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크의 아버지 아타튀르크

2011. 7. 11. 00:34터키 여행기/터키여행

 

보스포루스를 향해 열린 돌마바흐체 궁전의 문을 바라봅니다.

관광객을 태운 무심한 배만 지나갑니다.

세상을 움켜잡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잡은 것은 흐르는 물이요, 바람이요, 구름인 것을...

 

들이마신 숨은 언젠가 내뱉어야 합니다.

그게 돈이 되었든 명예가 되었든 권력이 되었든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모두 같아집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 수 있습니다.

정답은 정말 바람에 실려 올까요?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은 참 어리석은 것 같습니다.

삶이란 한바탕 꿈인가 싶습니다.

 

한때는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궁전이었습니다.

보통사람으로 이 궁전 안에 발을 디딘 사람은 몇 사람 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영웅은 천하를 원하지만, 천하는 영웅을 원하지 않습니다.

영웅은 천하를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천하는 언제나 영웅의 편이 아닙니다.

그러나 터키에서는 오스만 제국을 종식하고 새로운 세상을 연 영웅이 있었습니다.

 

터키를 여행하다 보면 거리마다 동상이 있고 건물마다 초상화가 걸려 있습니다.

바로 터키가 사랑하는 국부인 아타튀르크입니다.

아타튀르크라는 말이 터키의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오늘은 아타튀르크에 관한 생각을 해보렵니다.

 

터키의 지폐와 동전할 것 없이 모든 화폐에 아타튀르크의 얼굴만 있습니다.

도시마다 아타튀르크 거리가 있습니다.

왜 그가 이렇게 터키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나 알아나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타튀르크라는 이름은 처음 태어나 지은 이름이 물론 아니고 나중에 1934년 터키 국회에서 결정하여

국민이 붙여준 이름입니다.

태어나 처음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은 무스타파입니다.

당시, 터키는 오스만 제국 시절이었고 이름은 있으나 성이 없는 나라였습니다.

 

그 후 학교에 다닐 때 워낙 수학 실력이 뛰어나 그의 수학선생이 자신의 이름인 케말이라는 이름을

물려주었다고 하여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이 됩니다. 

또 달리 무스타파 케말 파샤(Mustafa Kemal Paşa)라고도 한다는군요.

파샤란 오스만 제국 시절 군대의 지휘관이나 고급 관료에 대한 존경의 칭호라 합니다.

빠쌰 빠샤~~ 가 아니라...

점점 이름이 길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아직 이름만 있지 성은 없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 독일 편에 섰다가 패전국이 되며 수 백 년이나 이어오던

대제국의 종말을 맞게 됩니다.

오스만 제국이 식민지로 삼았던 점령국 모두가 독립을 하며 갈라서자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전쟁에 승리한 연합군에서 터키의 본토에까지 손을 뻗치기 시작합니다.

 

특히 그리스는 터키의 영토가 옛날 그리스 땅이었다고 모두 돌려달라고 합니다.

사실 옛날에는 그리스 땅이 맞습니다.

중앙아시아인 북동쪽에서 세력을 넓이며 슬그머니 내려온 돌궐 족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튀르크는 영토도 없는 떠돌이 민족이 되게 생겼습니다.

 

1919년 드디어 역사의 도시인 이스탄불과 에게 해와 마르마라 해에 인접한 지역에 연합군이 상륙하며

오스만 제국은 영국에 의해 간신히 숨만 쉬는 꼴이 되었습니다.

그해 우리나라에서는 삼일 독립운동이 일어난 해였지요.

이에 무스타파 케말은 앙카라에서 열린 '대국민회의' 의장을 맡으며 연합국으로부터 불평등 조약을

요구받고 있는 조국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 조국 독립을 위한 전쟁을 선포합니다.

 

그 이듬해인 1920년 앙카라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그리스의 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합니다.

부자 망해도 삼년 먹을 게 있다고 비록 패전국이었지만, 한때 유럽을 떨게 한 오스만 제국의 군대가 아닙니까?

1920년 5월 10일에는 오스만 제국을 역사 속으로 남기고 술탄 칼리프 제도를 폐지하고 수도를 앙카라로 정하고

터키 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모든 일이 순탄한 것만 아니었다는군요.

 

무스타파에 대하여 조금 알아봅니다.

그 이유는 지금의 터키는 무스타파를 빼고는 말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스타파는 1881년 3월 12일 그리스 지역인 살로니카 지방에서 오스만 제국의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근무처에서 태어납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시골로 낙향하지만, 다시 살로니카로 돌아와

초등학교를 마칩니다.

시작은 미약하였습니다.

 

12살 때부터 오스만 제국의 장교가 되기 위해 군사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이곳에서 수학을 가르치던 선생에게

케말이라는 이름을 받고 무스타파 케말이 되게 됩니다.

그 후 지금의 마케도니아에 있는 군사고등학교에 다니며 그곳의 민족주의자와 기독교도들의 터키에 대한

공격을 지켜보며 점차 동료와 민족주의자로 변신하게 됩니다.

 

1899년 이스탄불에 있는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하비에르 육군 참모대학에 입학하게 됩니다.

주로 군사학교에 다니며 군인의 길을 걷던 그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어제 우리가 지났던 차나칼레의

사단장에 부임하며 게리볼루에서 두 번이나 영국군을 물리쳤고 이스탄불의 언론으로부터

'이스탄불의 구세주'라는 칭호를 얻습니다.

그 후 동부전선에 근무하며 남하하는 러시아군의 전진을 막아내며 드디어 별을 달게 됩니다.

 

조금 지루하시죠?

그래도 터키 사람이 아타튀르크에 대한 사랑은 신앙에 가깝습니다.

조금 더 알아봅니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그도 휴전에 관해 영국군과 대립을 보이자 이스탄불에 있는 육군부로 전보됩니다.

이스탄불에 도착한 그는 3국 동맹의 연합함대가 항구에 정박한 것을 보게 되고 3국 동맹에 의해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분할되었다는 정보를 듣게 됩니다.

때를 맞추어 각 지방에 있던 쿠르드족을 비롯해 많은 소수민족이 조직적으로 튀르크 족에 대항하기 시작합니다. 

 

오스만 황제와 지지자는 영국의 통치 아래 왕권을 유지하려 했고 유력한 언론인과 지식인은 미국의 지휘 아래

새로운 정부를 꿈꾸었던 시기였습니다.

패자는 눈이 녹기를 기다리지만, 승자는 눈을 밟아 길을 만들어 전진합니다.

 

점차 외세의 압력이 강해지자 그는 동료와 조국의 장래에 대한 토의를 거쳐 오스만 군대가 해체되는 것을 막고

외세로부터의 완전한 독립만이 조국이 살아가는 방법이라 굳게 믿게 됩니다.

그러는 와중에 뜻을 같이하는 동지가 점차 늘어나게 됩니다.

 

그에게도 하늘이 도왔는지 드디어 기회가 오게 됩니다.

3국 동맹국은 오스만 제국의 정부에 압력을 넣어 동부지역에 사는 소수민족이 일부 주에서 독립을 전제로

폭동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고 대비책을 술탄에게 이야기하고 술탄은 무스타파 케말 파샤에게

제3육군 감독관으로 임명하고 군 당국자와 문관을 모두 관리감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합니다.

1919년 떠나기에 앞서 술탄을 비밀리에 면담을 하고 많은 장교와 참모를 거느리고 길을 나섭니다.

 

그는 장교 비밀 회람을 통하여 국가가 처한 위기와 이 과정에서 오스만 제국이 얼마나 무능한가를 역설하여

많은 동의를 얻어내며 이미 이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은 시작되었음을 강조합니다.

드디어 민족 자체의 힘으로 극복하자고 하며 각 주에서 3명의 대표를 선출하여 시바스라는 곳에서 민족회의를

개최할 것을 알림과 동시에 모든 군 지휘관은 현재 진행 중인 군 해체에 관한 휴전 조항을 무시하고 지휘관은

더욱 군을 강화할 것을 지시하게 됩니다.

 

이후로 모든 군과 문관은 모든 지휘통솔을 자신에게 있고 그의 명령에만 따를 것을 선포합니다.

이로써 이스탄불을 제외한 아나톨리아의 모든 행정과 군은 무스타파 케말이 장악하게 되었으며

처음 그의 지휘에 불만을 품었던 문관들도 점차 그의 뜻에 동조하게 됩니다. 

이런 소식이 이스탄불 정부와 3국 동맹에 알려지자 그의 소환 명령이 내려집니다.

술탄의 명령에 따라 길을 나선 무스타파가 다른 마음을 먹었다는 의미겠지요.

 

드디어 체포 명령이 떨어지자 그는 스스로 군을 사임하고 민간인의 신분을 택합니다.

드디어 국민회의가 결성되고 그는 의장에 선출됩니다.

그 의회는 9명의 상임위원을 선출하고 대부분 의사결정을 그곳으로 집중시키고

역시 무스타파 케말이 의장직을 맡게 됩니다.

일부 의회 대표는 아나톨리아의 독립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했지만,

그는 '아나톨리아와 루멜리아의 권리 방어를 위한 연합'을 설립하자고 제안하며 이것이 정당의 모태가 됩니다.

 

그러나 이스탄불의 오스만 제국의 페리드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내각과 오스만 정부는 국민운동을 반역으로

간주했으며 케말의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했습니다.

12월 27일 케말은 그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가장 좋은 장소라 생각한 앙카라로 자리를 옮기게 됩니다.

이 시기에 이스탄불에서 실시한 하원의원 선거에서 케말을 지지하는 사람이 대거 당선됩니다.

아울러 케말을 군으로부터 해임한 포고령을 파기해 버립니다.

 

이에 당황한 영국은 이스탄불에 군을 파견하여 강제로 의회를 해산시켜버립니다.

그러나 케말은 오히려 그에게 이 사건이 유리하게 바꾸어버립니다.

영국군에 점령당한 무력한 정부를 대신해 새로운 정부를 만드는 계기를 만들면 되니까요.

 

드디어 4월 23일 앙카라에서 대민족 의회를 열고 의장에 선출되며 오스만 제국을 버리고 나라 이름을 터키로

바꾸고 총리직과 국가 원수 직에 취임하며 수백 년간 내려온 오스만 제국의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물론 일부 지역에서 반발도 일어나고 소요사태도 일어났지만, 금세 국민의회로부터 진압되어 버립니다.

 

먼저 동부에 진주한 아르메니아와 그루지아 군을 몰아내고 남부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을 아나톨리아에서

몰아내며 예전의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며 앙카라는 합법정부로 인정까지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영국은 앙카라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서부에 주둔한 그리스 군을 앙카라 50km까지 육박해 들어가게 합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앙카라 정부는 케말을 군수 통치권자인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케말은 1922년 8월 26일

자신이 계획한 작전에 따라 그리스 군과 격전을 벌여 패퇴시키고 드디어 2주 안에 그리스 군은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모두 철수합니다.

 

드디어 1923년 7월 24일 로잔 조약을 통하여 터키의 국경과 완전 독립을 보장하게 되었고 오스만 제국과의

모든 특권은 파기되게 됩니다.

이로써 유럽의 병자에서 새로운 젊은 국가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 후 대통령에 선출되며 그의 이상이 하나씩 펼치게 되었죠.

 

물론 그사이 반란도 일어났고 암살 예비음모도 있었지만,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으로

모두 찻잔 속의 태풍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국회는 그에게 아타튀르크(튀르크의 아버지)라는 이름을 부여하며 국부로써 추앙하게 됩니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39살에...

 

그가 대통령이 되며 실시한 개혁으로는 

이슬람식 통치제도인 술탄 칼리프 제도를 없애고 공화정을 선포합니다.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고 종교의 자유를 선포합니다.

 

여성에 대한 차별로 인식된 차도르를 학교나 관공서에서 금지하고 일부다처제를 금지합니다.

여성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하여 남녀평등을 실현합니다.

이슬람 법(샤리아)을 서구식 근대법으로 바꾸고 헌법에 있던 국교를 없애버립니다.

 

회교력을 대신해 서양력을 도입합니다.

모든 국민에게 성을 사용하게 합니다.

최고 성직자를 모시는 공직제도를 없애고 이슬람 학교를 폐지합니다.

이슬람 휴일인 금요일을 일요일로 변경합니다.

 

문자 개혁을 시행하여 지금까지 사용하며 문맹률이 높았던 이슬람 문자를 버리고

독일과 프랑스 언어학자에게 부탁해 알파벳을 도입합니다.

이외에도 생각하기도 어려운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을 시행하며 이슬람에 의한 나라에서

혁명적인 개혁을 단행합니다.

훌륭한 지도자란 국민에게 희망을 파는 상인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1938년 11월 29일 57세의 젊은 나이로 서거하면서 터키 국민은 그의 서거 시각을 기리기 위해

 돌마바흐체 궁전의 모든 시계를 09:05분에 정지시켜 놓았다.

 

죽어서도 국민의 사랑을 받는 아타튀르크.

그의 이상이 제대로 실현됐기를 기원합니다.

 

아타튀르크...

튀르크의 아버지라 불리는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파샤는 수도를 앙카라로 이전했지만,

이스탄불의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외국의 정상이나 외교 사절을 만나 국정을 수행했는데,

1938년 11월 10일에 이 궁전에서 숨을 거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를 기억하기 위해 궁전의 모든 시계가 그가 숨진 시각인 9시 5분에 멈춰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숨을 거둔 침대는 위의 사진에 보듯이 터키 국기로 덮어 놓았습니다.

 

터키라는 나라를 칼리프라는 술탄의 나라에서 공화국으로 만든 혁명가인 그도 수도를 앙카라로 옮겼지만,

 왜 이곳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나 모르겠습니다.

죽은 자가 산자를 다스리는 나라는 공산주의 국가만 있는지 알았습니다.

죽은 자를 박제로 만들어 산자를 다스리는 곳 말입니다.

이상한 취미를 가진 나라가 있잖아요.

그러나 이곳 터키도 아타튀르크에 대한 국민의 사랑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시계는 섰지만, 지금도 시간은 흐르고 있습니다.

비록 아타튀르크는 사라졌지만, 아타튀르크가 꿈꾸었던 이상의 시간은 오늘도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돌마바흐체 궁전 입구에 있는 시계탑의 시계는 오늘도 부지런히 쉬지 않고 돌아갑니다.

들어간 시각이 8시 30분이었는데 나와서 보니 10시 15분이 조금 지났습니다.

그러니 아름다운 돌마바흐체 궁전을 돌아본 시간이 두 시간도 걸리지 않았군요.

이제 내일 마지막 이야기로 이번 터키 여행기를 마칠까 합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세상이 술탄의 기침 소리만 들어도 두려워했습니다.

늘 술탄의 안색만 수 백 년을 살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언제나 술탄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을까요?

그 이유를 바람만이 알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