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5. 10. 00:04ㆍ터키 여행기/터키여행
처음 성당으로 만들 때 창문은 예루살렘을 향하게 하였고 후에 오스만 제국이 접수하고
재활용할 때는 제단을 메카 방향으로 만들었기에 눈여겨 살펴보면
전혀 대칭이 맞지 않는 이상한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佳人 눈에 이상하게 보였다면, 모든 사람이 똑같이 느꼈을 겁니다.
이스탄불 자체가 동서양이 만나고 그 도시의 아야 소피아도 두 종교가 만나니 좋은 일이겠지만.
가장 사랑이 충만한 두 종교가 만나면 너 죽고 나만 살자는 전혀 아름답지 않은 일이 벌어집니다.
세상은 이렇게 이질적인 것이 모여 또 하나의 질서를 이루나 봅니다.
그런데 역사에 기록될 이 멋진 건축물을 지은 사람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튀르크 족의 터키 정부는 왜 입장료를 받나요?
그저 어느 날 선조가 총칼을 앞세우고 밀고 들어와 안방을 차지하니 후손은 행복합니다.
그렇지만은 않군요?
선조가 부수지 않고 보존했으면 리모델링 비용까지 냈습니다.
그런데 리모델링이라면 개선되어야 하는 데 훼손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오스만 제국이 사라질 때 유럽의 기독교 단체와 그리스에서
아야 소피아를 돌려 달라고 했다네요.
그래서 아타튀르크 대통령이 성당도, 자미도 아닌 박물관으로 만들고 관리 중이랍니다.
이제 도시 이름도 콘스탄티노플에서 이슬람의 땅이라는 의미의 이스탄불로 바뀌며
성당도 자미라는 모스크로 변하며 성당보다는 소피아사원으로 불리다 이제는 아야 소피아라는
박물관이 되었는데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비잔틴 건축물의
세계 최대이며 최고라는 걸작 중 걸작이었을 겁니다.
비잔틴 제국이 세워지고 그 후 537년 12월 27일....
무려 5년 10개월 만에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폼 나는 성당 하나를 지으라 함에
돔 형태의 웅장한 성 소피아 성당이 세상에 얼굴을 보입니다.
가운데에는 기둥조차 없는 지금까지 유례가 없는 걸작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천장을 바라보니 누가 얼굴을 내밀고 우리를 내려다봅니다.
가브리엘 천사인가요?
"귀나이든~"
여기는 부끄러워 숨어버렸군요?
여기도 가운데를 벗겨 내면 누가 나올 것 같네요.
아마도 미카엘 천사가 나오지 않을까요?
콘스탄티노플이 무너지던 날, 많은 비잔틴 사람이 이곳으로 피난 왔습니다.
그들의 믿음에는 천사가 나타나 악당을 모두 마르마라 해에 빠뜨려 버린다고...
그러나 잠긴 성당의 문을 부수고 들어온 것은 천사가 아니라 알라만 외치는
무장한 피에 굶주린 오스만의 군사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사제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살아생전 마지막 찬송가를 부르며 하나씩
죽어갔을 것이며 지금 佳人이 서 있는 대리석 바닥은 살려달라는 콘스탄티노플의
선량한 시민의 아우성만 들렸고 그들이 죽어가며 흘리는 피로 말미암아
대리석 바닥은 흥건히 적셔졌을 겁니다.
그래요 가장 신성한 신의 제단 앞에서 가장 해서는 안 되는 무차별 살해가 자행되었을 겁니다.
앞으로도 쉽지 않은 이 건축물은 기술에서도 뛰어날 뿐 아니라 웅장하고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그러니 주변과 2층에는 모두 107개의 기둥이 돔을 받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둥은 사실 로마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빼내 온 것이라고 하니
기둥 빠진 그곳 건물은 어찌 되었을까요?
너 죽고 나 살자는 말이 아닙니까?
이미 죽은 놈을 빼 왔기에 괜찮다고 하네요.
처음 성당 낙성식에 황제는 얼마나 감동을 먹었을까요?
그놈의 체면 때문에 아랫것들 앞에 낄낄거릴 수 없어 아마도 화장실에 들어가
혼자 실컷 웃었을 겁니다.
그리고 낙성식 장에 들어서며 "예루살렘의 대성전을 지으신 위대한 솔로몬 대왕이시여~
내가 당신을 이겼소! 끄~ 하하하~"라고 하며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고 하네요.
이 이야기는 아마도 구약 열왕기상 6장 2절에 나온 이야기를
염두에 둔 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황제 이시여~
기껏 생각해낸 것이 겨우 다른 사람과 비교해보는 게 전부였나요?
왜 이러셔요~ 세상에는 당신보다 솔로몬 대왕이 훨씬 더 많이 알려졌거든요?
그래 비교해보니 행복하셨나요?
아마도 열등감 속에서 자랐나 봅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문이 황제의 문입니다.
자기만 드나들려고요.
가운데 황제의 문은 노아의 방주에서 뜯어온 나무로 문을 만들었다고 했지만...
황제의 문 좌우로 하나씩 문이 있는데 그것은 고위관리가 드나드는 문이고 일반인은
끝쪽에 좌우로 세 개씩 더 있는데 그곳으로 드나들었다 하네요.
차라리 "오! 신이시여~ 제가 진정 이것을 만들었나이까?"
"어이~ 유 서방! 자네가 만든 게 아니고 만들라고만 했쪄~"
저도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정말 대단한 건축물입니다.
그가 기획하니까 이런 역사에 남을 건축물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유 서방 홧팅~
유스티아누스 황제라고 했으니 유 서방이라고 불러도 되겄쮸?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궁중 시인인 파울루스는 소피아 대성당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고
하며 "동쪽의 반원과 서쪽의 반원에 의해 형성되는 성당의 중심부 주변에는
네 개의 힘찬 석재 피어(pier:지반을 뚫어 지상과 지하실에 걸쳐 기둥 모양으로 만든 지정)가
서 있으며, 이들로부터 거대한 아치가 무지개의 여신 아이리스의 활처럼 솟아오르고 있도다.
이 아치들은 공중으로 서서히 솟으면서 서로 떨어져 나가게 되며 그 사이의 공간은 놀라운 기술로
채워지고 있고 벽면은 아치에 접하면서 계속 펼쳐져 아치 상부에서 하나로 합쳐진다.
돔의 기단부는 거대한 아치에 고정되어 있으며, 이 돔은 마치 광휘에 뒤덮인
천상과도 같이 성당을 감싸고 있다."
푸~ 하하하~ 궁중 시인이라면 지금의 국가 홍보처가 아닙니까?
뭐 어려운 말로 이야기했지만, 쉽게 말하면 "뷰티플과 인크레더블"이라는 말입니다.
맞쮸?
안테미우스는 이 성전에 들어가 위를 올려다보면 마치 돔의 모습이 하늘을 쳐다보는 것처럼
느끼게끔 하기 위해 당시로는 파격적으로 어머어머 하게 크게 돔을 만들었으며 돔 아래쪽에는
창문을 만들어 놓아 햇살이라도 비추면 그 모습이 하늘의 빛이 성당 바닥에 이르는
환상적인 효과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어디 좋은 일만 있겠습니까?
원래 이 동네가 지진이 자주 나는 동네잖아요.
553년, 557년, 559년 세 번에 걸친 지진이 이 지역을 강타하니...
그 멋진 돔이 그냥 무너집니다.
황제는 약이 올라 원래보다 2.65m 나 더 높여 만들었다 하네요.
그게 바로 지금의 모습이라 합니다.
정말 한 성질 하는 황제인가 봅니다.
이 건물이 지진에 강한 이유는 내진설계입니다.
건물을 짓고 공간을 두고 내부의 벽을 붙였습니다.
석재도 그냥 올려 쌓은 게 아니고 사이사이 완충 역할을 하는 건축재를 사용했기에
오랜 세월을 견디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탄불에는 지진이 나면 아야 소피아로 피난하라는 말이 있답니다.
이렇게 좋은 세월 보내다가 황제와 맞먹는다는 술탄이라는 이슬람의 지도자가 3중의 성벽으로
요새와 같던 이곳을 공격해 방 빼라고 합니다.
그날은 세상이 울고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습니다.
골든 혼이라는 灣에는 마지막으로 저항하던 비잔틴 시민이 패망하는 조국을 바라보며
너도나도 금붙이를 버리는 바람에 아직도 해가 저무는 저녁이 되면
바다가 금빛으로 빛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골든 혼이라는 金角灣이라고 한답니다.
저녁노을이 황금빛으로 빛나는 이유만은 아닌 겁니다.
그래도 아야 소피아는 워낙 잘난 놈이라 파괴하지 않고 술탄이 리모델링하라고 합니다.
선견지명이 있는 친구로군요.
딱 쳐다보니 모스크로 사용하기에 부족함이 없고 조금만 손을 보는
리모델링으로도 큰 효과를 보게 생겼거든요.
그래서 미흐랍(메카 방향을 나타내는 아치형 벽관)과 바깥으로는 의미도 알 수 없는
미나렛이라는 첨탑을 그것도 네 개씩이나 세우더니 그 아름답던 내부는 모자이크가 우상이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처음에는 천으로 덮었으나 메흐메드 2세의
증손자인 술레이만 2세 때 누런 회칠로 도배를 해버렸습니다.
첨탑이 네 개라는 말은 술탄이 관리하는 사원이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비잔틴 시대에도 아야 소피아를 보수하며 에페스와 그리스나 로마의 신전에 있는
석재를 가져와지었으니 이미 먼저 재활용한 것이기도 하다는군요.
회칠로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 위에 금칠로 알라를 외치는 구호로 덮어버렸습니다.
이제 속이 시원해지셨나요?
그러다 1832년 미국인 학자인 토마스 휘트모어가 회칠을 벗겨 내고 그 안에 성화 일부를
발견하자 기독교인들이 꼬리를 물고 성지순례를 하는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습니다.
질긴 놈이 살아남습니다.
보이세요?
회칠을 벗겨 내니 그 안에 아름다운 모자이크가 얼굴을 내미는 모습이...
성당의 용도로 지은 건물을 모스크로 사용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은
모든 종교가 그 근본은 같다는 의미입니까?
그런데 왜 성직자는 그렇게 싸우나요?
결국, 신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됩니까?
지금도 일부에서는 신을 이용해 치부나 하고 욕심만 채우는 사람이 아직 있나요?
왜 자기의 신을 앞세워 서로 미워하나요?
남을 배려하지 않는 삶은 아름답지 않다고 맨날 설교하면서...
주먹을 쥔 손과는 악수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서로 주먹을 쥐고 악수하려는 듯 보이네요.
마을을 열지 않은 종교 간에는 세상의 화합과 평화는 요원한 일인가 보네요.
술탄의 시대가 끝나고 무스타파 케말이라는 터키의 국부인 아타튀르크가 원래대로
복원을 하려 하자 모슬렘은 지금까지 성당을 모스크로 리모델링하여 잘 사용하는 것을
건드리지 말라고 벌떼처럼 일어나니
아타튀르크는 1935년 2월 1일 그럼 그냥 접수한 건물이니까 너희도 사용 금지하라 하고
박물관으로 하라고 하여 그때부터 아야 소피아는 박물관으로 변했다네요.
참 잘했어요.
누구?
아타튀르크 가요.
아야 소피아를 나오니 예전에 자미라는 모스크로 사용할 때 예배에 참여하기 전에
모슬렘이 손과 발 그리고 얼굴을 정갈하게 씻는 장소입니다.
이것을 샤르드반이라고 부른다는군요.
그냥 수도전이지만, 주변을 조각하여 아름답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아야 소피아를 위시해 모든 유적의 실내에서는 카메라 삼각대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가져가지도 않았습니다.)
어두워 ISO를 높여 찍다 보니 사진이 거칩니다.
아야 소피아 건물 밖에는 언제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르는 유적이 뒹굴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그냥 돌이 됩니다.
십자가가 조각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오스만 제국이 오기 전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은 처지가 이리되었지만,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이 아야 소피아보다 크지만,
아야 소피아보다 약 천 년이나 늦게 지어진 것을 보면 아야 소피아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 알 수 있습니다.
벌써 佳人이 밖에 나왔습니다.
사실 이곳은 하루 종일 찬찬히 살피며 보아도 될 곳이지만, 함께 떠난 여행은 이래서 아쉽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가 그냥 나오고 말았습니다.
이래서 다시 한번 더 찾아가기로 결심합니다.
아~ 길 잃은 양인가요?
양은 예수의 열두 제자인 12 사도를 의미한다 하네요.
어디로 갑니까?
佳人도 길잃은 양이되어 어디로 갑니까?
가이드는 어디로 가고 없습니다.
이런 잔해물은 두 번째 지었던 성당이 지진으로 무너지며 남은 것이며 새로 지을 때
대부분 에페스에 있는 아르테미스 신전과 그리스 등에서 기둥을 가져다 지었다 하네요.
아야 소피아는 월요일에 휴관합니다.
이제 우리는 비잔틴 시대에 전차 경기장이었던 히포드롬과
실크로드의 마지막 종착지였던 그랜드 바자르라는 시장으로 갑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그래도 세월이 지나니 안에 숨어 있던 화려한 모자이크가 하나 둘 얼굴을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 둘 부활하고 있지만, 회칠한 것을 긁어내기가 쉽지는 않겠지요?
이렇게 서로 남의 집에 난입하여 셋방살이하며 수난의 세월을 보낸
아야 소피아는 이제 조용히 살아 갈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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