前門) 또는 궈먼(國門)이라고 하고

높이가 무려 42m로 전문의 주변이 모두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지금은 성곽은

모두 헐어버렸고 그나마 1906년에 겨우 성루만 복원되어 덩그러니 남아 있습니다.

세월 이기는 장사 없나 봅니다.

표도르도 나이가 드니 연신 얻어터지더군요.

 

 

전문의 바깥쪽으로는 졘러우(箭樓 : 전루)가 세워져 있으며 이 두 개의 성문은 거대한

성벽으로 이어져 있었다는데... 졘러우는 말 그대로 화살을 쏠 수 있는 수많은 구멍이 있는

중요한 군사시설이라고 하더군요.

그러고 보니 황궁을 향하여 공격하려는 적을 제일 남쪽에서 지키는 제1 방어선인

보루인 셈인니까 쉽게 말하면 화살받이인가요? 

지금은 쳰먼에서는 천안문광장을 조망할 수 있게 출입이 허용되지만,

졘러우는 아직 개방하지 않고 있네요.

그래도 어젯밤에는 졘러우 아래의 성문으로 들어갈 수 없게 닫아놓았으나

아침에는 드나들 수 있도록 열어놓았습니다. 

 

 

중국이라는 나라도 개발의 바람에는 당해낼 재주가 없나 보네요.

뭐 문화혁명 당시는 자금성도 모조리 부숴야 한다고 했다지요?

사실 당시에는 죽창 든 단순 무식한 무리가 한다면 할 수 있었던 시기가 아니겠어요?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힐 일이겠지만, 당시는 그게 최선이었다고 강변하겠지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식으로 이루어진 또라이 집단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겠지만,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런 단순 무식한 무리가

날뛰는 세상이 가끔 있기는 하더군요.

무식하면 용감하기에 이런 세상이 사실 가장 위험하고 무서운 세상입니다.

그렇다고 그런 세상을 피하며 살 수 없는 노릇인지라..

사상이란 부모, 형제도 어쩌지 못하느가 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런 이상한 주장을 펴는 사람은 뒤로는 반대로 하고 살았다는 점입니다.

 

 

전루를 지나 광장으로 들어가실 때는 오른쪽에 있는 지하철 입구로 들어가시면

천안문 광장으로 들어가실 수 있고 왼쪽으로 들어가시면 지하철역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이제부터 천천히 두리번거리며 심장 속으로 들어가 보렵니다.

정양문이야 말로 베이징이라는 도성으로 들어가는 정문입니다. 

 

 

정양문(正陽門)은 나중에 천안문을 통과하여 들어가면 볼 수 있는 단문과 오문의 영향을 받은

이름이 아닌가 생각되고 단문이란 황궁으로 들어오는 모든 이에게 端正하게 옷매무시를

고치는 곳이고 오문은 문의 모양이 "凹 "처럼 생겼기에 음의 기운이 강한 곳이라 이름을

가장 양이 강한 午라고 짓지 않았을까요?

그 두 곳을 합하면 正陽이 되니 말입니다.

여행이란 이렇게 혼자만의 생각으로 다닐 수 있어 좋습니다.

 

 

정양문을 통과해 북으로 올라가면 거대한 광장이 나타납니다.

바로 그 유명한 천안문 광장입니다.

이곳에 서면 여러분은 제일 먼저 무엇이 생각납니까?

중국인에게는 이곳이 세상의 배꼽이라는 옴파로스라 생각하지 않을까요?

이 광장이 중국의 근대사와 함께 한 곳일 겁니다.

기쁘고 슬픈 일이 모두 이곳에서 이루어졌잖아요.

 

중국 민족주의의 도화선이 된 5.4 운동과 문화혁명 때 홍위병 100만 명이

이곳에 모여 행진을 했더랬죠.

그리고 아직도 우리 눈에 잔상처럼 남아 있는 천안문 사건이 얼른 떠오를 겁니다.

(중국의 눈치를 보지 않는 나라는 천안문 광장 대학살 사건이라고 하겠지만...) 

 

 

황제가 있었을 때 모든 칙령을 이곳에서 반포했을 것이고,

하늘과 땅에 제사지낼 때 이곳을 통하여 드나들었을 것이고, 농사를 독려하기 위해

선농단을 갈 때도 여기를 출발했겠지요.

물론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곳도 바로 천안문 광장이 보이는 성루였을 겁니다.

그때 무척 떨리는 목소리로 신중국의 시작을 알리지 않았겠어요?

지금도 국가의 주요 행사를 하는 곳도 이 광장입니다.

이런 모습은 사회주의 국가일수록 크게 만들 겁니다.

 

 

정양문을 지나면 우선 앞에 보이는 건물 하나가 있습니다.

모 주석 기념당이라네요.

여권만 있으면 무료로 둘러볼 수 있다네요.

중국인에게는 영웅으로 존경받을지 몰라도 佳人에는 그리 유쾌한 느낌이 없어 그냥 지나치렵니다.

이른 아침인데 이곳을 들어가기 위해 늘어선 줄이 건물 뒤로 넘어가 끝이 보이지도 않습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늘 하던 방법대로 시신을 방부 처리하여 안치한 곳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영웅이란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하고 미라로 남아 천년만년을 버텨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한 일은 호찌민처럼 대부분 사후에 화장하여 전국에 골고루 뿌려달라고 했다는데

남아 있는 추종자들에 의해 유훈을 자기들 권력유지를 위해 시신마저 이용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중국사람들도 너무하는 것 아닙니까?

살아생전 인민을 위해 주야 불철 고생하며 애썼는데 죽어서도 쉬지 못하고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온 세상 사람 모두 만나라고 하니... 

죽은 영혼은 쉬지도 못하고 오늘도 찾아오는 수천수만 명의 사람을 일일이

접대하느라 환장할 것 같습니다.

시신은 이런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합니까?

사라져야 할 것은 사라져야지 이렇게 남겨 둔다는 일은 죄를 짓는 일이 아닌가요?

가을에 쓸쓸히 떨어지는 낙엽은 새봄에 피어날 새싹에 자리를 양보하기 위함이요.

강물이 조용히 흐르는 이유는 새로이 흘러올 강물에 길을 터주기 위함이 아닐까요?

 

 

인간의 육신이라 껍데기뿐입니다.

껍데기를 남겨 무엇을 하자는 짓인가 알 수 없네요.

이제 죽은 껍데기를 편하게 보내주는 게 어떨까 생각합니다.

죽은 시신에 화장까지 시켜 장난하는 나라는 세상에 사회주의 국가 외에는 없을 겁니다.

들어가려면 베트남처럼 카메라는 물론 작은 가방도 소지할 수 없고 위압적이라

예전 베트남에서 한번 보았기에 그냥 통과합니다.  

 

재미있는 일은 베트남에서는 얼마 전까지 시신 방부 기술이 없어 1년에 한 번씩

러시아로 보내 방부처리하고 예쁘게 화장한 후에 다시 돌아왔답니다.

그런데 러시아에서 뽀얀 화장을 자꾸 하다 보니 호찌민이 점차 러시아 사람으로 변해갔다 합니다.

살아서 분명히 베트남 사람이었는데 죽어서 러시아인이 되다니...

살아생전 호찌민이 죽어 호찌민스키가 되면 박제가 된 호찌민스키가 얼마나 속이 상하겠어요.

 

 

모 주석 기념당을 돌아 뒤로 가면 그다음에 보이는 오벨리스크처럼 생긴 탑이 보입니다.

이집트의 오벨리스크 좋은 것은 알아서...

 

인민 영웅 기념비라고 하네요.

네~ 영웅이란 언제나 칭송받는 존재이지요.

더군다나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운만 좋으면 작은 일을 했더라도

갑자기 국가적인 영웅이 되기도 하지요.

 

 

인민 영웅 기념비 기단 부근에 중국 근세에 일어났던 8가지 사건을 조각으로 새겨놓았는데

1840년 아편전쟁부터 1949년 중국 정부 수립까지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회주의 운동가의

넋을 기린 37.9m 높이의 오벨리스크가 우뚝 솟아 있습니다.

여기도 이집트의 특허인 오벨리스크가 유명한 것은 알아서 세워놓았나 봅니다.

 

 

오벨리스크에 새겨진 영웅들의 모습은 사실 이 시기가 중국인들이 가장 숨기고 싶은

치욕스러운 역사일 겁니다.

이런 치욕스러운 역사를 딛고 만든 지금의 중국이기에 중국인 대부분이 마오쩌둥을 사랑하는 가 봅니다.

역사란 원래 힘겨운 과정을 겪으며 만들어져야 더 값어치가 있나 보네요.

 

 

기념비에는 '인민의 영웅은 영원불멸하다.'라는 의미인 인민영웅영수불후(人民英雄永垂不朽)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물론 마오쩌둥의 글이라 하네요.

이런 마오의 글씨체가 한때는 유행한 적도 있었지요.

정말 인민을 사랑하는 나라인가 봅니다.

 

 

세상은 참 이상합니다.

이렇게 성공한 혁명의 전사는 영웅이 되지만, 실패한 영웅은 영웅이 아니고 반역자가 되잖아요.

그 뒤에는 역시 마오쩌둥이 초안을 잡고 저우언라이가 깨알같이 많은 작은 글씨를 적어

놓았는대 지금은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볼 수 없네요.

자세히 본다고 佳人의 여행기가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천안문 사건 이후로 학생들의 시위 때 이곳이 성지였기 때문일 겁니다.

이곳은 경비병이 지키고 서서 접근을 금지하는 장소입니다.

안에는 중국 특유의 빨간 수건을 목에 두른 학생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이 기념비는 1949년 9월에 개최된 중국 인민 정치협상회의에서 결의하여 만들었다

하는데 목적은 중국 인민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유, 무명

혁명 영웅들을 기리자는 의미겠지요.

1951년 각지에서 출품한 200여 개의 응모작 중 량쓰청(梁思成)이라는 사람의 작품을 중심으로

3가지 설계안이 두리뭉실 뭉쳐서 기념비 초안으로 확정되었다 하네요.

 

 

100톤이 넘는 거대한 석재를 칭다오에서 운반해 와 5년 동안 만든 기념비라 합니다.

비의 하단에는 8개의 거대한 부조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각기 아편전쟁, 금전의기, 무창의기, 5,4 운동,

오주운동, 남창의기, 항일 유격전쟁, 장강 도하 등 지난 100년간 중국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그들만의 위대한 혁명의 기록들이 새겨져 있답니다.

웃기는 일은 세계적으로 문명의 발상지라는 중국에서 겨우 최근 100년의 역사만 중요한 가 보네요.

이런 위대한 일에 모두 인민의 피를 요구했나 봅니다.

그냥 혼자가 구시렁거리며 돌아보았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다른 나라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고 현재 중국에서만 의미가 있는 일이겠지요.

만약 또 다른 세상이 온다면 이 또한 사라져 버릴 사상누각이 되지 않겠습니까?

역사란 이렇게 새로운 것이 세월이 흘러감에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게 되기도 하고

다시 주목을 받는 일이기도 하지요.

이런 게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일이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