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5. 23. 00:18ㆍ터키 여행기/터키여행
점심 식사를 마치면 우리는 버스를 타고 앙카라로 갈 예정입니다.
앙카라는 터키의 수도입니다.
식사를 마치니 오후 1시 10분이네요.
오늘 오후는 내내 이동이고 관광 일정은 없습니다.
터키 여행에서 힘든 것 두 가지 중의 하나가 장거리 이동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 일행은 술탄 아흐메트에서 또 케밥으로 식사합니다.
터키는 동서양의 접목 지역이라 서양의 프랑스 요리와 동양의 중국 요리와 더불어 세계 3대 요리라고 했는데
맨날 케밥입니다.
그런데 우리 입맛에 그렇게 거부감이 없고 먹을 만합니다.
이제 점심을 먹고 앙카라로 출발합니다.
구시가지에 갈라타 대교를 건너 신시가지로 건너가 보스포루스 1교를 건너 아시아 땅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갈라타 대교 위에는 무척 많은 사람이 낚시를 즐기고 있습니다.
터키의 경제상황을 알려면 갈라타 다리에 가서 낚시꾼의 숫자를 세어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경기가 나쁠수록 갈라타 다리 위에 낚시꾼이 많아진다 하는군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앙카라보다는 콘스탄티노플이었던 이스탄불이라는 도시가 더 익숙합니다.
앙카라는 오스만 제국이 막을 내리고 무스타파 케말 파샤가 터키 공화국의 새로운 지도자인 대통령이 되며
지금까지 오랜 세월 수도로 있었던 이스탄불을 버리고 새로운 수도로 앙카라를 선택하고 천도를 결정합니다.
그러나 수도는 옮겼지만, 무스타파 케말 파샤는 많은 시간을 이스탄불에 머물렀으며 돌마바흐체에 집무실을 두고
일을 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도 오스만 제국의 술탄처럼 그곳에 살다 그곳에서 운명하게 됩니다.
터키 사람에게는 영웅이며 국부라는 칭호를 받고 신으로 추앙받지만, 그도 인간이었습니다.
저편에 보스포루스 대교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곳의 교통 체증은 악명이 높다 하네요.
5분이면 통과할 수 있는 다리를 막히면 몇 시간이 걸린답니다.
오징어 장사, 뻥튀기 장사, 음료수 장사, 호두과자 장사가 여기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군요?
케밥장사가 있을까요?
드디어 우리는 유럽에서 아시아 대륙으로 넘어갑니다.
왕복 6차선 도로를 앞에 한국산 차가 나란히 가고 있습니다.
유럽과 아시아를 넘나드는 게 이토록 간단하고 쉽단 말입니까?
사진을 통해 보니 보행자가 다닐 수 있는 보도가 전혀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기에 걸어서 다리를 건너는 일은 금지했다고 합니다.
이 다리도 통행료를 받습니다.
그런데 지금처럼 유럽에서 아시아로 넘어갈 때만 돈을 받고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넘어갈 때는 돈을 받지 않습니다.
현명한 방법이 아닙니까?
오고 가고 모두 받으면 교통체증이 두 배이겠지만, 이렇게 한 번만 받으면 그것 또한 줄일 수 있겠지요.
넘어간 차가 언젠가 다시 와야 하기에...
아시아 지역 톨 게이트 앞에는 "WELCOME TO ASIA"라고 환영 인사를 하는군요.
佳人이 아시아 사람인 걸 누가 알렸나요?
천기누설입니다.
터키어로는 '아시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고 썼을 것 같습니다.
터키도 우리와 어순이 같다고 했으니...
오늘 앙카라까지 5시간 30분이나 걸린다고 합니다.
오늘 가야 할 길의 지도입니다.
터키에 3곳인가밖에 없는 고속도로 중 하나가 앙카라와 이스탄불을 잇는 고속도로입니다.
가는 도중에 왼편에 한국의 현대 기아 자동차 공장이 있으며 우리 가이드도 처음 현대자동차에 근무하러 왔다가
돈벌이가 좋은 가이드를 시작했다 하네요.
가는 길이 너무 지루하니 3중 성벽으로 철옹성을 자랑하던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이 AD 330년 처음 이곳을
수도로 정하며 오스만 제국의 공격으로 1.453년 어떻게 패망하게 되었나를 생각해 봅니다.
수도로 1123년간이나 유지되다 운명을 다하고 역사 이야기로만 남게 된 그 마지막 순간을 생각해 봅니다.
지루하니까 당시 죽었던 사람을 살려내어 물어보며 이야기나 나누면서 가면 어떻겠습니까?
현명한 사람은 자투리 시간에도 사색하고 정진을 한다는데 佳人은 엉뚱한 생각만 하는 게 다른 점입니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결론적으로 발상의 전환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발상의 전환이란 바로 배가 산을 넘었다는 어이없는 사건이지요.
삼면이 바다로 천혜의 요새인 이곳에 아무리 강한 오스만 제국이라도 쉽게 점령한다는 일은 녹녹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비잔틴 제국은 사실 모든 영토를 잃고 콘스탄티노플 외 몇 곳만 유지되던 도시국가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미 해협 건너에는 오스만의 술탄이 성을 쌓아 군대를 주둔시키며 호시탐탐 술탄 아흐메트 지역을 노려보고
있었고 바다를 면한 곳은 오래전부터 쌓아놓았던 테오도시우스 성벽이나 골든 혼과 마르마라 해에 있던
성벽은 철옹성입니다.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 위해 헝가리 사람인 우르반을 고용해 사상 최대 사거리의 대포를
만들어 첫 전투인 4월 2일 부활절 다음날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대포로 함락시키는 일이었습니다,
대단한 대포였지만, 정확성에서 떨어지고 다시 포탄을 장전하여 쏘는 시간이 길어 일부 파괴된 성벽은
그 사이에 다시 쌓아 보강하여 올렸다 하네요.
가장 좋은 방법은 골든 혼으로 함선을 통해 병사를 투입하여 가장 약한 곳을 공략하는 게 수월했지만,
오스만 제국은 수전에 약한 유목민입니다.
세상에 가장 강력한 군대였다는 칭기즈칸의 몽골군도 수전에는 약했다지요?
게다가 골든 혼 입구에 이미 비잔틴 제국에서 오래전부터 굵은 쇠줄로 막아 놓아 배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바다 쪽에서 성벽 밑으로 땅굴을 파기도 했지만, 이마저 발각돼 오히려 큰 손실을 보기도 합니다.
이 방법은 술탄의 처남인 덜수장군이 제안하고 큰소리치며 출진했지만, 결과적으로 부하는 다 죽이고
혼자만 살아 돌아왔습니다.
처남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잘라버렸을 텐데...
방법은 가장 취약하다고 판단되는 골든 혼 안으로 들어가 우회하는 방법 외에는 없지만, 쇠사슬로
배가 들어갈 수 없고 더군다나 해전에는 전혀...
정말 난공불락입니다.
20만에 가까운 병사로 7천을 이길 수 없습니까?
술탄은 환장하겠습니다.
그러나 21세의 젊은 술탄인 메흐메드 2세는 단순무식한 방법을 지시합니다.
배를 끌고 산을 넘어가는 방법입니다.
세상에... 미쳤어 정말 미쳤어..
단순무식의 종결자 메흐메드 2세라고 하겠지만, 발상의 전환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게 됩니다.
어설프지만, 지도를 참고하시면 아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니 지금의 돌마바흐체 궁전이 있는 곳에서 갈라타 탑을 돌아 골든 혼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곳의 파란 선이 취약한 방어선이고 해안 쪽의 빨간 선을 철옹성과 같은 난공불락입니다.
방법은 기름칠한 통나무를 바닥에 깔아놓고 74척의 배를 끌고 밀며 골든 혼(금각만) 안으로 넘어가는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5월 24일은 보름달이 뜨는 날입니다.
그런데 마침 개기월식이 일어나자 비잔틴 제국이 멸망할 징조라는 소문이 돕니다.
이를 후세 역사학자들은 '피의 그믐날'이라 한답니다.
원래 옛날에는 이런 단순한 자연현상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위의 사진 속의 쇠사슬이 바로 뱃길을 막았던 역사의 쇠사슬이라고 합니다.
금각만 안쪽에 있던 비잔틴 병사는 설마 골든 혼으로 배가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 여겼는데
오스만 제국의 배가 나타나니 얼마나 놀랐을까요?
"서프라이즈!" 하며 아마도 식겁했을 겁니다.
이로써 사기가 떨어진 비잔틴 군은 풍전등화의 신세가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겁니다.
골든 혼을 막았던 쇠사슬에는 통나무를 끼워 쇠사슬이 물에 뜨게 하였답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21살의 어린 술탄은 배를 끌고 산을 넘으라 합니다.
이 단순 무식한 전법으로 그는 정복자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5월 29일
술탄은 총공격을 명합니다.
1차 5만의 군대로 수차례 공격으로 비잔틴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지치게 한 후
2차로 정규군인 아나톨리아 군단이 밀어붙이자 드디어 철옹성이라 자랑하던 성벽이 일부 허물어지기 시작합니다.
이어 술탄의 정예병인 예니체리 군단이 쓸고 들어가며 전쟁은 끝이 나게 됩니다.
젊은 술탄 메흐메드 2세는 성안으로 들어가 환호하는 병사들 앞에 칼을 높이 들고 외쳤을 겁니다.
뭐라고요?
신은 알라 외에는 없다고...
佳人이 옆에 있었다면 물어보았을 겁니다.
"왜 그랬어?"
메흐메드 2세는 한 마디로 이렇게 대답했을 겁니다.
"인샬라!"
이 사람들은 할 말이 없으면 인샬라라고 하나 봅니다.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11세...
그는 처음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 콘스탄티누스 1세와 공교롭게도 이름이 같습니다.
그는 그날, 성 소피아 성당에서 마지막 미사를 마치고 나오자 이미 성벽 망루에는 비잔틴 제국의 깃발이 내려지고
오스만 제국의 붉은 깃발이 펄럭이는 모습을 보며 제국의 운명이 다했음을 눈치챕니다.
눈을 돌려 바라보니 그렇게 믿었던 성문은 이미 열렸으며 그 문으로 오스만 제국의 튀르크 병사들이 파죽지세로
물밀 듯이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며 황제의 상징인 주황색 망토를 벗어던지고 바로 곁에 있던 호위병
두 명만 거느리고 말을 몰아 오스만 제국의 병사 속으로 달려가 산화함으로 비잔틴 제국은 막을 내립니다.
왜 두 명은 옆에 있다 끌려갔을까요?
약 두 달간의 지긋지긋한 전투가 막을 내리는 순간입니다.
20만 명에 가까운 오스만 제국의 병사들은 비잔틴 제국의 병사와 용병을 합하여 겨우 7천 명의 방어군을
향하여 대규모 공세를 취함으로 이미 이 전쟁은 결론이 났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고 화려하게 한 시대를 풍미한 로마제국이 역사책으로 들어가 버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성 안으로 밀어닥친 오스만 제국의 병사들은 비잔틴 패잔병과 시민을 막무가내로 학살하기 시작합니다.
이슬람 율법에 전쟁에서 승리하면 병사에게는 노고를 위로한다는 의미로 3일간의 약탈이 허용되기에...
이 모습을 지켜본 비잔틴의 많은 시민은 피난처로 모두 성 소피아 성당 안으로 몰려 들어갑니다.
비잔틴의 시민은 오래전부터 믿음이 있었습니다.
큰 난이 일어나면 성 소피아 성당으로 피난하고,
대피하면 성당의 천장에 있는 미카엘 천사가 나타나 적을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몰아버린다는 믿음입니다.
콘스탄티노플 시민은 그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거대한 성 소피아 성당은 피난 온 시민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들은 성당의 청동 대문을 잠그고 무릎을 꿇어 기도하며 천사의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가장 먼저 성당을 찾아와 청동 문을 부수고 들이닥친 사람은 구원의 천사가 아니라 피의 학살을 준비 중인
튀르크 병사였습니다.
이내 성 소피아 성당 안은 아비규환, 생지옥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사제와 일부 시민은 함께 찬송가를 부르며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했습니다.
잠시 후
성 소피아 성당 안은 더 이상 소란도 없이 긴 침묵만 흐르며 5월 29일의 밤을 맞이 합니다.
처음 이 도시의 이름은 그리스 사람이 정한 비잔티움이었습니다.
그 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이곳으로 수도를 정하고 옮겨올 때 이름은 새로운 로마라는 뜻의 Nova Roma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콘스탄티누스의 이름을 딴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지역적인 이점인 동서양의 교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천 년도 넘게 지속하게 되었지요
그러나 중앙 아나톨리아를 튀르크 족에게 빼앗긴 후부터 말을 훈련하고 군대를 조련할 수 없어 이미 싸움을
처음부터 무리였지만, 워낙 철옹성인 3중 성벽으로 7천의 병사로 20만에 가까운 훈련된 튀르크 병사에
맞설 수 있었던 겁니다.
이제부터 오스만 제국이 그 부를 이어받게 생겼습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모든 교류를 독점함으로 유럽은 새로운 교역로를 뚫어야 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콜럼버스에 의한 신대륙이 발견되고 중세는 비잔틴 제국의 멸망과 함께 막을 내리며 새로운 항로에 의한
또 다른 세계는 중남미의 식민지화와 약탈로 이어지며 새로운 질서가 생기게 됩니다.
하나의 제국이 탄생하며 세상은 신대륙의 발견과 신민지 경영에 너도나도 뛰어드는 또 다른 풍조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오스만의 21살 젊은 술탄인 메흐메드 2세는 하루 만에 약탈을 중지하라 명령합니다.
그 이유는 이 도시를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사용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입니다.
약 두 달간의 신물 나는 공격에도 건재했던 도시인 콘스탄티노플이 내심 욕심이 났던 것입니다.
비록 나이는 어려도 똑똑해요.
이 도시의 견고함은 오스만 제국의 앞날에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비록, 나이가 어리지만, 젊은 술탄은 이렇게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직 콘스탄티노플의 地氣를 느꼈던 모양입니다.
무엇보다는 동양과 서양의 문물이 상충하는 곳이지만, 오히려 이용하면 양쪽의 문물을 모두 받아들여 세상을
아우를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고 국제적인 장사로 부를 움켜쥘 수 있다는 것까지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5시간 반이 훌쩍 지나 7시가 다 되어 이스탄불에서 440km 거리인 앙카라에 도착했습니다.
장시간 버스여행이 지루하다고요?
두 달간의 전쟁을 머릿속으로 그리다 보면 몇 시간은 금방 지나갑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佳人의 머릿속에는 콘스탄티노플의 공방전을 생각했습니다.
엄청난 전투를 마음속에 하며 왔습니다.
배도 산으로 끌어올렸으니 제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제가 오늘 너무 많은 사람을 보냈나 봅니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도 화랑 관창처럼 장엄하게 보내버렸습니다.
단기 필마로 적진 속으로 뛰어들어가라 했습니다.
관창은 전세를 뒤집기 위해 산화했지만, 황제는 제국과 자신을 그냥 끝장내려고 돌진했습니다.
시민과 용병 7천 명도 모두 보냈습니다.
물론 공격군인 오스만 제국 술탄의 병사도 많이 함께 보냈습니다.
선업을 쌓아야 나중에 좋은 곳으로 갈 텐데 오늘 몇 시간 동안 佳人은 수만 명을 보냈습니다.
천국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세요.
저는 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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