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1. 26. 08:08ㆍ중국 여행기/베이징(北京)
24명의 황제가 일어나고 스러져간 곳이 이곳이었나요?
높은 담장, 붉은 담벼락 그리고 황금빛 지붕.
첫눈에 대단히 위압적이고 멋지군요?
이 모든 게 중국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색깔과 모습이지요.
만리장성을 쌓고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고 살아서 그랬나요?
세상을 혼자만의 생각으로 우물 안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생각하듯...
중국은 황궁만 담벼락이 높은 게 아니라 일반 가정집의 담장도 엄청 높습니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만리장성부터 마을마다 성으로 둘러 싸여 있고 집집이 높은 담장으로 막혀 있으니
담장의 문화인가 보네요.
중국에서 성(城)이란 단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성벽의 의미 말고도 마을을 의미하는 말이라 했나요?
어느 곳에 가니 개인 집도 성이라는 이름을 붙여놓았더군요.
담장이란 언뜻 보면 외부로부터 나를 지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세월이 흐르며 나를 가두는 역할을 하잖아요.
나와 당신을 가르는 게 바로 담장이 아닌가요?
그래서 이웃 나라와 세계와 담을 쌓고 살아가나요?
1421년부터 1911년까지 491년 동안 명, 청의 안방으로 세상의 중심이라 생각하며 지냈던 곳이 이곳이었나요?
의복이나 음식에서 변변한 것 하나 없이 오랑캐라고 비웃었던 주변의 이민족의 것을 받아들이지나 않았나요?
미워하며 비웃으며 배운다고 했습니까?
그들이 말하는 귤화위지(橘化爲枳)라는 말이 있지요.
모두 중원으로 넘어오면 탱자도 귤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이 자금성을 처음으로 기획한 황제가 명대의 영락제라고 하더군요.
영락제라면 주원장의 네째 아들로 2대 황제인 조카가 번왕으로 봉했던 삼촌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자 베이징인
이곳 연왕으로 군사를 일으켜 난징으로 들어가 환관들의 도움을 받아 조카인 건문제를 제거하고 3대 황제에 오른
인물로 난징보다는 어린 시절부터 살았던 베이징으로 도읍을 옮기는 게 순리였을 겁니다.
세상을 호령하던 힘을 주체하기 어려워 생각해낸 것이 원래 이런 일이겠지요.
금상첨화를 꿈꾸었던 모양입니다.
오랑캐가 만든 도시라고 부술 때는 언제고 슬그머니 다시 올라와 도성으로 삼는 것은 또 무슨 일입니까?
사실 영락제는 이미 1407년 일찍이 황제에 오르기 전부터 이곳에 살았으며 연왕으로 있었기에
남경보다는 이곳이 군사적으로나 전략적으로 더 중요한 곳이라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황제 자리를 빼앗자마자 바로 천도를 단행해버렸습니다.
이미 이곳의 지기(地氣)가 적어도 천 년은 더 넘게 간다는 것을 느꼈나 봅니다.
10만 명의 기술자와 100만 명을 동원한 14년간의 대역사로 세상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집 한 채 지었습니다.
중국이 자랑하는 게 인구잖아요.
100만 명을 동원하는 일은 중국으로는 관우가 조조가 내리는 술이 식기도 전에 화옹의 목을 베기보다 더 쉽습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한양의 인구가 겨우 10만여 명이었다고 합니다.
인구로 따지면 우리나라는 중국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번식력이 강한 민족이 한족인가요?
한족과의 전투에서 패한 치우를 조상으로 모시는 구이저우 성에 많이 사는 먀오(苗)족은
한족을 영원히 이길 수 없습니다.
밤이 행복해야 하는데 한족의 중국 정부는 소수민족 우대라고 해도 2명만 낳게 하니 애당초 글렀습니다.
비록, 지금은 고궁 박물원으로 문패를 바꿔 달고 유네스코의 지정까지 받아 원래의 의미가 퇴색해버렸지만....
자금성은 우선 업무시설과 내실로 크게 나눌 수 있다고 합니다.
업무시설은 외조라 하여 주로 국가적으로 행하는 행사나 의식을 행하던 곳으로 오문에서부터
보화전까지가 해당한다고 합니다.
내실 부분은 내정이라 부르며 황제가 정무를 처리하고 황제와 그에 따르는 식솔이 머무는 곳이겠지요.
이제 하나씩 들어가며 살펴보렵니다.
제일 가운데 남북으로 세로선이 있고 동쪽과 서쪽으로 또 하나씩의 선이 있어 셋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겁니다.
가운데의 세로선은 자금성의 중심선이며 베이징의 중심이고 나아가 중국의 중심선입니다.
아마도 중구에서는 그리니치의 경도선을 없애고 이 선을 세상의 중심선으로 하여
경도 0도로 삼고 싶지는 않으셨나 모르겠습니다.
남쪽의 천안문에서 들어가면 태화전으로 가는 길에 처음 만나는 것이 돤먼이라는 단문(端門)과
우먼이라는 오문(午門)이 있습니다.
단문을 단례문이라 하여 천안문과 오문 사이에 있습니다.
명, 청 양대에 의례를 행했던 곳으로 황제가 순유를 떠나거나 사냥, 제사 등과 같은 일을 할 때
안전을 기원했던 곳입니다.
또 이곳에 황제의 의장 용품을 보관한 장소이기도 한다는군요.
단문의 유래는 진나라의 진시황이 처음 만들었다 합니다.
이 문을 통과할 때는 문무백관은 물론 누구나 옷매무시를 고쳐 端正이 하라는 의미라 합니다.
오문을 방어에 적합한 凹 형태로 만들다 보니 음의 기운이 강한 곳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양의 기운이 강한 午로 지었고 두 곳을 합하면 正陽이 되니 천안문 앞에
정양문(前門)을 두게 되었을 겁니다.
우리가 역사드라마를 보다 보면 자주 듣게 되는 말이 종묘사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곳에도 태묘라고 부르는 종묘와 사직단이 있습니다.
천안문 광장을 지나 천안문 안으로 들어가면 단문이 있고 그 문을 지나 왼편인 서쪽으로는 중산공원이 있습니다.
공원으로 들어가는 남문에는 3칸 4주 3루의 큰 패방을 볼 수 있습니다.
중산공원 자리는 원래 명, 청 시대에는 황제가 토지신과 오곡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황실의 사당이 있던 곳입니다.
중앙에는 사직단이라는 제단이 있고 그 위에는 전국을 상징하는 다섯 가지 색깔의 흙이 뿌려져 있답니다.
이는 '하늘 아래 모든 땅은 천자의 것이다.'라는 오만한 생각으로 흑, 백, 황, 홍, 청색으로 의미는
각각 동서남북과 중원을 의미하며 이는 바로 세상 모두가 천자의 땅이라는 말이 되겠군요.
울랄라? 세상에 육지는 모두 중국의 땅이군요?
그러나 신중국이 탄생하며 동남아시아 앞바다가 남중국해라고 부르며 모두 중국의 바다라고 핏대를 올리지요.
사직단 뒤편에는 배전(拜殿)이라는 전각이 하나 있는데 이 건물의 용도는 비가 올 때 제사를 지내거나
황제가 제사를 지내기 전에 잠시 쉬는 장소로 이용되었답니다.
그런데 중산 손문이 베이징에서 1925년 사망하자 그의 시신을 잠시 안치한 이유로 중산당이라고 이름이 바뀌고
공원의 이름 또한 중산공원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멈! 이로써 사직은 절단나 버렸네요.
그러니 죽은 중산이 잠시 머물렀다고 먼저 죽은 황제들이 오래도록 제사 지냈던 곳을 빼앗아 버린 셈인가요?
아무리 많은 황제라도 죽고 나니 한 사람의 손중산을 당할 수 없었습니다.
황제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보다 더 섭섭한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동쪽으로는 노동 인민 문화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곳은 명, 청 시대에는 황제가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냈던 태묘(太廟)가 있었던 곳입니다.
태묘는 자금성의 정전인 태화전과 같은 3단의 좌대 위에 세워진 건물로 황실의 중요한 행사가 끝나면
언제나 찾아와 조상에 고하던 곳이며 계절마다 조상신에게 차례를 올리던 곳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종묘라고 부르지요.
새로운 황제가 등극할 때, 황제가 장가갈 때, 섭정이나 친정을 할 때 조상에 고하는 곳이 이곳이라면,
바로 나라의 가장 중요한 통치행위를 보고하는 중요한 곳이 이곳이라는 의미겠지요.
물론 황제가 세상을 등지고 하늘로 떠날 때도 이곳에서 제를 올리고 그 황제의 위패는 말석에 자리했을 겁니다.
그러면 먼저 자리한 선조 귀신이 그날은 신입 귀신에게 환영 회식이라도 하지 않았을까요?
왜 아니겠습니까?
조상의 은덕으로 황제가 되어 호의호식하며 지내는걸요.
지금은 대부분 원형이 사라져 버려 인민이 즐기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중국의 인민 중 이곳에서 즐긴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이런 게 전시행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왕조를 끝낸 공산당이겠지만, 그 또한 역사의 한 페이지이기에 보존해야 마땅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나라가 절단 나는 일을 우리나라에서는 사극에 등장하는 말이 종묘사직을 들먹이잖아요.
중국이라는 곳에서도 사직단과 태묘가 뒷전이 되어 마치 박제나 미라가 되어 숨만 헐떡이는 듯하네요.
그냥 역사의 유물인 태조 묘를 그대로 두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우리나라에도 세계문화유산인 종묘(宗廟)가 있습니다.
우리의 종묘는 세계 문화유산에 선정되었는데 중국은 이따위 짓거리를 했기에 신청조차 할 수 없지요.
비록, 조선 왕조는 사라졌지만, 우리나라는 그 또한 역사의 한 페이지이기에 보존하고 있습니다.
가끔 과거를 지운다고 법석 떠는 사람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비록, 잘못된 역사일지라도 그 판단은 후손이 하게 내버려 두고 보존해야 합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한 사람의 일이라 없애버려야 하나요?
역사는 연속이지 단절된 시대만 짜깁기할 수 없잖아요?
저우언라이가 아니었다면, 자금성마저 이미 사라지고 없을 겁니다.
새로 탄생하는 왕조는 용비어천가를 부르며 아무 상관도 없는 몇 대 전의 조상까지 들먹이며 신비 마케팅에
들어가지만, 사라진 왕조의 조상은 제삿밥도 얻어먹지 못하는 거지 귀신이 됩니다.
인민을 위한다는 전시행정 때문에 태묘는 모습만 일부 남고 행사는 사라졌습니다.
사직단이 중산당으로 이름이 바꾼 것에 대하여는 어느 정도 죽은 황제도 이해하겠지만...
태조 묘가 사라진 것에 대하여 하늘 우러러보니 눈물만 흐를 겁니다.
아무리 황제라 살아생전 떵떵거리며 살았지만, 죽고 나니 귀신이 사는 집마저 없애고 제삿밥도 주지 않습니다.
여름휴가 간다고 그냥 휴양지에 버리고 온 유기견만도 못한 황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 위패를 모신 대전만은 남겨놓았답니다.
죽은 귀신들이 나오지도 못하고 골방 같은 구석진 그 안에서 죽은 황제는 무엇을 하며 놀까요?
마작? 쯔파이?
후손이 변변치 못하면 선조는 이렇게 굶어 죽은 귀신이 되나 봅니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이 뒷전으로 밀려 누구 하나 찾아오지 않습니다.
귀신도 잘 먹어야 때깔이 난다고 하던데...
지금은 마오쩌둥에 의해 노동 인민 문화궁으로 바뀌어 오락의 중심지로 바꾼 것은 일부러 황실 전용의 엄숙한 곳을
웃음이 가득한 곳으로 격하시키기 위함은 아니겠죠?
설마 그렇게 비열한 방법으로 기를 꺾었을까요?
그런데 그런 곳에 들어가 웃고 놀다가 귀신이 해코지나 하지 않을까 봐 겁이 나네요.
이로써 신중국이 탄생하며 예전의 질서는 종묘사직과 함께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낙엽은 새로 돋아나는 새싹을 위해 이렇게 자리를 양보하는 게 순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라도 베트남 후에(Hue)에 가면 중국의 자금성을 그대로 흉내 낸 응우옌 왕조의 황궁이 있습니다.
응우옌(院) 왕조는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입니다.
베이징에서는 사라져 버렸지만, 베트남에는 태조 묘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베트남에서는 세조 묘라고 하지만...
사라진 태조 묘에 대한 원형을 보시려면 그곳에 가셔서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여기 제가 베트남에 갔을 때 후에에 있는 태조 묘를 찍어온 사진이 있어 올려 드립니다.
아마도 지금은 사라진 이곳 베이징도 이와 같은 형태였을 겁니다.
그 이유는 응우옌 왕조의 황궁이 바로 자금성을 그대로 흉내 내 지었다고 하니까요.
중국의 사학자가 태조 묘에 대한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나 베트남을 방문해야 할는지 모르는 일입니다.
공자 제사 지내는 법을 배우기 위해 우리의 성균관을 방문했듯이 말입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세상을 살다 보면 하고 싶은 일이 참 많습니다.
만약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시다면, 지금 바로 시작하세요.
세월이 지나 뒤돌아다 보니 했던 일보다 하고 싶었던 일이 대부분입니다.
그 일이 바로 내가 평생 원했던 일 인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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