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5. 7. 00:17ㆍ터키 여행기/터키여행
우리의 터키 여행의 첫 발자국은 이스탄불의 아야 소피아라 부르는 성 소피아 성당입니다.
아야라는 말을 성(聖)을 뜻하는 Aya와 지혜를 뜻하는 소피아(Sopya)란 말이 합쳐져
성스러운 지혜란 뜻의 아야 소피아 성당이 된 것이라고 하네요.
이미지 출처 : Greatistanbul,com
비잔틴 제국 시절 원래의 이름은 아기아 소피아(Hagia Sophia)로 같은 의미라고 하네요.
아마도 이스탄불 뿐 아니라 터키의 대표선수가 아야 소피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이 많다고 대표를 하는 것은 아니지요.
능력이 우선입니다.
537년 동로마 제국인 비잔틴 제국 때 건설되어 오스만 제국에 그 운명을 다할 때까지
916년간 성당으로 사용되다가 다시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1934년까지 481년 동안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어졌습니다.
파란만장한 아야 소피아는 터키 공화국의 아타튀르크 대통령에 의해 아야 소피아 박물관으로
제3의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지금까지 1.500여 년을 버티며 살아남아 지금도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건축물.
우리나라의 건축문화는 대부분 목조 건축이기에 화재에 취약하여
버티기 어려운 세월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의 역사는 종교와 전쟁의 역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역사적인 유물 대부분이 종교와 전쟁에 관련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전쟁과 종교가 만나고 서로 얽혀 있으면 더 재미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돌아보는 아야 소피아라는 곳이 바로 대표적인 곳이 되겠네요.
성 소피아 성당의 전경입니다.
미나렛이라는 첨탑이 네 개지만, 그 모양이 모두 다릅니다.
그 이유는 첨탑을 만든 술탄이 한 사람이 아니고 시대에 따라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를 "네 마음대로 하세요!"라고 한다지요?
4개의 첨탑은 술탄의 자미(모스크)라는 의미입니다.
이슬람의 자미와는 아무 관계가 없이 지어진 것이지만,
이렇게 메흐메드 2세에 의해 관계를 맺게 되었네요.
아야 소피아...
이름을 잘 지었나요?
정말 어려운 역경을 잘 이기고 지금까지 살아남았으니까요.
전쟁과 종교의 바뀜과 화재 그리고 지진의 공포에서도 1.500년을 지내며
지금까지 살아남아 우리를 반겨주네요.
그래도 성 소피아 성당은 기구한 운명의 성당이 아닌가요?
처음 지었던 바실리카 양식의 목조 건축물은 404년에 시민 폭동에 의해 소실되었고,
테오도시우스 2세가 같은 자리에 두 번째 교회가 지었으나 이것도 532년 시민의
폭동에 의한 화재로 소실되고 맙니다.
믿음이 부족했나요?
왜 자꾸 이런 일이 생긴 답니까?
목조 건축물의 한계가 아니겠습니까?
이제 안으로 들어가 볼까요?
현재의 성 소피아 성당은 소실된 교회보다 더 큰 교회를 짓고 싶어 했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527-565)에 의해 당대 최고의 건축가인 밀레토스의 이시도스로스와
트랄레스의 안테미우스를 초빙하여 6년여간의 공사로 지어졌다고 하네요.
지금도 6년 만에 이런 건축물을 짓기 쉽지 않겠습니다.
대한민국 건설회사라면 모를까...
그런데 이런 건물이 지은 지 천 년도 넘었다니...
천 년의 세월은 인간에게는 무척 긴 세월이 아닙니까?
힌두교에서도 유해 교반을 통해 천 년을 돌리고 또 돌려 영원의 생명수인
암리타가 만들어지는 시간이 아닙니까?
그러니 암리타가 완제품 하나와 반제품 하나가 탄생하는 시간이니 얼마나 긴 시간입니까?
이제 안으로 들어와 또 다른 문 앞에 서서 안을 들여다봅니다.
규모와 아름다움에 입이 떠어 억~
정말 살짝 들여다본 느낌이...
위의 사진에 보이는 문이 비잔틴의 황제만 드나들었다는 황제의 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개나 고양이도 드나드는 문입니다.
정말 안에는 고양이가 많습니다.
입구를 들어서 양쪽을 이어지는 복도의 천장을 올려다봅니다.
성 소피아 성당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주로 보고 다녀야 하기에
목 디스크가 있는 분은 곤란하겠군요.
지붕의 저 누런 색의 회벽을 벗겨 내면 아마도 아름답고 찬란한 모자이크로 된
그림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오스만 제국이 이곳을 함락하고 이 성당을 부숴버리지 않고 재활용하여
모스크라고 하는 자미로 사용했다 하네요.
그러기 위해 기독교의 냄새를 없애기 위해 건물 내부를 모두 회칠로 덮어버리고
이슬람 문양으로 도배했습니다.
그러나 우선 2층부터 둘러봅니다.
시간이 많지 않기에 2층은 1층보다 일찍 문을 닫는다 하네요.
우리가 이곳에 도착한 시간이 이미 5시가 되었습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길은 어두컴컴한 미로와도 같은 길입니다.
계단을 설치하지 않고 램프 형태로 오르내리게 했습니다.
여자의 긴치마가 밟히게 되면 계단은 위험하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2층은 여성을 위한 예배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와우~ 대단합니다.
아름답습니다.
천장에서부터 천천히 눈길을 아래로 내리깔며 바라봅니다.
佳人은 종교가 없지만, 이런 곳에 서서 바라만 보아도 신의 존재가 느껴집니다.
순간 소름이 돋습니다.
몸서리가 쳐집니다.
지금 佳人이 서서 사진을 찍는 이 자리는 비잔틴 제국의 황후가
예배를 보았던 자리라고 했나요?
1층에서 예배 보는 것보다 더 멋질 것 같습니다.
황후라도 여자는 무조건 2층이었나 봅니다.
저 앞의 황금빛 설교단을 자세히 보시면 중앙 정면이 아니고 바라보는 방향에서
왼쪽으로 틀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땅은 네모나고 하늘은 둥글다.
그때 누구나 생각했던 천원지방이라는 天地觀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재판도 받던 시절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성당이란 네모난 건물 위에 둥근 돔 모양의 지붕을 얹음으로 그 이상이
실현되었는데 하늘과 땅을 이 건물에 담았습니다.
이게 바로 우주관에 입각한 건축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지구가 둥글다고 하면 경을 쳤던 시기였으니 말입니다.
비록, 잘못된 천지관이지만, 그랬기에 이런 사각의 건물에 둥근 돔을 얹은
멋진 건축물이 탄생한 게 아니겠습니까?
바닥에서 천장의 중앙 돔까지 높이가 56m인 15층 건물의 높이라고 하고
돔의 지름만 31m로 중앙 기둥도 없이 지진도 견디며 지내온 것이
기적에 가까운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2층 갤러리에서 내려다본 관경은 아찔합니다.
약 천여 년 간 비잔틴의 성당으로 500여 년 간 오스만의 모스크로...
돔의 지붕은 로도스 섬에서 만든 가벼운 벽돌로 만들었다고 하네요.
정말 가운데 돔을 지탱하는 기둥이 없고 밖으로만 기둥을 설치했습니다.
동로마 제국인 비잔틴 제국은 그리스의 정신을 바탕으로 로마의 육신으로 동방의
영혼을 받아들임으로 세 곳이 용광로처럼 이곳에서 서로 얽혀
그 아름다운 시대를 풍미했습니다.
그중 최고의 유산이 아야 소피아라 불리는 성 소피아 성당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정복자는 이 아름다운 건축물을 빠셔 버리지 않고 재활용하는 아름다운 결정을 했습니다.
이런 것으로 말미암아 이미 지정학적으로도 완벽한 걸작이
이스탄불에 탄생한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佳人 혼자만의 생각인가요?
아라비아 글자로 쓴 커다란 둥근 걸개는 이슬람의 유명한 선지자의 이름이라고
하는데 佳人은 누가 라면 먹다가 던져놓은 지 알았어요~
오스만 제국 시절까지는 아라비아 문자를 사용하였지만, 아타튀르크가
터키 공화국을 세우면서 문맹률이 높은 아라비아 글자를 버리고 독일과 프랑스
언어학자에게 알파벳을 차용하여 튀르키에의 언어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베트남과 비슷한 경우가 되겠네요.
비잔틴 제국은 이제 그 수명을 다하여 바람 앞에 촛불의 신세처럼 간당거리는
로마 제국을 살리기 위해 AD 330년 콘스탄티누스가 새로운 로마를 만든다고
그리스에 의해 만들어진 비잔티움이라는 도시를 접수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명명함으로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졌습니다.
그 후 천 년도 넘게 이어온 비잔틴 제국은 "피의 그믐달"이라고 부르는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제국의 21살 먹은 젊은 술탄인 메흐메드 2세에 의해
그 아름답고도 찬란한 역사를 뒤로하고 이 세상에서 조용히 사라집니다.
한때 세상의 우등생도 세월이 흐르면 열등생이 되고
그 막이 내리면 아름다운 퇴장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 1453년 5월 28일 콘스탄티누스 11세의 마지막 예배를 끝으로 이 건물은
이슬람 사원이 되고 마는 기구한 운명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 했습니까?
역사도 이렇게 새로운 세상을 위해 묵은 세상은 조용히 자리를 넘겨주게 되나 봅니다.
1123년 간이라는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장구한 세월을 견디어 온
비잔틴 제국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때 단 7천 명이 채 안 되는 용병으로 이루어진
병사로 오스만의 20만에 가까운 대군을 맞아 두 달 가까이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장말 끈질기게 버텼습니다.
칼과 활을 잡은 손에서 피가 흐르고 상처가 곪아 들어가도
아프다는 소리도 하지 못하고 버텼습니다.
계백 장군도 적은 수의 군사로 악전고투했지만, 대책이 없었잖아요.
아무리 천하의 요새라는 3중의 철옹성의 테오도시우스 성벽도 많은 숫자의
오스만 군의 무력에는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지금의 술탄 아흐메트 지역에는 누구도 감히 쳐들어올 수 없는 3중의 성벽이
위의 사진에 보듯이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지만, 캄캄한 그믐날을 틈탄
오스만 제국의 대군 앞에는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젠장! 피를 토하고 가슴을 쥐어뜯는다고 영광의 로마 제국이 다시 돌아올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를 보아야 평화가 찾아옵니까?
지금도 남아 있는 그때의 3중 성벽이 佳人이라는 나그네에게
잠시나마 옛날로 돌아가게 합니다.
들리세요?
그때의 함성 소리가..
기어오르려는 자와 못 오르게 막는 자... 창칼이 부딪치는 쇳소리가 들리십니까?
그리고 보이십니까?
저는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습니다.
세월은 佳人을 역사의 귀머거리로 만들었습니다.
역사의 소경으로 만들었습니다.
모든 게 꿈과 같고 화려했던 영광은 한낱 마르마라 해를 불어 지나가는
구름이며 바람이 되어버렸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한가로이 날아다니는
저 갈매기는 그때의 혈전을 기억할까요?
수많은 젊은이가 돈 몇 푼에 용병으로 이곳에 와 목숨을 버릴 정도의
가치가 있었던 전투였던가 생각해 봅니다.
용병을 이끌던 사령관도 도주를 한 마당에...
과연 스러져가는 비잔틴 제국을 위하여 목숨과 바꿀 가치가 무엇이었을까요?
명예도 아니었고, 조국도 아니었습니다.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바다가 피로 물들어 벌건 바다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새로운 문명과 역사란 이렇게 피를 먹고 자라나 봅니다.
영광의 로마인이라는 자부심도 세상에서 가장 교양 있고 문명인이라는 우월감도
성벽을 넘어온 오스만 제국의 대군 앞에는 허울뿐인 껍데기에 불과했습니다.
드디어 성문이 열리고 밀어닥치는 오스만 제국의 대군 앞으로 황제의 상징인 붉은색의
망토를 벗어던지고 콘스탄티누스는 몇 명의 근위병만 거느리고 무모하게
오스만 군대 가운데로 돌진함으로 세상의 기억 밖으로 사라집니다.
그 후로 황제는 돌아오지 않았으며 황제를 보았다는 사람도 없습니다.
하늘의 별이 되어 산화함으로 아름다운 퇴장을 하고 말았습니다.
아야 소피아가 대단히 잘생긴 건축물이라 내일 하루 더 보고 가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정말 대단한 건축물입니다.
지금의 기술로 만든다 해도 쉬운 일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자재의 많은 부분을 그리스나 로마, 그리고 에페스와 같은
무너진 신전에서 가져와 만들었다 합니다.
기둥의 두께나 높이, 색깔이 모두 다를 텐데...
사실 다릅니다.
그게 바로 세상이 용광로 같은 이곳인 이스탄불의 힘입니다.
그중에도 아야 소피아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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