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곽 길 2

2011. 6. 18. 09:47佳人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佳人의 이런 저런 그런 이야기

 

 

숙정문(肅靖門)은 서울 성곽의 북대문으로 남대문인 숭례문(崇禮門이 예를 숭상한다는 뜻)과 대비하여

'엄숙하게 다스린다.'라는 뜻으로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태조 5년(1396년) 처음 성곽을 쌓을 때 지금보다 약간 서쪽에 있었으나 연산군 10년(1396년)에 성곽을 보수하며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합니다.

 

 

태종 3년 (1413)에는 풍수학자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으니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하여서는

안 된다.'고 건의하여 두 문을 닫고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숙정문은 사실상 상징적인 문이었고 실질적으로 사용되던 문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또한 정궁인 경복궁 바로 뒤의 문이었기 때문에 더더구나 사용하기도 께름칙한 곳이었지요.

 

 

다만, 가뭄이 심하면 숙정문을 열고 남대문을 닫아두었다고 하는데 이는 태종 16년(1416) 기우절목(祈雨節目)이라고

기우제 시행규칙을 만들면서 북쪽의 음(陰), 남쪽의 양(陽)이라는 음양의 원리를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즉 북은 물을 의미합니다.

 

 

숙정문은 오랫동안 문루가 없이 월단(月團:무지개 모양의 석문)만 남아 있었는데 1976년 북악산 일대 서울 성곽을 보수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입니다.

 

 

천정에 그려진 무늬도 아름답습니다.

비가 많이 내려 홍수라도 나면 문을 언제나 닫아 두었던 곳이지요.

다른 문과는 달리 산악지대에 있어 통행하기도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이제 이곳을 떠나 계속 오르막길을 따라 오릅니다.

 

 

날씨가 제법 덥습니다.

그래도 그늘이 있고 시원한 바람이 불기에 천천히 콧노래라도 부르며 올라가면 전혀 힘이 들지 않습니다.

 

 

조금 올라가니 그곳에 쉼터를 마련해 놓았군요.

그리고 그 옆에 촛대바위라는 바위가 있습니다.

 

 

한양성벽에는 공식적으로 네 개의 대문과 네 개의 작은 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 외에 알려지지 않은 문이 여러 개 있지요.

이런 문을 암문(暗門)이라고 하며 위의 사진처럼 지도 상에는 나타나지 않고 다만 성을 지키는 군사만 드나들던 문입니다.

 

 

1392년 조선왕조의 태조는 개성 수창궁에서 즉위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한양 천도를 명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 했습니까?

새로운 세상은 새로운 도읍에서 시작하고 싶었나 봅니다.

 

 

즉위 4년이 지나자 일차적으로 경복궁, 종묘, 사직단의 건립이 완성되자 곧바로 정도전이 수립한 도성 축조계획에 따라

서울 성곽을 수축하기 시작합니다.

 

 

서울 성곽은 북악산(342m), 낙산(125m), 남산(262m), 인왕산(338m)을 잇는 총 길이 59.500자(약 18.2km)의 성곽으로

평지는 토성, 산지는 산성으로 계획되었습니다.

이 방대한 대역사를 농한기에 완성하기 위하여 1396년 1.2월의 49일 동안 전국에서 11만 8천 명을 동원하여

성곽 대부분을 완성하고 가을 농한기인 8.9월의 49일 동안 79.400명을 동원하여 봄철에 못다 쌓은

동대문 구역을 완성하는 동시에 사대문과 사소문을 준공하게 됩니다.

 

 

청운대에서 백악산으로 오르는 길에 일명 1.21사태 나무라고 이름 지어진 소나무가 있습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군부대의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 습격을 목적으로 침투하다가 우리 경찰과 교전을 벌이게 되었지요.

 

 

그러다 도주하다 아마 이곳에서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지며 이 소나무에만 15발의 총탄이 박히며

그 흔적이 남아 그렇게 부르게 되었답니다.

31명이 침투하였으나 29명은 사살되고 1명은 체포되었으며 1명은 도주하여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하네요.

 

 

드디어 오늘 성곽 길에서 가장 높은 곳인 백악산에 올랐습니다.

백악산을 북악산이라고도 부르던가요?

이곳에서 조선의 건국서부터 오늘까지 대한민국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산입니다.

 

 

오늘은 날씨가 안개가 심해 조망이 좋지 않습니다.

남산과 서울타워가 보이고 바로 아래에는 세종로가 보입니다.

 

 

그 후 27년이 지나 세종임금은 서울 성곽을 흙으로 쌓았던 부분을 모두 돌로 쌓는 석성으로 보수작업을 시작합니다.

1422년 세종 4년 1월 농한기에 전국에서 32만 명의 인부와 2.200명의 기술자를 동원하여 완공하게 됩니다.

 

 

이때 서울의 인구가 10만 여명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큰 공사였습니까?

지금의 모습이 이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때 성곽작업을 하다 숨진 인부가 872명이었다 합니다.

이 정도의 공사로 많은 사람이 숨졌다면, 중국의 만리장성은 어찌 되었을까요?

그야말로 만리장성은 민초의 돌무덤이 아니겠습니까?

 

 

1704년 숙종 임금 때까지 260년간 큰 붕괴가 없어 부분적인 보수만 하였는데,

사실 임진왜란을 거치며 성곽이 도성을 방어하는데 제구실을 하지 못했고 임진왜란 때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하였기에 성곽 또한 큰 피해를 보지 않았습니다.

 

 

숙종 임금은 신하의 반대를 물리치고 서울 성곽의 대대적인 정비를 시작함과 동시에 북한산성까지 쌓으며

도성의 방어를 튼튼히 하는 데 힘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후 1899년 전차 부설을 하며 동대문과 서대문의 성곽 일부가 헐렸고 

이듬해 남대문 부근이 헐렸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며 서대문과 혜화문(동소문)이 헐리며 사실상 서울의 평지 성곽은 모두 철거되며

총 길이 18.2km 중 산지에만 성곽이 10.5km만 남게 되었습니다.

 

 

가경 9년(1804년) 갑자 10월일(嘉慶九年 甲子 十月日) 패장(牌將) 오재민(吳再敏), 감관(監官) 이동한(李東翰) 변수(邊首), 

용성휘(龍聖輝) 라고 기록한 글씨가 보입니다.

남아 있는 성벽에는 돌에다가 글을 새겨놓은 게 있습니다.

축조한 연도, 지휘관과 감독한 사람과 기술자 등을 기록해 놓아 그 책임을 남기게 함으로

부실공사를 예방한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글쓴이 : 佳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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