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은 모두 어디로 갔습니까?(소금호수)

2011. 5. 24. 00:29터키 여행기/터키여행

터키 사람들은 무척 청결한 가 봅니다.

버스가 휴게소에 정차하면 운전기사는 정차할 때마다 자동차를 지극정성으로 열심히 닦습니다.

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할 때면 식기가 비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달려와 치워 버립니다.

 

오늘 일정은 아침 4시 30분에 모닝콜, 5시 30분에 식사, 6시 30분에 출발입니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고요?

4시 30분은 한국시각으로 아침 10시 30분이니 이미 모든 한국인을 잠에서 깨어 오밤중에 알아듣지도 못하는

TV를 보거나 샤워를 하거나 부지런을 떨고 있을 시간입니다.

앙카라로 수도를 옮김으로 사실 유럽 땅인 이스탄불에서 아시아로 수도가 왔으니 터키는 유럽의 일원이기를

포기한 건 아닌가요?

 

제일 먼저 시내에 있는 한국공원입니다.

공원은 앙카라 기차역 부근입니다.

이 공원은 한국전쟁 때 유엔군의 일원으로 미국과 영연방에 이어 3번째로 많은

15.000명을 파견했으며, 참전 군인 중 안타깝게 사망한 젊은 군인 773명을 추모하기 위해

한국에서 조성한 곳입니다.

 

아침 6시에 숙소를 출발해 잠시 달려가니 태극기와 터키 국기가 담장을 둘러싸고 있으며

안에는 대형 국기가 펄럭이는 작은 공원에 이릅니다.

마침 출근길의 많은 튀르키에가 우리가 버스를 내리자 환호성을 지르며 손을 흔들어 줍니다.

  

우리 또한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튀르크의 아침인사인 "귀나이든"을 소리쳐 줍니다.

이른 아침인데도 관리인이 나와 들어가는 우리 일행에게 일일이 "안녕하세요!"라고

미소를 띠고 반갑게 맞이합니다.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을 보고 만들었나요?

우리 일행 모두 잠시 머리 숙여 영혼을 위로합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젊은 영혼의 희생으로 우리가 지금 자유의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잖아요.

한 번에 5천여 명씩 3차에 걸쳐 한국에 파견되었으며 터키 전역에서 모인 지원병이라 합니다.

그때 터키 전역에서 많은 젊은이가 모였기에 꼬레로 가는 동네 젊은이로 한국은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말인 토이기(土耳基)라네요.

옛날에 사용하던 터키의 중국 한자 표기가 아닌가요?

당시에 터키에서 한국으로 파병 오는 터키군은 물론 배를 타고 왔습니다.

40일간 힘든 여정 끝에 부산에 첫발을 디딘 겁니다.

옛날 고구려와 연합하여 중원에 대항했던 일이 이제는 한국전쟁에 유엔군의 일원으로

다시 중공군에 대항하여 싸웁니다.

 

여기 아름다운 젊은 영혼이 잠든 곳입니다.

생판 부지 머나먼 나라 대한민국으로 파병 와 전투 중 산화한 튀르크의 용사들이 잠든 곳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그들을 바로 귀국하지 않고 한국에 남아 많은 전쟁고아를 돌보았으며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쳤습니다.

1960년 마지막 철수할 때까지 앙카라 학교를 운영하며 부모 잃은 고아에게 공부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터키로 돌아간 후 그들은 하나의 단체를 만들며 주민 등록증에 국적을 꼬레라고 할 정도로

한국사랑에 열의를 보였답니다.

터키는 2중 국적을 인정하는 나라라 하는군요. 

  

우리가 앙카라에 온 특별한 이유는 없는 듯하네요.

카파도키아로 바로 가기가 너무 멀기에 앙카라를 들려 하룻밤을 자고 가는 일정입니다.

그러나 이곳에 들리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잠시 영혼을 위로하고 묵념 정도는 하고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름을 읽을 수도 기억할 수 없지만, 이들의 고마움은 기억해야 합니다.

눈으로 읽을 수는 없지만, 마음으로는 담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자유와 평화는 지키려는 사람이 흘린 피가 있기에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게 아닐까요?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국에서 대한민국의 태극기를 본다는 일...

가슴이 두근거리고 흥분되는 일입니다.

 

이 공원은 1973년 터키 공화국 건립 50주년을 맞이하여 대한민국 정부가 터키 공화국에 헌납한 것입니다.

비록 튀르크 병사의 시신은 한국에 묻혀 있지만, 묘지 주변의 흙을 가져다 이곳에 함께 묻었습니다.

그렇지요.

고향이란 누구에게나 그리운 단어입니다.

 

이 아름다운 꽃은 모두 어디로 갔나요?

여기 젊은이들은 또 모두 어디로 갔나요?

병사들... 그리고 무덤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나요?

 

언제쯤 사람들은 알게 될까요?

모두 사라진 후에나 알게 될까요?

그래... 이제는 조금이나 마음이 편안해지셨기를 기원합니다.

 

대한민국 태극기와 터키의 국기가 이렇게 정답게 오래도록 펄럭였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모든 나라와 함께 그렇게 지났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두 나라가 형제의 끈끈한 정으로 오래도록 가까이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이곳에 각인된 사람은 모두 773명입니다.

일련번호, 계급, 이름, 아버지 이름, 출생연도, 고향, 그리고 사망한 날짜입니다.

아버지 이름을 기록한 것은 터키 공화국이 생기기 전까지 터키 사람은 성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명이인이 많았기에 아버지 이름을 기록하였으며 공식 기록보다 많은 사람이 각인된 것은 중상자가

그 후 사망함으로 712명의 공식 사망자보다 늘어나게 된 것입니다.

 

카파도키아를 가기 위해 앙카라 시내를 빠져나가는 길에 아타튀르크 영묘를 차창 관광합니다.

차창 관광이라...

그러니 그게 버스를 타고 가다가 영묘가 보이는 곳에 잠시 서서 저게 영묘다 하고 그냥 가는 겁니다.

까마득히 멀리 있는 영묘를 잠시 차를 세우고 바라보다가 그냥 가는 겁니다. 헐~

 

佳人은 파르테논 신전인지 알았습니다.

줌으로 당겨보면 이렇습니다.

터키인의 아타튀르크 사랑은 정말 대단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파르테논 신전이 세계적으로 건축물 시장에 제일 많은 영향을 끼친 건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모습을 흉내 낸 법원이나 공회당, 국회 등이 무척 많이 있지요?

 

이제 시내를 빠져나오면 황량한 벌판에 줄 하나 그어놓은 길을 달립니다.

오늘 가야 할 길이 만만치 않습니다.

도로는 포장도로지만, 워낙 여름에 고온이라서 포장상태가 엉망입니다.

 

달려도 달려도 또 푸른 초원입니다.

어떤 곳은 푸른 초원이지만, 또 다른 곳은 돌밭뿐입니다.

 

가끔 양을 키우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큰 마을의 모습은 거의 볼 수 없습니다.

호주의 양은 주로 털이 필요하기에 자주 목욕도 하며 청결하게 관리되지만,

이곳에 사는 양은 주로 갈비나 꼬치구이 용이라서 아주 지저분해 보입니다.

 

그렇게 맛이 있다는 양이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 돼지보다 더 지저분한 듯하네요.

양이 순한 동물로 알려졌습니까?

그리고 보호해야 할 정도로 연약한 동물입니까?

말도 듣지 않는 앙큼한 것 같으니라고..

 

남한의 8배 정도의 영토에 인구는 남한보다 약간 많은 7천만 명이 조금 넘는다고 하니...

어제 이스탄불에서 앙카라까지는 고속도로였지만, 오늘은 국도입니다.

가는 도중 오른쪽에 호수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호수가 얼마나 큰지 한 시간을 넘게 가도 계속 호수입니다.

 

이 호수가 유명한 TUZGOUL이라는 소금 호수입니다.

카파도키아를 가는 길에 소금 호수에 있는 휴게소에 잠시 들러 쉬었다가 계속 가게 됩니다.

앙카라에서 여기까지 150km 정도 되나 봅니다.

 

이쯤에서 오늘 이동하는 지역의 지도를 보고 갑시다.

그러니 오늘 달려야 하는 시간이 겨우 4시간 정도입니다.

 

이제 소금 호숫가에 있는 휴게소에 들르게 됩니다.

휴게소라고 해야 자그마한 간이 휴게소입니다.

주변에는 아무 곳도 없는 황량한 벌판입니다.

 

한참을 달려왔으니 제일 먼저 화장실을 찾게 됩니다.

그런데 이곳은 화장실 사용료를 내야 하는 곳입니다.

 

고속도로 휴게소는 화장실 이용료를 받지 않지만 대체로 국도에 있는 휴게소는 화장실 사용료를 받더군요.

0.75 TL입니다.

우리 돈으로 600원 정도이네요.

달라나 유로화 모두 받습니다.

 

그런데 화장실 시설이 놀랍습니다.

인원을 정확히 계산하기 위함입니까?

그런데 나오는 곳에도 설치했습니다.

혹시 들어간 사람이 사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시설입니까?

그러면 이곳 화장실에 들어간 사람이 나오지 않은 예도 있다는 말입니까?

터키의 작은 간이 휴게소의 화장실에서 대단한 것을 보았습니다.

 

소금을 이용한 여러 가지 상품을 팔고 있습니다.

이곳은 해발 900m가 넘는 곳이라네요.

 

터키 소금 수요의 60% 정도를 이곳에서 채취한다고 하네요.

 

바람이 많이 부는군요.

게다가 오늘은 가랑비마저 내리니 황량한 벌판처럼 느껴집니다.

 

한국 관광객이 얼마나 많이 오면 이렇게 한국어로 된 선 간판을 설치했을까요?

비가 올 때인 우기와 건기와의 차이가 이곳 호수의 크기 또한 무척 많이 다르다 하네요.

지금은 우기의 끝이라 바다처럼 보이지만...

 

소금밭 맞습니까?

지금은 우기의 끝이라 물이 많지만, 건기에는 호수 가운데까지 소금 덩어리로 가득하다고 하네요.

 

네...

모두 소금이었습니다.

그냥 배추만 던져놓으면 자동으로 절여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냥 건져 김장 속만 버무리면 김장 끝~

 

걸어 다니기 쉽게 블록을 놓아두었는데 그 주위로 소금이 엉겨 붙기 시작합니다.

 

길이가 80km이며 폭이 50km라고 하니 바다라고 해도 되겠네요.

터키에서 크기로 따진다면 2번째로 큰 호수라 합니다.

 

소금 호수라고 하니 '롱 롱 타임 어고우' 바다였다고 할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佳人이 알기에는 이 호수는 옛날 맷돌 장수가 소금 맷돌을 옮기다 풍랑에 빠뜨려 지금도 호수 가운데에서

소금을 만들어내는 맷돌이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소금을 활용한 여러 가지 제품을 만들어 팔기도 합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누가 이곳에 잠든 젊은이의 꿈인 고향길을 걷지 못하게 했습니까?

부모님이 계시고 형제자매가 동구 밖까지 배웅했지만,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전사 통지서 한 장이었습니다.

그들이 흘린 피의 색깔이 점점 흐릿해집니다.

아울러 그들의 고마움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고마워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미안한 마음은 지녀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도 이곳 한국공원에 서면 고향 집으로 데려다 달라는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이 모든 희생자가 통일의 훼방꾼이 아니라 자유 평화의 수호자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