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곽 길 1

2011. 6. 12. 00:17佳人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佳人의 이런 저런 그런 이야기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사람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고들 말하지요.

어질고 의롭고 예의 바르고 지혜롭고 믿음직한 사람이 최고의 사람이라고들 합니다.

 

 

누구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나요?

사회가 우리를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잖아요?

이제부터 인의예지신을 하나씩 찾아봅니다.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며 사대문의 이름에 각각 인의예지신을 붙여 이름 지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동대문을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고 하며 어질 인(仁)을 넣어 불렀습니다.

흥인지문은 한양의 다른 문의 이름과 다르게 유일하게 네 글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풍수지리에 따라 한양 동쪽의 지기(地氣)가 약하다 하여 그 기를 북돋우기 위해 넉 자로 이름 지었다 하네요.

보물 제1호랍니다.

 

 

서대문인 돈의문(敦義門)에 의(義)롭다는 글자를 넣었습니다.

한양 서쪽의 큰 문이라는 서대문입니다.

다른 말로 신문(新門) 또는 새문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래서 아직 이곳에 새문안로니 신문로니 하는 거리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1915년 일제 강점기에 경성 도시개발계획에 따른 전차 복선화로 말미암아 강제로 헐려버렸습니다.

 

 

얼마 전 화재의 아픔 기억이 있는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이지요.

국보 제1호입니다.

예전부터 禮를 중요시 생각하는 우리 민족이 아니겠습니까?

1907년 일본의 황태자가 방한하며 머리를 숙이며 문을 통과할 수 없다고 해 성벽을 헐어버림으로 훼손되기 시작합니다.

정말 예의도 모르고 예의도 없는 섬나라 사람입니다.

 

 

이런 일본의 행동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화재 때문에 소실되었지만, 현재 복구작업으로 2012년에 다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아름다운 우리의 문화재가 하루아침에 그만...

정말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사대문인 북대문은 지금은 숙정문(肅靖門)이라고 합니다.

숙정문은 다른 말로 북대문이나 숙청문으로도 불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숙정문은 1976년에 복원한 것입니다.

다른 한양의 문과는 다르게 산 위에 있어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던 문입니다.

숙정문은 서울 성곽 길 중간에 있기에 나중에 자세히 다시 사진을 올리겠습니다.

 

 

그런데 사대문을 모두 정하고 나니 마지막 글자인 밀을 신(信) 하나가 남았습니다.

그래도 글자를 모두 채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사대문 안에 있어 언제나 시간을 알려주던 곳인 보신각이 있습니다.

보신각의 가운데 글자가 바로 信입니다.

 

 

이렇게 우리 선조는 그냥 아무렇게나 성곽을 쌓고 문을 만든 게 아닙니다.

성곽의 형태도 시기에 따라 보수를 하며 조금 달라집니다.

 

 

서울 성곽은 사적 제10호라고 합니다.

위의 사진의 지도를 보시면 제일 많이 찾는 성곽 길이 북악산 코스일 겁니다.

창의문에서 시작하는 코스는 너무 급경사로 힘이 들지만, 성균관대 후문을 지나서 오르는 길은 완만하기에 더 좋습니다.

위 사진 중 노란색으로 표시한 A에서 출발하여 D까지 2.2km의 두 시간 남짓 걷는 길입니다.

 

 

이제부터 이 길을 걷기 위한 필요한 내용을 알아봅니다.

혹시 필요하신 정보가 될 수 있기에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이 길을 걷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분증이 필요한 곳입니다.

만약 신분증이 없다면?

집으로 돌아 가셔야 합니다.

 

 

청와대 뒷길이기에 성곽 길 중 유일하게 신분증을 보여주고 출입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입구에 있는 안내소 앞에는 출입허가서를 작성해 사무실에 주민등록증과 함께 제출합니다.

 

 

그러면, 일련번호가 새겨진 목걸이 번호표를 줍니다.

물론 신분증도 함께 돌려받습니다.

그러면 모든 절차는 끝나고 이제부터 즐겁게 걷기만 하면 됩니다.

 

 

중국의 만리장성을 보기 위해서는 돈에 환장한 중국에 입장료를 내야 하지만, 우리 서울의 성곽은 무료입니다.

중국사람만 입장료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닙니다.

일본사람에게도 돈을 받아 그들의 조상이 서대문인 돈의문을 헐었고 다른 문의 성벽을 헐었기에

복구하는 그 비용을 보태기 위해 돈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내외국인 구분 없이 모두 무료입니다.

 

 

중국은 아마도 이런 곳이 있다면, 틀림없이 케이블카를 설치하고 모든 교통수단을 외곽에서 차단하여

돈을 내고 케이블카나 구내 버스만을 이용할 수 있게 했을 겁니다.

 

 

와룡공원을 출발해 조금 걷다 보면 옛날 한양인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성문이 없기에 성벽 위로 넘어갈 수 있게 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네요.

 

 

모든 성벽에는 외부를 볼 수 있게 세 개의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양쪽의 두 개는 안에서 바깥쪽의 아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양쪽의 두 개의 구멍을 원총안이라 하고 가운데 구멍을 근총안이라 부릅니다.

가운데 있는 구멍만 아래를 볼 수 있게 바깥쪽이 경사지게 하여 놓았습니다.

이를 여장(女牆) 또는 성가퀴라 부른다는데 만약, 전투가 벌어지면 몸을 숨기고 공격하려는 적에게 역습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1개의 여장을 1타라고 부릅니다.

 

 

성벽 축조에 관해 보통 3기로 나눈다 합니다.

 

 

제일 처음 태조 때 만든 성은 주로 자연석과 흙으로 쌓았다 합니다.

그 돌의 크기가 메줏덩어리만 했고 성으로서의 기능은 많이 부족했을 겁니다.

아무래도 일반 백성을 동원해 쌓다 보니 제대로 된 성벽을 축조하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그다음이 세종 때 축조한 성으로 아래는 제법 그럴듯한 돌을 쌓고 위에는 먼저 쌓았던 돌을 이용해 쌓았습니다.

그래도 완벽한 모습은 아니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숙종 임금 때에 쌓은 성입니다.

주로 군사들을 동원해 쌓다 보니 이제 제대로 된 성을 쌓게 됩니다.

튼튼하게 남아 있는 곳은 그대로 두고 2자*2자의 석재를 반듯반듯한 정사각형의 돌로 쌓았습니다.

장정 4명이 겨우 들 정도의 무게였다 합니다. 

 

다음에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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