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5. 18. 09:16ㆍ佳人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사마천의 사기
사실 흉노니 동이니 하며 비하하는 것은 중원의 역사관이지 다른 사람에게는
모두 대등한 관계여야 합니다.
인간은 어느 민족이나 생김새는 조금 다를지언정 36.5도의 같은 체온의 피가 흐릅니다.
지금까지 흉노니 뭐니하며 만리장성 너머에 살았던 민족을 비하하는 행위는 그런 중화사상에
쩔은 사람에게 교육받았고 식민사관만 신봉하는 사람에게 우리가 배운 역사의 잔재이기에
이제는 그런 생각은 개나 줘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화하이적(華夏夷狄)이라고 중원과 나머지 오랑캐라는 이분법을 이르는 말이지요.
편 가르기와 다른 민족을 비하하는 그런 표현을 중국은 평등을 외치고 공정을 외치며
아직도 떠들고 있지요.
그래서 중국이 세계에서 따돌림받고 웃음거리가 되는데...
이는 중국 정부의 교육에 가장 큰 문제가 있지 싶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삶에 빠져 언제까지 허덕이며 살아가렵니까?
담장이란 우선은 나를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나를 외부와 고립시켜 멍청이로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만리장성이 만든 중국의 장성문화는 점점 더 중국은 나와 그 외 모든 민족을
편 가르기 하는 장애물로 발전 중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중원 밖의 문화와 역사까지도 모두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데
오랑캐라고 배척했던 장성 밖의 일임에도 왜 그럴까요?
우리 주변에는 그런 중화사상이나 식민사관의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이
아직까지도 제법 많이 보입니다.
주변 국가인 중국이나 일본의 문화가 우월하다고 우리 문화를 비하하는 사람이 많이 있지요.
이제부터라도 자긍심을 가지고 하나씩 바꿔나가야만 우리 후손에게
올바른 민족성을 심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년 가을만 되면 북방에서 말을 몰고 흉노는 장성을 넘어 중원을 찾아옵니다.
마치 맡겨둔 물건을 찾으러 오는 듯...
그냥 곡식만 가져가면 좋은데 그냥 가기 섭섭하다고 사랑의 증표를 남기고 가겠답니다.
이렇게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다는 노래도 있잖아요.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고 사랑은 얄미운 나비라는 노래도 있고요.
흉노는 이렇게 중원의 인구를 늘리기 위해 가을철만 되면 내려와 사랑의 노래를 불렀답니다.
눈물도 남기고 나비처럼 날아와 벌처럼 쏘고는 슝~~ 하고 날아가버렸습니다.
이런 일이 하도 빈번하게 일어나니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어머니는 존경해도
아버지는 존경하지 않는다 합니다.
아! 나는 누구의 자손이고 내 아버지의 집은 어디인가?
알 수 없이 어느 날 바람처럼 내려와 잠시 사랑만 나누고 다시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
아버지를 어찌 존경할 수 있단 말입니까?
지금 중국의 한족이 97%라고 하는데 그럼 옛날 한족이 중국 인구의 반도 되지 않았다는데
왜 이리 많을까요?
한족의 생산능력이 변강쇠라 흉노 등 북방민족보다 번식력이 월등해서일까요?
이렇게 수천 년간을 서로 섞이다 보니 작은 민족은 자연스럽게 큰 민족에게 흡수되어
모두 한족이 되는 겁니다.
중국 간쑤(甘肅) 성 란저우(蘭州) 대학 생명과학학원 셰샤오둥(謝小東) 교수는 중국인의 유전자
검사를 해 본 결과, "순수한 혈통의 한족은 현재는 없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고 하네요.
보세요.
충격적인 연구결과지만, 용광로 같은 중원에 모두 휩싸여 한족이니 뭐니 하는 허상이
세상에 드러났잖아요.
그의 연구 결과는 중국 서북지역의 소수민족 DNA 연구 등을 통해 나온 것이랍니다.
셰 교수는 "DNA 조사 결과 현대 중국인은 다양한 민족의 특징이 고루 합쳐진 것으로
어떤 특정 민족의 특징이 도드라지게 나타나지 않았다"라고 설명했답니다.
우리 한민족도 사실은 유전자 검사를 통해 조사해 보면 순수한 우리 민족의 혈통보다는
주변의 여러 민족의 특징이 조금이라도 섞인 다민족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기는 하지요.
아! 젠장~ 그럼 지금의 한족이란 짬뽕이라는 말이 아닌가요
비빔밥인가요?
비빔밥은 오른쪽으로 비벼도 되고 왼쪽으로 비벼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의 자랑거리인 만리장성은 북방민족의 수탈을 막기 위해 쌓기 시작한 겁니다.
따라서 중국의 국경선은 만리장성으로 정해야 합니다.
그들 스스로의 국토를 지키기 위해 쌓은 것이지 미래를 내다보고 관광객을 유치한다고
쌓은 게 분명 아니니까요.
그래서 그런 흉노를 막기 위해 제대로 장성을 쌓자고 해서 만리장성을 처음으로 열심히 쌓은 민족이
바로 진나라로 그들도 사실은 북방계열의 서융이라는 작은 민족이지 중원의 한족은 아니지요.
정말 코미디 같은 이야기가 아닙니까?
전국칠웅이 각축을 벌일 때 진나라 위치가 중원에서 가장 서쪽에 있어 다른 나라가 진나라를
오랑캐라고 부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동안 장성은 중간중간 흙으로 쌓고 살았는데 진나라가 처음으로
듬성듬성 쌓은 성벽을 하나의 성벽으로 잇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만리장성을 쌓음으로 흉노의 칩입을 막겠다고 했는데 오히려 장성 너머 살았던
흉노를 하나로 뭉치게 함으로 만리장성은 오히려 중원의 입장에서는 손해 보는 장사였습니다.
위의 사진에 보듯이 사실 흉노란 만리장성 넘어 살았던 여러 부족을
통칭하는 의미로 봐야 하지 싶습니다.
흉노는 북방에 있으며 서방세계와 극동까지를 모두 길쭉하게 연결하는 하나의 띠라고 생각합니다.
당시에 동서교류의 주축을 이루었지만, 민족도 조금씩 다르고 길게 흩어져 살았기에
하나의 세력으로 뭉치기는 쉽지 않았으리라고 판단되네요.
적석목곽분에 장사 지낼 때 그들이 타고 다녔던 말을 순장하고 씨름을 즐기고 초원에 살았던
기마민족으로 비슷한 생활풍습을 지니고 살았지만, 하나의 강력한 세력은 분명 아니었을 겁니다.
동서 로마의 멸망도 훈족과 피의 그믐날에 들이닥친 돌궐족에 의해 무너지기도 했잖아요.
훈족이나 돌궐족은 흉노의 한 뿌리가 아닌가요?
기후적으로 살기 좋았던 서방세계로 서진했을 것인데 아틸라나 칭기즈칸도
서진했던 이유도 그런 이유였을까요?
오히려 더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민족이 흉노였지 한족은 전혀 아니지요.
중원에서 이름을 그렇게 지어 불렀기에 많은 사람이 흉노를 비하하는데
사실은 기마민족으로 세상에서도 알아주는 월등한 민족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진나라 다음에 유방이 세운 한나라도 늘 흉노의 이런 수탈에 골머리를 앓다가 전쟁도 해 보았지만,
무참하게 참패하며 오히려 오랑캐에게 조공도 바치고 중국의 4대 미녀 중 하나라는 왕소군도
시집보내며 아양을 부리며 점차 힘을 키워 군사력으로 제압하고자 이릉을 보내 토벌하려다
오히려 포위당해 투항하는 바람에 사마천이 오지랖 넓게 이를 대신 변론하다가 불충죄에다가
괘씸죄에 걸려 사형선고를 받고 옥에 갇히게 되었지요.
북방 흉ㄶ 당시에 불충죄로 걸리면 해결하는 방법이 돈으로 해결하는 방법, 그냥 사형을 당하는 방법,
그리고 사내라면 소중이를 자르고 나오는 방법 이렇게 3가지가 있었답니다.
돈도 별로 없고....
스스로 궁형을 자처한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며칠 전 글로 이야기해 드렸죠?
흉노는 왜 사마천의 거시기를 잘리게 합니까?
사마천의 사기도 사실은 흉노의 힘이라고 해도 되겠네요.
스스로 궁형을 자처했으니 사기와 소중이를 바꾼 셈이네요.
그렇기에 그의 사기는 공정하게 서술하지 않고 그의 울분이 붕방 흉노에 대한 반감으로
사기저술에 영향을 많이 미친 편파적인 이야기일 수 있답니다.
이렇게 가장 강력했던 한족의 자랑이 한나라도 시류에 따라 흉노에게 여자도 보내고
조공도 바치고 했답니다.
사실 조공이라는 것이 부끄러운 일만은 아니랍니다.
인구수가 적거나 힘이 약하면 늘 강한 놈에게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잖아요.
그러나 조공이란 당시로는 일종의 국제무역이기도 했으니까요.
상품 교역도 하고 문화도 교류하며 배울 것은 배우고 건넬 것은 건네주는 통상적인
국가 간의 일 중 하나였습니다.
그렇기에 큰 나라에서는 3년에 한 번만 오라고 해도 가는 쪽에서는 일 년에
세 번을 가겠다고 했으니까요.
큰 나라는 체면 때문에 작은 나라에서 가져온 물품의 몇 배나 되는 물품을 보내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규모가 큰 나라는 그놈의 체면 때문에요.
그런데 이런 일을 부끄럽다고 하는 사람이 많지요.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고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중원에 하나의 민족이 다스렸던 나라만 지금까지 존재했습니까?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일은 머릿수 만 많은 한족이라는 긍지로 살아가는 중원의 중국은
이민족의 지배에 오래도록 찍소리도 못하고 눈치 보며 살았던 일이 더 부끄럽지 않습니까?
오랑캐라고 비하했던 그들에게 지배받으며 말입니다.
오히려 오랑캐가 지배했던 시기에 국력이 더 강력했고 문화적으로도 더 융성하지는 않았습니까?
사실 만리장성을 제일 열심히 지금의 모습으로 쌓은 나라는 한족의 명나라 때였답니다.
장성은 부끄럽지만, 지키기 위함입니다.
명나라 정통제 주기진은 1449년 오이라트 부장인 에센(也先)과 허베이 성 투무푸(土木堡)에서
싸우다가 포로가 된 아주 흥미진진한 사건이 생깁니다.
명나라라고 하면 대명(大明)이라고 부르는 중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나라 중
하나였다고 알려졌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이런 이유 때문에 대명이라는 나라가 가장 열심히 튼튼하게 만리장성을 쌓은 불명예를 얻었고
지금 벽돌로 쌓은 모습 대부분은 바로 명나라 때 쌓은 장성입니다.
우리말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이 있는데 아마도 중국에서는
황제 잃고 만리장성 고친다는 말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명나라에서는 포로로 잡힌 정통제 주기진을 포기하고 그의 이복동생인
주기옥을 황제로 앉혀버립니다.
워낙 많은 인적자원이 풍부하기에 포로로 잡혀간 황제는 구할 생각은 않고 말입니다.
에센은 황제를 볼모로 삼아 오이라트와 명과의 무역확대를 위한 무기로 사용하려고 했는데...
옴마야!!!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셈이 되었네요?
그러니 명나라 황제는 닭이고 오이라트의 에센은 개가 된 겁니다.
주기진은 이미 유효기간이 지났다는 말이니까 다시 명나라로 돌려보냅니다.
다시 돌아온 황제는 어찌해야 하나요?
이미 새로운 황제가 옹립되었는데요.
요거 아주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겼습니다.
그냥 가위바위보로 정하라고 할까요? 아니면 제비 뽑기로 정할까요.
주기진은 돌아온 즉시 태상황으로 봉해져 거의 유폐되다시피 합니다.
이에 명나라 중신들은 주기진을 따르던 기진파와 새로운 황제 주기욱을 따르는
기욱파로 나누어 사생결단을 하게 되지요.
결국, 이 투쟁은 병마권을 쥔 기진파가 승리하며 새로운 황제인 기욱이 이번에는 폐위되어
감금당하고 감금당한 지 한 달 만에 의문의 숨을 거둡니다.
궁중에서 의문의 죽음이란 바로 독살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요?
멀쩡하게 숨 쉬고 살았던 젊은 황제가 왜 갑자기 숨을 쉬지 않는 겁니까?
숨이란 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쉬지 않을 수 있는 생리현상이 아니잖아요.
이렇게 하여 주기진은 다시 황제의 자리로 복위하였으니 중국 역사상 한 사람이 두 번이나
황위에 오른 유일한 사람으로 기네스북 기록에 남아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정통제 시즌 2가 시작되는 겁니다.
이렇게 중국의 자랑인 만리장성은 중국인의 주거문화에도 깊숙이 자리하게 됩니다.
마을은 후통이라고 부르는 골목길은 일부러 좁고 구불거리게 만들어 말을 타고 쉽고 빠르게
다닐 수 없고 만들고 사는 곳은 사합원이라고 부르는 특수한 주거형태를 만들었지요.
사합원은 사방으로 모두 등을 돌리고 귀퉁이에 집의 규모와는 달리 출입문만 작게 내어
그곳으로만 드나들게 합니다.
게다가 문 앞에도 바로 들어올 수 없도록 조벽이라는 것을 만들어 가려두었지요.
또 담장은 얼마나 높게 만듭니까?
이런 모든 것이 외부와는 담을 쌓고 살고 싶다는 의지의 발로입니다.
정말 폐쇄적인 민족이 아닐 수 없군요.
위의 사진 속의 모습은 조금 행세깨나 한다고 하면 집을 마치 큰 성벽처럼 두르고
가운데는 주변을 모두 경계할 수 있게 높은 망루를 만들고 망루 아래는 1층에는
문도 없이 만든 후 2층으로만 오직 사다리를 통해 드나들게 만듭니다.
외부의 침입이 있을 시 모든 사람이 이곳 안으로 들어가 사다리를 치우고 버티며 지냅니다.
물론, 망루 안에는 방앗간도 있고 비상식량도 있고 의료시설도 있습니다.
게다가 망루 지하에는 땅굴을 판 후 비상시 외부로 도망갈 수 있는 시설까지 만들고 살았습니다.
그 외부에 있는 출구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곳에다가 만들었고요.
중원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폐쇄적이고 힘들게 살았는지 한국인은 모릅니다.
다시 진나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진나라의 멸망은 영정의 멍청한 아들 호해(胡亥) 때문에 멸망했잖아요.
큰아들인 부소가 진나라를 물려받았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호(胡)는 같은 호(胡)라도 해석의 차이로 나라의 멸망을 초래했지요.
정말 용한 점쟁입니다.
호를 조심해야 한다고 해서 북방의 흉노만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제가 낳은 아들 호해가 진나라 멸망의 일등공신이라니...
이는 시황제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쓰는 이사도 쪼다에 새됐다는 말이지요.
분서(焚書) 이야기를 하려다 잠시 만리장성을 다녀왔습니다.
시황제 시절에 책을 태운 분서 말고 또 한 가지 더 있지요?
네 바로 갱유(坑儒)라고 460명의 유생을 그냥 날로 땅에 묻어 죽인 일이지요.
사람의 목숨은 귀한 것인데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을 해 죽인 일입니다.
차라리 위의 사진에 보이는 저런 인형을 대신 묻어버리지 산 사람을....
신선술과 불로장생이라는 허무맹랑한 유언비어를 퍼뜨린 방사라는 사람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그들과 유생들을 한꺼번에 이상한 말을 했다고 붙잡아 날로 매장시켜 버린 일 말입니다.
꼭 하는 짓이 오늘날의 깍두기들과도 어쩌면 이리도 같을까요?
갱유라는 사건이 있고 진시황은 아마도 병마용을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보세요~
폼 나잖아요.
고기도 먹어 본 놈이 잘 먹는다고...
땅 속에 유생을 묻어보니 병마를 땅에 묻는 생각을 하지요.
지금 많은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병마용이 바로 유생을 땅속에 묻어버린 사건인
갱유를 흉내 낸 것이지요.
병마갱에 묻힌 병마용의 숫자가 모두 얼마나 되는지 아직도 발굴 중이랍니다.
그런데 병마용의 머리 모양을 보면 우리의 전통 중 하나인 상투가 연상되지는 않습니까?
물론, 우리와는 조금 다른 형태의 상투 모양이지만요.
중원에서도 남자의 머리 모습이 우리와 비슷한 상투 형태의 머리 모양을 볼 수 있지만, 다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안의 병마갱 말고 중국에는 이렇게 병마를 땅에 묻은 곳이 여러 곳 있다지요?
그중 한 곳이 쉬저우(徐州)에 있는 병마갱 또한 유명한 곳이지요.
진나라의 뒤를 이은 한나라도 진시황 병마갱이 무척 부러웠나 봅니다.
그래서 쉬저우에 제법 규모가 큰 병마갱을 만들어 사후에 병정놀이를 하려고 했나 봅니다.
한나라 병마의 모습은 품질이 원조 맛집인 진나라보다는 조악해 보입니다.
역시 병마용은 진시황 시절에 만든 아주 멋진 모습이 아니라 레고 블록처럼 미니어처의 모습이네요.
역시 원조 맛집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갱유라는 일을 해보았기에 시황제는 자신의 무덤 주위로 대규모 병마갱을 만들어
자신을 호위하도록 죽어서도 흙으로 만든 장난감 놀이를 하게 되었지 싶습니다.
죽은 후 사후세계를 정복하는 꿈을 꾸며 말입니다.
이는 유생을 묻은 갱유보다는 주나라 시대까지 이어왔던 순장 제도의 변형으로 보입니다.
주의 멸망과 함께 중국에서는 순장이 사라졌다고 하네요.
암흑의 세상을 다스리는 황제를 꿈꾼 시황제였습니다.
분서와 갱유라는 이런 못된 짓을 사실은 이사가 뒤에서 조정했지만
후대에 욕은 진시황이 혼자 바가지로 먹습니다.
히틀러가 어디 혼자의 힘으로 비인간적인 일을 했겠습니까?
진시황은 억울하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왜 분서갱유라고 싸잡아 한꺼번에 나만 욕을 하느냐고요.
분서는 이사가 기안하고 자기는 알아서 하라고 했는데 왜 나만 가지고 욕하느냐고요.
사실, 이사가 자기와는 다른 생각을 가진 반대파를 보내버리기 위해 꾸민 일이 분서갱유인데...
그래서 이야기했습니다.
원래 관공서에서 아랫사람이 사고를 쳐도 보스가 욕을 먹는다고요.
어디 욕만 먹나요?
민초들이 뭐라고 자꾸 따지면 옷도 벗습니다.
포청천은 작두로 잘라버렸지만...
관리였다면 적어도 개작두는 피해 범작두를 사용했을 겁니다.
그래도 잘한 일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후국마다 다른 표기와 같은 글자에 다른 발음을 진나라 함양의 말을
표준어로 만들고, 도량형을 통일하고 법령을 정비하고 심지어 마차의 바퀴 간격도 통일했지요.
그 일의 배후 인물은 바로 이사의 힘이라는군요.
한 번은 이사의 큰아들이 심천군 태수로 근무하다 휴가를 얻어
함양에 있는 아버지인 이사의 집으로 왔습니다.
이사는 오랜만에 아들이 와 기쁜 나머지 지인들을 초대하여 파티를 열었습니다.
그때 이사의 집 앞에는 중국산 짝퉁 홍치 리무진 수레는 물론 세계적으로 소문난 럭셔리
수레라는 벤추나 비암다블류 같은 고가 수입 수레 등 개인 자가용 수레와 심지어는 공무 수레까지
수천 대나 주차를 하는 바람에 함양 경찰서 교통계 전 직원도 모자라 전경과 공익이 모두 동원되어
이사의 집 부근의 주차질서를 잡는다고 난리법석을 피우는 걸 이사가 직접 보게 됩니다.
이사의 옛날 스승인 순경이 "사물이 너무 번성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라는
가르침을 받은 게 문득 생각납니다.
순간 이사는 뒷머리가 쭈뼛 솟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는 생각합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나 위에는 폐하 말고는 아무도 없다.
아~~ 이제 나의 부귀도 극에 달했구나....
색쇠이애이라고 아름다움도 세월이 지나 시들면 사랑도 멀어진다고...
사물이 극에 달하면 쇠하기 마련인데 이제부터는 내리막만 있구나 하며 앞날을 걱정했다 합니다.
역시 이사는 세상 보는 눈이 佳人에 버금가는 안목을 가졌습니다.
인간은 들이마신 숨을 언젠가 내뱉어야 합니다.
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라고 별수 있겠어요?
숨 내쉬지 않고 들이마시고만 살 수 있는 사람은 지금까지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명나라 황제였던 경태제 주기옥도 숨을 쉬지 않으니 폐위된 지 한 달 만에
29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잖아요.
지금도 우리 주변에 쥐꼬리 만한 권력을 잡았다고 별 이상한 짓거리하는 사람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런 권력이 얼마나 간다고 눈꼴 신 짓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자주 인용하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이 시작된 시 한 편 보면서
오늘 이야기를 마치려고 합니다.
이 시는 흉노의 선우(單于)에게 시집간 중국의 4대 미녀 중 낙안(落雁)이라고 했던
왕소군(王昭君)의 슬픈 사연을 노래한 당(唐) 나라 시인 동방규의 시 소군원(昭君怨)의
마지막 단에 나왔던 춘래불사춘에서 유래했다죠.
한(漢) 나라 국운 처음에는 융성했으니
조정에는 무신도 넉넉했다네
어찌 꼭 박명한 여인이
괴로움을 겪으며 먼 곳까지 화친하러 가야 했던가
漢道初全盛
朝廷足武臣
何須薄命妾
辛苦遠和親
흐르는 눈물 가리고 단봉성을 떠나
슬픔을 삼키며 백룡대로 향하네
선우(單于)는 놀라 기뻐했으나
더 이상 옛날의 그 얼굴 아니었다네
掩涕辭丹鳳
銜悲向白龍
單于浪驚喜
無復舊時容
오랑캐 땅엔 꽃도 풀도 없어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옷에 맨 허리끈이 저절로 느슨해지니
가느다란 허리 몸매를 위함은 아니라오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自然衣帶緩
非是爲腰身
시인 동방규가 흉노 땅에 가보지도 못하고 무식한 티를 내며 쓴 글입니다.
오랑캐 땅에도 풀이 돋고 꽃도 피걸랑요.
흉노를 몰라도 너무 몰라~~
당나라도 사실은 오랑캐라는 선비족의 나라인데?
그렇기에 가을만 되면 천고마비라고 말이 싱싱한 풀을 먹고 포동포동 살이 쪄
만리장성을 넘어오는 것도 모르고...
내일은 진시황 사후에 숨 막히게 돌아갔던 당시로 다녀오렵니다.
함께 가보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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