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5. 15. 09:38ㆍ佳人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사마천의 사기
이제부터 이사는 그동안 마음 먹었던 생각을 하나씩 현실로 만들어 가는 큰 문으로 들어섭니다.
그동안 배우고 생각했던 일들을 말입니다.
이럴 경우 정말 신이 납니다.
세상이 모두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니까요.
세상의 중심은 자신이고 모든 게 나로 인해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람은 자리가 이런 일을 할 수 있게 하지요.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승상의 자리가 말입니다.
그런데 꼴 같지도 않은 사람을 보면 자기가 그런 일을 한다고 착각하고 살지요.
진나라는 사실 전국칠웅 중 제일 서쪽에 있는 나라로 중원에서 볼 때 야만인이라고
생각했던 그런 나라였는데 우선 주나라 이후 오래도록 유지되었던 제후라는 제도를
없애고 중앙집권제를 도입합니다.
이제부터 지방에서 폼 잡지 말란 말입니다.
그냥 위의 지도처럼 그림만 그리면 모든 나라가 저절로 진나라 영토가 됩니다.
폼은 진시황 혼자만 잡고 그 아래는 승상인 나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그 아래 지금까지 거들먹거리고 살았던 모든 제후는 군수나 면장 정도만의 권한으로
살아가라는 의미입니다.
당시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며 중앙에 가장 힘이 센 군주국이 있고 나머지 나라는
제후국이라고 하여 일종의 주권을 가진 지방자치제와 비슷하게 천하가 운영되었지요.
지금의 연방제를 실시하는 국가를 보면 비슷하지 않을까요?
군주국의 천자만이 여섯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를 탈 수 있고 솥의 숫자도 가장 많이 보유했지요.
바로 위의 사진에 보이는 게 바로 천자만이 탈 수 있다는 6마력 여섯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입니다.
여섯 마리 말이 가지런히 누워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통해 보고 계십니다.
주나라 천자가 탔던 천자가육(天子駕六)의 실제 모습입니다.
위의 사진속의 주왕성 유적이 발견됨으로 천자의 실체가
신화로만 내려오던 이야기가 사실로 밝혀졌지요.
당시는 천자가 죽으면 그가 사용했던 물건과 마차와 말까지 그대로 순장했기에 지금까지 남아있지요.
그때까지는 이야기만으로 천자는 여섯 마리 말이 끄는 마차를 탄다고 전해졌지만,
뤄양에서 발견된 위의 사진 속의 차마갱이 발견되며 그동안 말로만 전해졌던
일들이 사실로 드러났던 역사의 현장 사진입니다.
이번에는 솥으로 계급을 나눈 일입니다.
솥이란 바로 얼마나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식솔을 거느리냐의 문제이기에 아무리
솥 장사를 했더라도 천자만이 아홉 개의 솥을 가질 수 있었답니다.
솥의 숫자란 바로 군사의 숫자나 마찬가지지요.
우리가 정혁(鼎革)이라는 말은 솥을 엎어 다시 놓는다는 의미로
혁명을 의미하는 것도 그런 의미이지요.
그런데 이제 천하는 하나의 국가만 존재하고 나머지는 그야말로 중앙에서 임명하는
지금의 지방정권 형태로 변하게 되었답니다.
제후라는 제도가 지금까지 통일을 저해하는 첫 번째 이유였고 가끔 제후국이 강해지면
천자의 나라가 오히려 제후국이 되는 하극상이 늘 일어나곤 했지요.
그때까지는 군주국이 하나 있고 고만고만한 제후국이 있어
늘 서로를 견제하고 협력하고 살았지요.
당시 중원에서 G7이라는 전국 칠웅은 사실 1+6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재미있게 읽었던 3 국지가 아니라 1.7 국지라고 해야 하듯이...
이때 진나라가 점차 융성해짐에 따라 자초 이인의 할아버지인 혜문왕 시절에
귀곡 선생 휘하에서 공부했던 소진과 장의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여러 나라를 다니며 서로 반대되는 남북으로 뭉치자는 합종과
동서로 뭉쳐야 산다는 연횡을 주장하며 서로의 뜻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소진은 진나라를 제외한 여섯 나라가 남북으로 합종을 함으로 진나라에 대항해야 한다고
유세한 덕분에 여섯 나라를 공동으로 관리했던 큰 벼슬을 얻었고 같은 스승 아래 배웠던
장의는 진니라 출신으로 소진의 한종을 깨고 진나라가 천하제퍠를 하려면 여섯 나라가
뭉치는 것을 각개격파하여 와해시켜야 한다며 진나라는 먼 곳은 친하게 지내고 가까운 곳은
무력으로 공격하는 원교근공(遠交近攻)을 국가 기본 전략으로 삼아 서로 합종을 못하게
멀리 떨어진 나라는 서로 평화조약을 맺고 가까운 나라부터 공략을 함으로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마침내 진시황에 의해 천하를 제패하고 중원을 하나의 나라로 통일했습니다.
이런 합종관계를 부수고 연횡전략을 펴며 하나의 나라로 통일했기에 진시황의 진나라를
최초의 통일국가로 생각할 수 있겠네요.
사실 통일국가라는 의미는 지금으로 보면 겨우 중원에만 해당되겠지만...
중원을 화하라고 예전에는 불렀지요.
화하이적(華夏夷狄)이라는 말이 있는데 황하 유역인 중원과 주변 오랑캐라는 말로 사용되다가
이적을 동서남북으로 더 세분화하며 동이, 서융, 남만, 그리고 북적이라고 불렀고요.
그러나 네 군데 오랑캐 문화가 중원으로 흘러들어오며 이를 더욱 발전시켜 모두 중국화 하면서
가장 필요한 것이 주변 오랑캐라고 했던 민족으로부터 흘러들어온 역사도 중국 역사로 만드는
일이기에 지금 중국에서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중국의 역사에 포함시키는
작업을 불철주야 열심히 하고 있지요.
춘추시대는 나라 사이에 전쟁을 해도 땅을 일부 받거나 경제적으로 보상을 받고 적당히 끝내고
후손은 살려두어 조상에게 제사 지낼 수 있게는 했는데 전국시대로 넘어오며 후손이 와신상담하며
나중에 다시 복수할 수 없도록 아주 멸족을 시킴으로 제사 지낼 후손의 씨를 말려버립니다.
세상은 점차 독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위의 그림이 바로 쓸개를 천장에 매달아 두고 쓸개의 쓴 맛을 제대로 맛보는 그림입니다.
쓸개를 맛본다는 상담(嘗膽)은 정말 세상을 독하게 사는 방법이지요.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1일 5회 이상을 드나들 때마다 맛을 본다?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자면 세상이 시끄러워지지요.
그렇습니다,
옛 제도가 좋다고 고사를 인용하며 다른 여러 신하가 예전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과거로의 회귀....
어느 나라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개혁이 혁명보다 더 어렵다고 하지요.
지금뿐 아니라 그때도 늘 세상은 진보와 보수가 대립각을 세우고 싸웁니다.
그러나 진보였고 혁신적인 생각을 지녔던 사람도 세월이 흐르면 다음 세대에는 고리타분한
보수가 되는 게 세상의 이치입니다.
서로 잘났다고 싸워봐야 결국, 같은 이치입니다.
당시 진나라는 진보와 보수가 아니라 법가와 유가의 싸움이었지 싶습니다.
그러나 진나라는 일찍이 상앙으로부터 법가가 득세한 나라였기에 이사로 이어지며
그 전통을 유지했나 봅니다.
상앙은 진나라에 아주 엄격한 법을 시행해야 하다고 했으며 그 본보가로 다음 왕위를 물려받을 태자가
법을 위반하자 차마 태자를 벌할 수 없어 그의 스승의 코를 베어버리고
다른 스승은 이마에 묵형이라는 벌로 다스렸다고 합니다.
묵형이란 얼굴에 지금의 문신인 타투를 하여 평생을 죄인으로 살게하는 방법이지요.
윗사람을 벌하고 이와함께 아래 사람은 공과를 살펴 인센티브와 같은 포상을 하니 진나라 병사는
마치 야수처럼 변하여 전쟁만 일어나면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제일 먼저 앞장 서서 적의 목을 잘라
가져오니 진나라와 싸운 나라는 그런 모습을 보고 역시 야만적인 나라라고 감히 마주쳐
전투하기를 꺼리니 이런 전쟁이 승자는 진나라임이 분명해졌지요.
상하 구분하지 않고 엄격한 법집행을 통해 처벌과 포상, 그러니 당근과 채찍으로 나라를 다스렸던
법가의 거두 상앙이 진나라 통일의 초석을 다졌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중원에 여러 나라가 함께 살아갈 때는 이렇게 카리스마가 있는 법가의 방법으로 일사불란하게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천하를 통일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지 싶기는 합니다.
이런 법가의 전통이 이어오며 진나라는 전국칠웅 중 제일 잘나가는 나라가 되었지 싶습니다.
이사는 "옛날은 능히 천하를 통일할 능력을 갖춘 자가 없었으나 지금은 전지전능하신 황제께서
계셔 흑백을 가늠하는 기준을 세우시고 천하의 챔피언은 황제 한 분만이면 족합니다."
The Winner Takes It All이라는 노래도 있잖아요.
요고 얼마나 진시황에게 귀여움 받는 말입니까?
진시황이 볼 때는 이사라는 녀석이 예뻐 죽겠습니다.
왜 아니겠어요.
가려운 곳만 미리 알고 긁어주니까요.
그리고 말을 잇습니다.
"옛날로 돌아가면 중구난방이 되며 반대를 일삼는 자들은 뒤로 돌아서서 호박씨나 까고
불평이나 하며 몰려다니며 당파와 같은 패거리 짓거리만 합니다."
조일 때 조여야지 풀어주면 안 된다는 말이겠지요?
그다음에 아주 결정타를 날리지요.
무위지치(無爲之治)...
푸~ 하하하하하~
우선 밑줄 쫘아아악~~ 치고요.
옴마! 이 사람 보소~~
무위지치란 황제란 덕이 지극히 커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천하가 저절로 다스려진다는 말입니다.
황제란 존재만으로도 세상이 마음먹은 대로 돌아간다는 말이 아닌가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가 분명하지만, 시황제는 이런 말을 하는 이사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근거리에 두고 써야 합니다.
이 말은 현대에 이르러 바로 리모트 컨트롤의 발명으로 이어집니다.
손가락만 까딱거리면 저절로 마음대로 작동하니 무위지치라는 요것이 바로 리모컨 아닌가요?
세상의 편리한 이기인 리모컨은 중국이 가장 먼저 원리를 발명한 것입니다.
이런 소리를 진시황에게 했으니 진시황 영정은 얼마나 속으로 흐뭇합니까?
예뻐서 환장하겠습니다.
이사를 쪽쪽 빨아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하는 녀석을 그냥 두면 안 됩니다.
반대하는 저 녀석들이 힘을 모으고 세력이 커지면 큰일 납니다.
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유가를 이번 기회에 박살 내버리는 일이지요.
이제부터 역습에 들어갑니다.
그러니 세 치 혀로 고사나 몇 마디 달달 외워 태클을 건다면 그런 글을 모조리 없애고 고사를 인용하는
녀석들에게는 큰 벌을 내리면 되지 않겠어요?
정말 간단 무식하며 무서운 방법입니다.
바로 원천 봉쇄하는 일이지요.
"황제 폐하~ 바라옵건대 쓰잘데 없는 문학과 시경, 서경과 백가의 저작물을 몰수하여 태우시고
명령을 내린 지 30일이 되어도 버티는 자에게 이마에 먹물을 들이는 묵형을 내리시어
3D 업종 중 가장 하기 싫어하는 무식한 일인 만리장성 쌓는 공사판으로 보내십시오."
위의 사진 속에 보이는 것이 대나무를 얇게 잘라 글을 적은 죽간입니다.
글자를 잘못 쓰면 그 글자만 고치는 도필이라는 직업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등장하는 환관 조고가 바로 도필의 기술이 있어 처음 궁에 들어오게 되었답니다.
"단 의약, 농사에 관한 책과 점을 치는 점서는 태우지 말고 만약 이를 배우고자 하면
관리를 스승으로 삼아 배우면 됩니다."
그래도 의약과 농사에 관한 것은 그때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당시에는 만리장성 쌓는 곳으로 보낸다는 것이 삼청교육대나 아오지 탄광보다
더 무서운 형벌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식함의 대표주자라는 분서(焚書)라는 희대의 코미디 같은 사건입니다.
역시 중국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요.
아니군요?
사진 한 장 첨부합니다.
진시황에 버금가는 분서에 관한 참고 사진입니다.
위의 사진은 독일 베를린의 베벨 플라츠라는 광장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광장 한가운데는 바닥에 작은 유리로 덮어 놓은 곳이 있는데 유리 아래로 내려다보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서고로 바닥에 하이네의 글 "책을 태운 자 결국은 인간도 태운다."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네요.
나치 시절에 문학, 철학, 예술 관련 서적을 불태운 분서 만행(Memorial to May 10,
1933 Nazi Book Burning)을 표현한 것이라네요.
당시 이곳에서 2만여 권의 책을 반 독일적인 책으로 규정해 1933년 5월 10일 불질을 했다지요?
중국의 진시황이 이사와 함께 저지른 분서의 현대판이지 싶습니다.
히틀러는 진시황이 인생의 멘토로 삼고 싶었나 봅니다.
베벨 광장(Bebelplatz) 한가운데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있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쉽습니다.
이것은 법가에 속하는 이사가 사실은 반대의 생각을 하는 유가나
다른 학파를 응징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 문제는 나라를 경영하는 방법을 순리대로 물 흐르듯 부드럽게 할 것인가 아니면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엄격하게 법을 집행함으로 강건하게 끌고 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지요.
사실, 0.5나 1/2은 같은 의미인데 서로가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시황제의 사인을 받아 공표하고 전국에 책을 불사르는 불장난과 불꽃놀이가 밤하늘을 수놓습니다.
화려합니다.
아름답습니다.
세상에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집니다.
진나라가 멸망하고 항우가 진시황이 지은 아방궁을 태웠는데 석 달 열흘을 타고도
다 태우지 못했다는데 분서로 책을 태웠을 때도 그에 못지않았을 겁니다.
당시 책이라고 하면 종이로 만든 게 아니라 대나무에 쓴 죽간이라는 것이었죠.
대나무 껍질을 얇게 잘라 그 위에 글을 적은 대나무를 엮어 책처럼 만들어 사용했지요.
당시에 있었던 사진 한 장 첨부합니다.
공자의 고택인 공부에 가면 위의 사진에 보이는 뻘쭘하니 이상하게 생긴
칙칙한 색깔의 담벼락이 하나 있습니다.
이름 하여 노벽(魯壁)이라네요.
노벽이라면 노(魯) 나라 담벼락이라는 말이 아니겠어요?
노나라라고 하면 이게 도대체 언제의 일입니까?
연결된 것도 아니고 거두절미하듯 대부분 사라지고 그냥 일부만 잘라 놓은 듯 남아있습니다.
진시황 시기에 있었던 분서갱유 사건 때 공자의 9대 손자 공부(孔鲋)가 논어, 상서, 예기, 춘추,
효경 등의 유가 경전을 담벼락 안에 감추어 외부로 흙을 발라 보존했다는 노벽입니다.
분서갱유라...
진시황과 이사가 벌인 정말 단순 무식한 행동이었지요.
그러니 분서 사건이 생기자 담벼락 안에다 감추어버리고 그 위를 흙으로 덮어버렸다는 말이겠네요.
잊고 지내다가 후에 한나라 경제 때 담벼락 안에 숨겼던 것이 발견되었다 합니다.
물론 당시에 숨긴 것은 종이가 발명되기 전이니까 책이 아니라 대나무에 적은 죽간이었을
것이며 진시황이 천하를 최초로 통일한 위대한 황제로 자리했지만,
분서갱유로 말미암아 빠떼루 받고 또 감점 들어갑니다.
중국의 만리장성은 중국인이면 누구나 자랑스럽게 여기는 세계적인 삽질입니다.
만리장성은 달나라에서도 보인다고 하는데 사람 눈이 망원경도 아니고
역시 중국인의 뻥은 알아주어야 합니다.
왜 그런 대역사를 삽질이라 할까요?
이유가 장성을 쌓아 외적으로부터 목숨을 건진 사람보다 장성을 쌓다 죽은 사람이 더 많다는
말이니 장성을 쌓았다고 넘어 올 외적이 넘어오지 못했던 적이 한 번도 없잖아요.
그 긴 장성을 모두 물 샐 틈 없이 지킨다는 일은 아무리 중국의 인구가 많다고 하여도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한족의 나라인 명나라 수도 북경으로 들어올 때
산하이관을 지키던 오삼계가 산하이관 문을 활짝 열어주었기에 들어왔지요.
또 오이라트의 에센은 만리장성을 넘어 명나라 황제를 포로로 잡은 전무후무한 일도 벌어졌잖아요,
위의 사진 속이 천하제일관이라는 문이 지금의 산하이관입니다.
만리장성은 시황제 이전부터 군데군데 있었던 장성을 제대로 이어 쌓았기에
진시황 때부터라고 합니다
비록 허술하게 흙으로만 주로 쌓았겠지만요..
그런 왜 시황제는 만리장성에 목숨을 걸고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의
제일로 장성 쌓기 10개년 계획에 몰입했을까요?
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어느 날 진시황이 아주 유명한 미아리 점쟁이에게 복채 두둑이 내고 점을 쳤답니다.
그랬더니 점쟁이가 오랑캐라는 의미가 있는 호(胡)라는 한 글자만 달랑 써주며
조심해야 한다는 말만 했답니다.
엄청난 복채를 주었음에도 달랑 글자 하나로 끝났습니다.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 호만 조심하면 된다고요.
진나라 때까지 늘 북으로부터 추수 때만 되면 연중행사로 가을 축제하듯 군사를 몰고 내려와
곡식을 털어 다시 돌아가는 흉노를 호라고 불렀다네요.
그래서 시황제는 점쟁이가 알려준 호라는 의미가 흉노라 생각하고 흉노가 칩입하는 길목에
장성을 쌓기 시작하며 그때까지 드문드문 쌓았던 만리장성을 대대적으로 개보수하게 되었답니다.
흉노는 일 년 중 내내 조용히 지내다가 가을 추수 때만 되면 마치 맡겨놓은 물건 찾아가듯
만리장성을 넘어 중원으로 밀고 내려와 그동안 고생하며 지은 농작물을 가져가는 겁니다.
쌀농사를 지을 수 있는 기후의 경계가 사실은 만리장성과 같은 위도이거든요.
장성을 기준으로 강수량이 연간 400 mm의 기준선이 되기에 장성 이북은
논농사는 절대로 지을 수 없는 겁니다.
그러나 이들이 수시로 내려오는 것은 흉노의 군주인 선우가 정한 것이 아니라
하늘이 정한 일이라는 것이죠.
그곳에서 농사짓고 살 수 있다면 힘들고 목숨까지 걸며 왜 내려오겠어요.
기후 변화가 몰고 온 현상이라고 봐야 합니다.
이제 세계는 기후변화로 우리나라가 아열대 지방으로 변해갈 것이고 평균 기온이 점차 올라가면
만리장성 이북에도 논농사를 지을 수 있기에 더는 내려오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정저우처럼 기상이변이 생겨 너무 많은 비가 내려도 많은 사람이 피해를 당하지요.
우리말에 가을을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말이 살찌고 푸른 청명한 하늘이 높아 보이기에 아주 좋은 계절의 의미죠?
게다가 오곡이 무르익고 결실을 맺기에 풍성한 계절로 마음마저 넉넉하고 푸근해지는 계절입니다.
여름 내내 덥고 습도 또한 높아 짜증 난 시간을 보내다가 천고마비의 계절만 되면 정말 살만한 시기지요.
그러나 중원에 사는 한족은 우리와는 반대로 천고마비가 식겁하는 계절입니다.
흉노는 일 년 내내 장성 이북의 푸른 초원에서 말을 키우기에 여름 내내 푸른 풀만 먹어
가을만 되면 말이 포동포동 살이 찝니다.
그런 말이 운동도 해야 하고 다이어트도 필요하고 또 한참 힘쓸 때이기에 함 자랑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장성을 쉽게 넘어와 중원의 곡창지대로 말을 달리며 추수한 곡식을 털어가는 겁니다.
정확히 말이 살찌는 시기가 바로 중원에서 추수할 때이거든요.
그래서 중원에 사는 한족은 가을이 천고마비라고 하는 표현은 악몽과도 같았으니 별로 좋아하지 않지요.
그리고 만리장성을 넘어온 북방민족은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이지는 않았다지요?
그 이유가 장성 아래에 사는 민초가 매년 농사를 지어야 하고 가을이면 그 농산물을 수탈하기 위해
매년 넘어오기에 농사지을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네요.
오히려 인구를 늘리기 위한 자신의 몸을 희생하며 노력을 엄청나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냥 곡식만 가져가면 누가 뭐랍니까?
왜 생면부지의 아녀자에게 사랑의 증표를 남기고 떠나는 겁니까?
언제부터 서로 사랑하는 사이었다고요.
그러나 흉노는 중원의 아녀자를 사랑해서라기보다는 내년에 가져갈 곡식을 추수할 사람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 사랑의 씨앗을 남겨두어야 하는 아픔이 따랐다지요.
다음 해에 넘어와 작년에 뿌린 씨앗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나몰라라고 하며 또 다른 아녀자와
사랑을 나누고 사랑의 씨앗을 뿌리고 사랑이 끝나면 바람처럼 흔적도 남기지 않고
또 사라지기를 수천 년을 이어 반복...
바람처럼 다니니 바람둥이가 맞지요?
자꾸 매년 이렇게 다녀가면 중원의 아낙들은 정말 가을만 되면 멀리 떠났던 서방님이 오신 것처럼
기다려지고 정이 들겠어요.
가을의 중원은 좋은데 정말 좋은데...
흉노의 사내에게는 정말 좋은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
다음 이야기는 이사의 치적(?) 중 갱유(坑儒)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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